# 13
<13화>
우희는 순간, 말이 막혔다.
남궁찬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실수였다. 하지만 남궁찬은 우희에게 현당이 깨어날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말라 일렀다. 간접적으로 확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가주의 생각이십니다.”
우희는 말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확실하오?”
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큰 동작으로.
현당은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목을 움직였다. 사흘 내내 침상에서 드러누워 움직이지 않은 탓에 몸이 뻐근했다. 굳은 몸을 풀어야 했다.
“살았다.”
한마디를 남긴 현당은 언제 일어났었냐는 듯 침상에 널브러졌다. 얼굴에는 커다란 근심을 덜어낸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드르렁……. 푸우우우……. 드르렁……. 푸우우우…….
코고는 소리가 수련동 안을 울렸다. 금세 잠에 빠져든 것이다.
우희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남궁가주의 말이 닷새 이상 시간이 걸릴 것이라 했다. 길면 보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당은 단 하루 만에 정신을 차렸다. 오로지 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우희는 코를 골며 자고 있는 현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똘똘 뭉쳐 있는 현당의 얼굴이 처음으로 잘생겨 보였다.
제8장 뭐가?
우희는 조심스럽게 굳은 몸부터 펴는 현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지개를 켜고, 머리를 흔들고 허리를 숙였다 젖혔다를 반복했다.
포송을 만난 후, 사흘 만에 잠깐 정신을 차렸던 현당은 다시 잠에 곯아떨어지더니 무려 닷새 만에 몸을 일으켰다. 포송이 왔다간 지 꼭 일주일 만이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대답 대신 우희는 현당이 수련할 때 사용하는 장도를 들었다.
“오래 누워 있었던 만큼 서둘러 무공을 익혀야지요.”
“제길, 쉴 틈이 없군. 나도 쉴 시간을 달라고.”
그때였다.
“살기 위해서는 죽어라 무공을 닦아도 시간이 부족하건만, 쉴 시간을 달라고?”
깜짝 놀란 현당이 얼굴을 돌렸다. 자신과 많이 닮아 보이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남궁가의 가주, 남궁찬이었다.
“오셨습니까, 가주…….”
전에 없이 현당은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뿐만 아니라 장도의 끝을 밑으로 향하게 해서 양손을 모으고 허리까지 굽혔다.
“허, 허…….”
놀란 것은 남궁찬뿐만 아니라 우희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변한 현당의 행동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싱긋.
현당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저를 살려주신 분이 바로 남궁가주이십니다. 은혜를 모른다면 사람이 아니지요.”
일순, 항상 굳은 얼굴이던 남궁찬의 얼굴이 풀렸다.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조각상으로 돌아갔다.
“네가 맡은 역을 제대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만약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우리 적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된다면, 네놈의 목은 내 손으로 직접 따리라.”
손으로 직접 따겠다는 말에 우희는 소름이 돋았다.
정말 목을 가를 사람이었다. 직접 목을 딸 수도 있다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떨리는 눈으로 우희는 현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남궁찬의 말에 돋친 서슬 퍼런 칼날을 현당은 느끼지 못하는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당연하지요. 어차피 쓸모가 없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굳은 얼굴의 남궁찬의 표정이 더욱 딱딱해졌다.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현당이라는 작자는 죽이겠다는 협박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자신의 처한 상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잘 활용할 놈이었다.
남궁찬은 현당을 다시 보았다.
놈이 내전에서 포송을 맞을 때의 모습에서 놈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놈의 모습은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크흠…….”
남궁찬은 큰 기침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문사 우희가 보였다.
“어인 일이신지요?”
남궁찬은 다시 현당을 힐끔 보면서 우희에게 말했다.
“놈이 깨어났군. 그럼 멈췄던 시간은 다시 흐르는 것이겠지?”
우희는 멈칫거렸다.
설마 현당이 깨어나기를 기다려 이렇게 달려올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현당을 살리는 것을 보고, 좀 분위기가 사그라졌을 거라 생각했건만, 시간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다시 사흘이 남았겠군.”
남궁찬이 우희가 들고 있는 장도를 쳐다보았다.
“놈이 다루는 칼이 바로 그것인가?”
“아!”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우희는 남궁찬에게 장도를 넘겨주었다.
