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4화>
제3장 내게 시킬 일이 뭐요?
현당은 조용히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죽었나?’
누군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깨어나셨습니까, 소가주?”
‘소가주?’
가시(可視) 범위 안으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자신을 근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보이십니까?”
눈을 감았다.
‘환청에 헛것이 다 보이는군.’
여자가 시선을 돌려 그의 전신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사지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출렁거리는 느낌이 어디 욕조나 물속에 잠겨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느낌이 있다면 죽은 것은 아니리라.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벗고 있나?’
벗고 있는 것 같았다. 섬유가 와 닿는 촉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여자가 얼굴에 홍조를 띠고 몸을 일으켰다.
“문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셔오겠습니다.”
저 여자가 새삼스레 얼굴이 왜 발갛게 물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하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봤군.’
그놈이 어떤 상태일까 궁금했다.
‘뭐…… 자랑스럽잖아. 이미 드러난 것, 일부러 감추려 들면 오히려 추하다고.’
갑자기 자신이 떳떳하게 느껴졌다. 잘못은 자신의 옷을 벗긴 사람들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럼 뭐 해? 모든 것이 헛것이요, 꿈이건만…….’
다시 환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한바탕 꿈이라면…….’
놀다 가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죄목으로 생각이 이르렀다. 기분 나빴다.
‘강간이라니! 벌려라 하면 벌린 계집이 한둘이 아닌데, 내가 미쳤어? 난 원하지 않는 여자와 정을 통한 적이 없다고. 그건 전부 이름과 명예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것들 짓이야. 자기 자식 년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으니까, 거짓을 고한 것이지.’
화가 났다.
‘내가 이놈들을 찾아가서 딸뿐만 아니라 그것들 마누라까지 다 후벼 버려야겠어.’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던 현당은 도로 풀이 죽었다.
‘그러면 뭐 하누! 이젠 그럴 육신마저 없을 텐데…….’
물건도 같이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죽을 자신의 목숨과도 같다는 것으로 생각이 미쳤다. 오기가 생겼다. 하초(下焦)로 피를 몰아보았다.
발기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피가 몰리는 느낌이었다.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팽창했다.
‘아직 제 기능을 자랑하는군.’
순간, 웃음이 나왔다.
제 기능을 갖고 있으면 뭐 하고, 자랑스러우면 뭐 할까. 곧 죽을 목숨인데, 언제 여자 구경이라도 할 수 있으려나 싶었다.
‘공개형이라잖아. 세상 사람의 절반이 여자인데…… 구경 나온 사람 중에서 여자 하나 없겠어?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여자 구경이라도 해야지.’
만지지는 못해도 볼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형장에 미녀가 나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아(姮娥)는 아니더라도…….’
생각을 하며 물속에 전신을 맡겼다. 나른한 게 전신의 뭉쳤던 근육들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순간.
‘이게 아니잖아…….’
불현듯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분명 형장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끌려 나왔다. 거기까지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장이라니, 여자라니, 물속이라니…… 그렇다면 여기는? 천상이로군…….’
고통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분명 천당이었다. 극락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느긋해졌다. 하지만 자신이 과연 극락에 갈 만한 일을 해왔는가에 생각이 이르자 신뢰감이 들지 않았다.
‘그래. 그 여자가 누군가를 모셔온다 하지 않았어? 오면 분명 깨어났으면 잠수 하고 소리칠 거야.’
분명 지옥이리라. 앞으로 당할 고통을 생각하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잘할걸.’
고아로 태어나서 그만큼 살았으면 잘 산 것이지 무엇을 잘한단 말인가? 그런 세상을 만든 조물주의 잘못이었다. 갑자기 자신은 틀린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정말 구천지옥의 간수가 들어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곧 징벌이 시작될 터였다.
‘어떤 것일까? 내장을 꺼내서 이 물에다 빤 다음 다시 집어넣고 꿰맬까? 아니면 뇌수를 꺼내서 깨끗하게 헹굴까? 아니야, 이 물을 다 먹으라고 할지도 몰라…… 혹시…… 전부 다하라는 것은 아닐까?’
가장 심한 형벌은 자신이 목욕한 물에 내장과 뇌수를 빨아서 다시 집어넣은 후, 그 물을 모두 먹으라고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런다면, 배 터져 죽으리라. 죽었는데 또 죽는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할까? 알아서 기면 좀 덜 괴로울까? 아니면 그릇된 것은 세상 탓이지, 난 잘못 없다고 항변할까? 그것도 아니면 염라대왕 데려와라, 나랑 다시 담판 짓자 호기를 부려볼까?’
