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9화 (9/175)

# 9

<9화>

“그래. 천하에 모르는 무공이 없다는 남궁가의 귀재 남궁적이 아니었나? 자네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게 문제야. 많이 안다는 것은 하나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지. 내가 소림에서 배운 게 뭔지 아나? 하나를 알더라도 제대로 배우라는 거야.”

짝짝짝.

남궁적이 손뼉을 쳤다. 힘 있게 그리고 느리게 손뼉 치는 소리와 박자를 맞춰서 한 번씩 고개까지 좌우로 흔드는 것이 감탄스럽다는 행동이었다. 마치 어떻게 말 한마디에 그런 것을 아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궁금하다는 듯 포송이 팔짱을 끼며 남궁적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어떻게 했냐고?”

남궁적은 시선을 포송의 등 뒤로 했다.

실눈을 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무인검 남궁찬이 보였다.

포송은 남궁적의 시선이 자신을 떠난 것을 보고 그의 시선이 향해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 서 있는 남궁찬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우희가 끼어들었다.

“검을 버리셨습니다.”

포송이 놀라 소리를 쳤다.

“검을 버려?”

이제야 적당한 말이 생각났다는 듯이 남궁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검을 버렸어.”

“검을 버리다니? 그게 말이 되나? 검으로 몇 대를 지속해 온 남궁가에서 검을 버리다니?”

남궁적이 사실이니 믿으라는 듯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남궁찬 가주께서 저렇게 불만이 가득하신 얼굴을 하고 계신 거지.”

포송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렸군.”

“맞습니다. 남궁가의 적통을 이으실 남궁 공자로서는 어려운 결정이었지요.”

남궁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맞아…….”

포송이 궁금한 듯 물었다. 넌지시 고개를 모로 돌리는 것이 무엇이건 한 토막이라도 건지려는 행동이었다.

“그럼 뭐로 할 건가? 검을 버린 것은 다른 대체 수단을 찾았기 때문 아닌가? 혹시 나처럼 권으로 나설 것은 아닐 테고…….”

“그게…….”

우희가 손에 들고 있던 장도를 슬쩍 들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말하려 했다는 듯이 남궁적이 힘 있게 소리를 질렀다.

“도(刀)!”

“도?”

“그래. 도. 그것도 양손으로 잡는 쌍수도.”

“도라…… 그렇군. 원래부터 무공의 깊은 의미보다는 실전성이 강했던 곳이 바로 남부맹의 사대 가문이었지. 쌍수도야! 결국 형식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단 말인가?”

“그렇지!”

남궁적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랬어……. 그래, 그럼 뭐라도 깨우친 것이라도 있는가?”

“물론!”

당황한 우희가 다시 남궁적을 꼬집었다.

“쓰웁!”

남궁적이 어깨를 들썩이며 발뒤꿈치를 움찔거렸다.

“왜 그러나?”

“아아아. 별일 아니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야. 그래서 그 생각을 하면 몸이 절로 움찔거려지네.”

포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인가?”

“응? 뭐가?”

“소문 말일세. 그래서 그런 소문이 돈 것인가 이 말이네.”

“아아, 맞아. 바로 그래서일세…….”

이해가 간다는 듯 포송이 팔짱 낀 손으로 수염이 무성한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성취는 어느 정도인가?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십 년 가까이 잡았던 검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그 결정이야 존경해 마지않지만,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일세. 그러니 분명 생각한 바가 있을 것 아닌가? 무작정 뛰어든 것은 아닐 테고!”

남궁적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련검을 도로 바꾸는 데 성공했지.”

“검을 도로 바꾼다?”

“그럼!”

포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소리도 경직되어 갔다.

“그럼…… 그럼 지금, 자네는 자네만의 무공을 만들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보겠나? 스웁…….”

포송은 더 이상 남궁적의 신음 소리에 신경 쓰지 않았다.

“보고…… 싶군. 보여주겠나?”

“그것은 포송 대협…….”

“그럼!”

남궁적이 우희를 돌아보았다. 포송도 우희를 돌아보았다.

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려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벌써 남궁적이 보여주겠다고 대답을 했으니……. 한숨만 절로 나왔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대신 포 대협은 비웃지나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칼을…….”

남궁적의 말에 우희는 들고 있던 장도를 건네주었다. 도를 받아든 남궁적은 심호흡을 했다.