“장도라…… 도(道)보다는 수(手, 여기에서는 잔꾀)에 집중하는 사람이 많이 택하는 것이 도지. 하지만, 저놈이 택했으니, 이미 물 건너 간 셈인가?”
남궁찬은 칼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이내…….
“한 번이다. 잘 봐라. 일초. 기지일보.”
갑자기 남궁찬은 장도로 검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전에 현당에게 보여주었던 화련검이었다.
“이초. 신지창파. 삼초. 녹목개화(綠木開花)…….”
남궁찬은 그때 보여주었던 화련검을 지금 다시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현당이 고른 장도를 가지고, 그리고 느린 동작으로 차근차근히, 각 초식의 이름까지 불러주면서…….
창그랑.
시범이 끝나자 장도는 바로 바닥을 굴렀다. 더 들고 있기 싫은 사람처럼 남궁찬이 장도를 내던진 것이었다. 볼 것 없다는 듯 남궁찬은 몸을 돌렸다.
“문사!”
갑자기 불리자 우희는 깜짝 놀랐다. 한동안 남궁가주가 보여주는 화련검에 넋을 잃고 있던 순간이었다.
“예? 예, 남궁가주.”
“저놈…… 제대로 가르치시게. 쓸 만한 사람을 또 찾아야 하는 일이 없으려면…….”
저벅저벅…….
남궁찬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발소리만이 조용한 실내에 울려 퍼졌다.
우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이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직접 눈앞에 칼을 들이밀지 않았을 뿐, 언제라도 현당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분노, 치욕, 그리고 공포……. 이것저것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우희를 감쌌다. 하지만 그녀는 남부맹의 문사였다. 마냥 자신의 감정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남궁찬이 완전히 사라지기가 무섭게 우희는 정신을 차렸다는 듯, 현당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한두 번의 잔기침을 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서두르죠. 시간은 없는데, 할 일은 많으니까…….”
현당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우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도대체 현당이 무슨 생각을 갖고 저렇게 배짱을 퉁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우희가 인상을 찡그리자 현당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남궁가주께서 왜 왔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대답하려던 우희가 머뭇거렸다.
당연히 현당의 상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왜 현당의 상세가 궁금했을까?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남궁찬도 현당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공개적으로 말씀은 안 하셨지만, 가주께서도 결과적으로는 나름대로 내 가치를 인정한 셈이지. 나를 살린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우희는 코웃음을 쳤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살리지 않는다면 어찌 정파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니지.”
현당이 우희의 말을 잘랐다.
아직도 얼굴을 찡그린 채 우희는 현당을 쳐다보았다. 왜 저렇게 이 문제를 짚고 매달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 듣고 싶지도 않았다.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열린 귀로 현당의 말이 들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 멀쩡한 사람도 보는 앞에서 죽일 수 있는 양반일세. 그런 양반이 다른 사람이 죽어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렇다 하지. 하지만 자신의 내공을 주입하면서까지 내 상세를 치료할 만큼 나를 살리는 문제가 절박했을까? 단지 죽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희는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차마 몸을 돌려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대답이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놀리는 듯한 현당의 말이 그녀의 귀를 후벼 팠다.
“남궁적이라는 놈이 그리 된 이후, 이제 남궁가의 후인이 누구인가? 남궁적 공자가 일을 당한 후, 이제는 무주공산 아닌가? 그렇다면 가짜일망정 내가 있는 것이 낫다는 판단 아닐까? 아마도 정말 싫은 남궁 뭐시기가 있나 보지. 차라리 남 줄지언정 그놈 주기는 싫은, 뭐 그런…….”
순간, 우희는 가주 남궁찬의 배다른 동생 남궁진(南宮進)이 생각났다. 패검군(覇劍君) 남궁진. 한 아버지를 두고서도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남궁가의 둘째.
우희는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능글거리며 미소를 짓는 현당이 있었다. 알고도 미처 생각지 못한 곳까지 현당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심기에서 자신이 현당에게 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할 말이 생각났다.
“언제까지 나한테 반말을 할 거죠?”
“뭐가?”
* * *
‘제…….’
“길.”
“뭐라고요?”
팍.
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현당의 허벅지를 파고들고 뼛속까지 저몄다.