시야로 세 개의 그림자가 잡혔다.
영웅건(英雄巾)을 쓴 중늙은이 하나와 계집 둘이었다. 개중 하나는 좀 전에 봤던 얼굴이었다.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갸름하면서도 광대뼈 부위에 도톰하게 살이 오른 게 보지 않아도 다른 부위까지 짐작하게 만들었다.
‘풍만하겠군. 품고 싶을 정도로…….’
처음 보는 계집이 말했다.
“잠시 나가 있어라. 그리고 안에서 기별이 있을 때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도록 하라. 모용가주께서 공자를 위해 대법을 시전 할 테니까…….”
영웅건, 나가라, 여자가 둘……. 모용가주. 시녀인 듯한 계집은 그를 소가주라 불렀고, 또 문사가 어쩌구 했다.
현당은 깨달았다. 안 죽고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여자! 동침! 동침할 수 있다.’
다짐한 내용이 기억났다.
자신감이 생기고 다시 기운이 빠지던 곳으로 피가 몰렸다. 때마침 처음 보는 여자의 시선이 그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건강하군요. 이 상황에서도 흥분할 만큼…….”
영웅건의 시선도 현당의 하체로 향했다.
현당은 불현듯 자신이 발가벗고 있고, 물속에 잠겨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좀 전에 하초에 힘을 모은 그 상태였다.
‘이럴 때는…….’
의연하게 대처하리라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그는 지금 살아 있었다. 희열이 전신을 관통했다. 살았다는 생각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는 판단은 벌써 저만치 밀려났다.
촤아아악.
현당은 머리를 욕조 속으로 깊숙이 담갔다. 놀란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침착해야만 했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형장으로 인계될 그를 이곳으로 빼내 왔다. 분명 그들이 원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서였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는 것은 바로 누군가는 벌건 대낮에 그런 일을 저지를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죽을 자를 빼낼 실력인데 뭔들 못 하겠는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소리도 없이 자신을 죽일 것이고, 그럴 힘이 있을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인데 뭐가 문제랴?
그럼,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그래도 죽을 것이다. 토사구팽이라 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자신을 빼낸 것을 보면, 분명 비밀을 지켜야 할 일이고, 일이 끝난 후에는 비밀 유지를 위해서 죽일 게 틀림없었다.
언제 죽일까? 형장으로 가는 과정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빼온 것을 보면, 분명 자신에게 시킬 일이 중요한 일일 게다. 그리고 일이 성사되기까지는 되도록 죽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을 또 데려올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일을 잘할지 못 할지는 알 수 없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다시 공사를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한 공사를 보수하거나 좀 더 손질해서 맞추려 들었다. 최소한 일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목숨은 보장되는 것이리라.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안 해도 죽고 해도 죽는다. 여기 있으면 분명한 결과는 죽음뿐이다.
살 수 있는 방법은? 도망가는 것일 뿐……. 침착하게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했다.
“푸우웃…….”
현당은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았다.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방어하는 자보다 공격하는 자가 유리한 법.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그래, 내게 시킬 일이 뭐요?”
갑작스런 현당의 말에 우희와 모용곽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치 누가 먼저 입을 열 것인가 미루는 것처럼…….
* * *
벽에 난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자 느긋한 자세로 욕조 속에 전신을 담그고 있는 현당을 볼 수 있었다. 남궁찬은 인상을 찡그리며 구멍에서 눈을 뗐다.
“그러니까, 저 불한당에게 적(籍)의 흉내를 내게 하겠다 이 말이오?”
남궁찬의 말에 모용곽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남궁찬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저자가 할 수 있으리라 보오?”
우희가 남궁찬의 말을 받았다.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수년간 소공자의 수발을 들어온 이곳의 시녀마저 그를 소가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말이죠.”
남궁찬은 들고 있는 서류를 앞으로 들이밀며 흔들었다.
“이것을 보고도 모르시오? 이것을 읽어보기라도 한 것이오?”
우희는 천천히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것에는 현당의 그간 행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아로 태어난 현당이 어떻게 도당을 결성했는지, 기존의 무뢰배들을 어떻게 몰아냈는지, 그리고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무슨 짓을 벌여왔는지, 그래서 흑도 무리의 공적(公敵)이 된 이야기까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우희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그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무소불위(無所不爲)를 자랑하며 그 세력권을 넓히던 현당의 무리가 갑자기 붙잡히고, 그가 처형당하게 된 것도 바로 흑도의 공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급격히 성장하는 현당의 세력에 다른 무리들이 겁을 집어먹고 그들을 형리아문에 팔아넘긴 것이다.