“후우웁. 후우우…….”

이제 시작이었다.

*    *    *

남궁적은 두 손으로 도를 움켜쥐었다. 행여나 떨어뜨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꼭 움켜쥔 채 말이 없었다.

“후우우우…….”

긴장 때문인지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렸다. 남궁적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화련검. 기지일보.”

남궁적이 소리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 보를 내딛었다. 아직 무게 중심은 뒷다리에 있지만 상체는 완전히 펴고…….

휘릭.

찌르기였다. 양손으로 잡은 장도가 일직선으로 앞으로 내질러졌다. 다시 앞으로 내민 발을 뒤로 뺐다.

“기지일보.”

구령과 함께 다시 앞으로 한 발 내밀었다.

슈아악.

칼바람이 일었다. 칼이 길기 때문에 바람 소리도 컸다.

양손으로 잡은 칼이 위에서 아래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찌르기가 아니라 상단에서 시작한 가르기였다.

다시 시작했다.

“기지일보.”

구령과 동시에 보보(步步)가 앞으로 나갔고 장도도 같이 움직였다.

슈아아…….

사선으로 가르기!

“기지일보!”

샤아악.

수평 가르기…….

씨익.

남궁적은 포송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봤나? 이게 검초를 도초로 변화시킨 기지일보네.”

굳은 얼굴로 포송이 대답했다.

“봤네.”

남궁적의 얼굴도 덩달아 굳었다.

“정말?”

포송이 굳은 얼굴을 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게으름 피우면 안 되겠군. 역시 소문이란 것은 믿을 게 못 돼…….”

볼일이 끝난 듯 포송은 남궁찬을 향해 몸을 돌렸다.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남궁찬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배웅했다. 그를 대신해 우희가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배웅할 요량으로 손을 들다 말았다. 그녀의 곁을 지나가는 포송의 얼굴이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찬의 곁을 스치는 찰나 그가 내쉬는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역시 강호는…….”

남궁적은 그 뒷말이 궁금했다.

뚜벅. 뚜벅. 뚜……벅…….

포송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발소리만 울리고 있을 뿐, 침묵만 이어졌다.

텅.

멀리서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휴우우…….”

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적은 아니, 현당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뒷말이 뭐겠소?”

“예?”

우희가 놀라 돌아보았다.

“지금 포송이 나가면서 중얼거리지 않았소? 역시 강호는 하고 말이오. 그 뒷말이 뭐냔 말이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우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호는…… 넓다.”

“아아…….”

현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우희가 왜 포송 앞에서 어쭙잖은 시늉을 내라고 했는지, 사흘 내내 기지일보만 가르쳤는지, 어제는 왜 모용곽이 와서 병기를 고르라 했는지 모두 이해가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라 해도 한 가지 동작만 먹고 자는 시간만 제외하고 사흘 동안 죽어라 반복하면 나름대로 균형이 잡히고, 자세도 나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동작의 작은 변형도 어느 정도는 쉽게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검초를 다른 병기로 표현하는 변초(變招).

유난히 변초(變招)가 많은 초식이 검초들이다. 때문에 검은 그 실제 용례가 작은데도 만일검(萬日劍)이라는 칭송을 듣고 만병지왕(萬兵之王)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그런데 검초를 쓰는데, 병기마저 바꾼다는 것은 그 변초를 하나하나 모두 익혔다는 뜻으로 보인다.

우희가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안 속으면 어쩌려고 했느냐?”

남궁찬이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색을 하며 우희가 남궁찬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속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속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우희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찬은 이번에는 현당을 향해 말했다.

“왜? 어라? 이게 언제 이런 일이…….”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보였다. 가슴에 커다랗게 손자국이 두 개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부위는 옷이 다 부서져서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큿. 수를 썼군.”

남궁찬은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현당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현당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큭. 가상하다만…… 우리 적아(籍兒)의 흉내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궁찬의 걸음은 계속 이어져 어느새 우희의 앞에 이르렀다.  그의 목소리에 서 있는 날이 더욱 퍼레졌다.

“문사. 저놈을 그렇게도 살리고 싶은 게냐? 하지만 잊지 마라. 나중에 우리 적아가 일어나면, 저놈은 결코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컥.”

우희는 자신의 목을 움켜쥔 남궁찬의 팔에 매달렸다.