‘흐웁.’
현당은 신음 소리를 뱃속으로 삼켰다. 괜히 소리를 내뱉었다가는 몽둥이가 더 날아올 게 뻔했다. 어쩌다가 속마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뭐가? 하고 대꾸한 게 말썽을 일으킨 것 같아…….’
“정신 차려요. 칼끝이 흔들리잖아요.”
다시 매질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손목이었다.
“흐으으으…….”
저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행히도 칼을 놓치지는 않았다. 놓쳤다면 이번에도 또 매질이 떨어졌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칼끝이 흔들린 것은 맞았다.
현당은……. 화련검을 장도로 시전 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우희는 땀을 비 오듯 흘리는 현당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혼자 갖는 자격지심에 너무 현당을 몰아붙이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후회가 몰려왔다.
배가 고팠다. 무려 세 시진 이상 현당은 장도를 들고 화련검을 시전 하고 있었다. 정상인 상태에서도 쉬지 않고 한 시진 이상 도를 흔드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하물며 오늘 겨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환자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현당을 몰아붙이는 것이 고작 자신의 화풀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우희의 마음이 약해졌다.
“이제 잠깐 쉴까요?”
우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현당은 들리지도 않은 것처럼 계속해서 도를 흔들고만 있었다.
우희는 다시 화가 났지만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되도록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그마안. 이제 잠깐 쉬지요.”
하지만 현당은 들은 척 만 척 계속 도만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보자 참았던 화가 다시 치솟았다.
“내 말이 안 들려요?”
우희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놀란 눈을 하고 현당이 우희를 돌아보았다.
“응? 뭐가?”
팍.
“제…… 길. 네 시진 이상 쉬지도 못하고 도만 휘두르다 하루해가 다 갔군. 독한 계…….”
완전히 파김치가 된 현당이 침상에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드르렁…….”
* * *
현당은 다시 도를 휘둘렀다.
보고 있던 우희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의식을 차린 게 바로 어제라고 들었는데, 하루 사이에 정말 많이도 가르쳤구려.”
우희뿐만 아니라 그녀 곁에서 현당을 보고 있는 모용곽의 얼굴에도 만족감이 떠올랐다. 모용곽이 보기에도 현당이 장도를 휘두르는 모습은 많이 안정되었다.
“화련검에서 검법의 변초를 배제하고 도초로 변형시켰습니다. 남궁가주께서 직접 시범을 보이셨습니다.”
모용곽의 얼굴이 일순 환하게 밝아졌다.
“오오, 남궁가주께서! 그렇다면 이제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는지 확인할 때가 되겠군.”
우희가 말릴 사이도 없이 모용곽이 앞으로 한 걸음 내밀었다. 단 한 걸음이지만, 그것만으로 모용곽은 장도가 미치는 범위 안에 들어갔다. 초식은 기지일보, 신지창파를 넘어서 녹목개화로 접어들고 있었다.
“헉.”
당황한 우희가 경악성을 토했다.
타하…….
염려대로 모용곽의 신형을 노리고 현당의 장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상대는 모용가의 가주, 무반장 모용곽이었다. 떨어지던 장도가 모용곽이 흔드는 지팡이에 맞고 힘없이 튕겨나갔다. 마치 매 맞은 강아지가 꽁지가 빠져라 하고 제 집으로 도망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장도가 변화를 일으켰다. 녹목개화가 일순간에 다음 초식인 만화화려(萬花華麗)로 흘러가고 있었다.
“허허허. 호오…….”
흡족한 웃음소리가 모용곽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기대했던 대로 잘 흐른다는 것인지,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해 만족스럽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만화화려를 펼쳤으니, 다음 초식은 이제 화련검의 마지막 초식인 진향만리(進香萬里)이리라.
모용곽이 기다렸던 것처럼 회오리치듯 지팡이로 원을 그렸다.
그때였다. 상하좌우 전후 육방(六方)을 한꺼번에 휩쓸고 지나가야 할 진향만리의 도초가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며 중심을 찌르는 화련검의 일초식 기지일보가 현당의 손에서 펼쳐졌다.
“허억.”
휘리릭. 파하앙…….
당황한 소리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소매를 잡아채는 소리, 그리고 가죽 두들기는 소리가 같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