서류에는 마지막 취조에서 그가 한 행동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보고되어 있었다.
마지막장까지 넘긴 우희는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내가 작성한 그대로이군요.”
남궁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이것을 알고도 저자를 내세웠단 말이오? 놈은 흑도요. 게다가 온갖 죄를 저질렀고, 결국 사형까지 언도받았소.”
우희는 대답 대신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욱 강한 의사표시로 느껴졌다.
우희의 당당한 모습에 남궁찬이 머뭇거렸다. 분명 그렇게 판단한 근거가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이유가 뭐요?”
“첫째, 소패라는 저자의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놈에게 제왕 같은 풍모가 있다는 점입니다. 남궁 공자와는 단지 외모만 닮은 것이 아니라, 기질도 닮았다는 것이죠.”
우희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닮은 사람은 많다. 조금만 꾸미면 구별하기 힘든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연습시키면 정말 진짜와 똑같이 행동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기질까지는 닮기 힘들었다. 또 그 기질이라는 것은 연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우희의 말에 남궁찬은 입을 다물었다. 남궁찬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 설명을 계속했다.
“둘째로 놈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이죠. 적 공자가 다시 일어나는 날에는 다시 원위치. 즉, 놈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놈의 자질입니다. 놈이 왜 소패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정리한 서류를 다시 남궁찬에게 넘겨주었다.
“놈은 먼저 자리 잡고 있던 무리들을 내쫓았습니다. 그것도 다시는 넘볼 생각조차 못하게 말이죠. 쫓겨난 자들을 만나 보니, 그 잔인함에 치를 떨더군요. 그렇다고 진짜 잔인했냐고요? 아닙니다. 기에 밀린 것입니다. 하지만 놈이 알고 있는 무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공은 겨우 운기토납(運氣吐納)에 권법이라곤 육합권(六合拳)이 전부입니다.”
남궁찬의 눈이 커졌다.
“운기토납에 육합권만이라고요?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오?”
“사실이니까요.”
우희는 구멍이 뚫린 벽을 들여다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우희의 눈빛이 벽 건너의 현당에 닿았다. 순간, 우희는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 저쪽에서는 보이지 않을 텐데, 건너편의 현당이 벽을 뚫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4장 되옵니다.
촤아아.
현당이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시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그의 몸을 닦아주고 옷을 입혔다. 평소에 그런 수발을 들어왔는지 벗은 몸인데도 머뭇거림 없이 행동했다.
‘소가주라…… 나쁘지는 않군.’
현당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그저 시녀들이 하는 대로 온몸을 맡기고 있었다. 지금 그는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난 누구를 대신하게 될까? 소가주라 부르니, 분명 평범한 신분은 아닐 텐데…….’
좀 전에 봤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 자신은 소가주다. 그럼 분명 가주가 있을 테고, 자신은 가주의 자식이 될 것이다. 또한 그 가문은 이런 고래 등짝 같은 거각(巨閣)을 가질 만한 명가일 테고…….
‘문사라 했지? 그 계집과 늙은이. 둘 중 하나가 문사겠지. 늙은이일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사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먹물 냄새가 날 것이다. 늙은이한테서는 먹물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자가 바로 문사였다.
‘계집이 문사로 있는 조직이 어디지?’
새삼 그 여자의 외모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는 얼굴. 약간 치켜뜬 듯한 눈에서는 힘이 느껴졌다. 좀 두터워 보이는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선이 굵은 외모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매의 굴곡까지…….
꿀꺽.
저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남장을 하고 있었군.’
만약 불룩한 가슴만 아니었다면, 늘씬한 키 때문에 미소년으로 볼 뻔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매력적인 여자였다. 백의가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했어. 죽기 전에 꼭 품어야지.’
불현듯 힘이 솟았다.
“어마…….”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현당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현당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몸을 닦고 옷을 입히던 시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등 뒤의 시녀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외면한 채, 옷 입는 것을 거들고 있었다.
“하하하하…….”
현당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분명 살아 있었다. 다시 한 번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만끽하고 싶었다.
“보았느냐?”
시선을 돌린 시녀들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 보았냐고 묻지 않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