“그리고, 넌 우리 사대 세가가 임명한 문사에 지나지 않아. 네가 아무리 문사라도 남부맹의 비밀을 정무련에 흘린다면, 이런 식으로 또다시 장난을 친다면, 그때는 결코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라.”

휙.

남궁찬이 손을 흔들었다. 우희는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하아아. 하아아. 하아아…….”

우희는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한은 일주일이다. 일주일 안에 화련검을 끝내라.”

쿵.

남궁찬이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나가기가 무섭게 우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웩. 우웩. 우웩…….”

현당은 서둘러 우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들겼다.

“원…… 사람하고. 이렇게 가녀린 여자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다니! 그렇게도 문사라는 자리가 탐이 나오? 다 팽개치고, 제 놈들 잘 살라고 하고 나와 그냥 내뺍시다.”

우희가 고개를 들었다. 구토 때문인지 두 눈에 눈물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괜찮아요?”

그때까지 현당은 우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뭐가? 우욱. 욱. 우웨엑. 우웩. 웩웩웩…….”

입장이 바뀌었다. 우희는 바닥에 엎어져서 구토를 하기 시작한 현당의 등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    *    *

수련동으로 돌아온 현당은 완전히 맥이 빠진 모습으로 침상에 널브러졌다. 매가리 하나 없는 모습으로 자신이 토한 토사물 위에 그냥 엎어졌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우고, 구토로 지저분해진 옷을 벗기고,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아리따운 시녀들이 와서 다 했다.

하지만 현당은 아무 짓도 안 했다. 아니, 다른 짓을 할 생각조차 못했다. 눈을 뜨고 살아는 있으되, 그는 산 것이 아니었고, 몸도 그의 몸이 아니었다.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현당의 의식은 몸과 따로 놀았다.

문사 우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치 현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감독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그런 후에 현당이 들것에 실려 수련동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수련동으로 올 때까지 현당의 신분은 남궁가의 소가주. 하지만 수련동 안에 우희와 단둘이 남았을 때는 다시 현당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게……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팔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현당이 물었다. 고개 돌릴 힘도 없었다. 겨우 입만 살아서 움직였다.

“저 옷…….”

우희가 손을 들어 토한 오물로 지저분해져 있는 옷을 가리켰다. 현당이 입었던 옷이었다. 가슴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우희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린 현당은 구멍이 뚫린 옷을 볼 수 있었다.

“그게 뭐 말이오?”

“저 구멍이 언제 난 것입니까?”

당연하다는 듯 현당이 대답했다.

“포송이 뚫었겠지.”

우희는 잠시 침묵했다. 현당이 그것을 깨닫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인지도 알아요?”

“내 가슴을 칠 때…….”

우희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느끼지 못했을 텐데, 그건 어떻게 알았나요?”

싱긋.

“문사와 남궁가주의 대화를 듣다 보니 파악이 되더군. 아마도 포송은 내 칼질뿐만 아니라, 내력도 시험을 했겠지. 아침에 내게 가르쳐 준 주문인니 뭔지가 바로 그것을 막는 것 아닌가? 거기까지! 오늘 벌어진 이 모든 일이 문사께서 꾸민 일이 아닌가?”

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만족스러웠다. 남궁적을 대신할 사람으로 이 남자를 선택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대처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사건의 당사자, 즉 현당이 알아서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 방법이 가장 현명할 수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당처럼 똑똑한 사람이 적격이었다.

현당의 추리는 계속 이어졌다.

“남궁가주가 시간을 사흘밖에 주지 않았으니, 문사께서는 남궁가주에게 내 효용가치를 사흘 안에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거지. 때문에 문사는 정무련에 남궁적이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정보를 흘렸을 테고, 그 소문을 들은 포송이 달려온 거야. 이미 포송이 내 얼굴을 봤으니, 이젠 남궁가주는 나를 죽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말이야!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긴 것이지. 바로 남궁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포송이 나를 남궁적이라고 믿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 어떻게? 뭐…… 얼굴도 모르니,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뭔지는 모르지만, 문사가 아침부터 내게 한 무슨 수법이 바로 그것이겠지?”

우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마치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현당이 얄미웠다.

“대……단하십니다. 좋아요. 맞아요.”

현당은 애써 고개를 치켜들었다. 드러누운 상태에서 머리맡에 서 있는 우희를 쳐다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그 다음은 어떻게 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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