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무사-2화 (2/175)

# 2

<2화>

우희가 왔다는 소리에 모용세가에서는 가주가 친히 나와 맞아주었다.

“소식은 들었소이다. 상태가 어떻다 하더이까?”

우희는 모용세가 가주를 쳐다보았다.

무반장(無班將) 모용곽(慕容廓).

십팔반병기 중 그가 다루지 못하는 병기가 없다 하여 붙은 별호가 무반장이었다. 전장으로 나설 때 그의 손에 쥐여진 병기가 언제나 달랐다는 말이 그의 실력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문이 너무 빨리 퍼졌군요.”

우희는 모용곽에게 찾아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희의 좋지 않다는 한마디에 벌써 전체의 윤곽을 파악하고 있었다.

때마침 실내로 들어오는 절세의 미녀가 있었다.

“가가(哥哥)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남일미(江南一美) 모용미(慕容薇)!’

우희는 가만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모용미가 보였다. 전혀 흔들림 없는 눈빛이 결코 약혼자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 같지 않았다. 또 다른 별호가 강남빙화(江南氷花)라더니, 그 말을 확인시켜 주는 자태였다.

“의식불명입니다. 남궁가의 가주의 말씀으로는 가망이 없다고…….”

우희는 침착한 목소리로 남궁적의 상태를 더하거나 빼지도 않고 들은 그대로 전달했다.

우희의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스으윽.

모용미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께서 나누실 이야기가 있으실 텐데, 제가 시간을 빼앗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희는 모용미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을 텐데,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을 텐데, 누구라도 붙잡고 울고 싶을 텐데,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했다.

조용히 머리를 숙인 후, 모용미가 방을 나섰다.

비틀.

문밖으로 나가는 모용미의 모습을 우희는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 그녀를 실망시켜 주지 않기라도 하듯 모용미가 비틀거리는 모습이 닫히는 문틈으로 보였다.

우희는 정색을 하고 모용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무엇보다 먼저 소문이 더 이상의 파장을 가져오지 못하도록 막아야겠습니다.”

모용곽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래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손이 필요합니다.”

우희는 가져온 두루마리 서류를 꺼냈다.

“전(前) 독고 맹주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을 때, 남부맹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십니까?”

모용곽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습니까? 강북으로 세력을 넓히던 우리 사대 세가들이 하나같이 강남으로 도망치듯 쫓겨 왔지요.”

모용곽의 말을 듣고 우희는 서류를 묶은 끈을 풀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선사께서는 그와 비슷한 일이 발생할 경우를 생각하시고 미리 대비하셨습니다.”

모용곽은 우희가 내미는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남부맹 사대 세가의 주요 명단과 그 밑에 여러 명의 이름들이 병기되어 있었다.

“주요 인사들과 각자에게 해당하는 그림자 무사들의 명단입니다.”

우희가 먼저 남궁적을 가리켰고, 그 아래 쓰인 두 명의 이름도 보였다.

“이들이 바로 그의…….”

“그림자 무사라면 그럼 남궁 공자와 비슷한 체격, 닮은 외모를 가진 자라는 뜻이오?”

우희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정무련 측에서 맹주의 사망 소식을 한 달만 몰랐더라도, 우리 남부맹은 지금같이 강남으로 내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사께서는 그런 일이 또 일어날 것을 대비해 주요 인물과 닮은 사람을 이렇게 수배해 놓았습니다.”

우희는 사대 세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꼬박꼬박 남부맹이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모용곽은 그런 세심한 부분까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맹과 련이 약속한 회동이 불과 반 년 앞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모용곽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지금 어디 있소?”

모용곽이 우희의 생각을 이해한 것 같았다. 안심한 우희는 서둘러 그녀가 모용세가의 가주를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이자들의 위치와 행적을 추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자를 데려와야지요.”

*    *    *

“현당?”

남궁찬은 들고 있던 종이를 구기며 눈을 부라렸다.

“여기 쓰인 대로라면 그는 도적, 강간, 강도짓을 일삼던 흑도의 파락호가 아니오? 그것도 이제는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우희는 이보라라는 듯이 크게 고갯짓을 했다.

“때문에 더욱 안성맞춤이라는 것이지요.”

모용곽이 우희의 말에 동조했다.

“그림자는 애초에 존재해서도 안 되고, 앞으로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현당이라는 자가 제격입니다. 다른 놈이 갑자기 남궁 공자의 대역으로 나선다면, 그자의 행방은 어찌 하렵니까? 현당 이자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놈이 사라져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죽은 자를 어느 누가 찾겠습니까? 그리고…….”

모용곽이 말끝을 흐리자 남궁찬은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우희가 설명을 이었다.

“남궁 공자가 회복되면 그때는 없어져야 하니까요.”

모용곽은 우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차마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얼버무렸건만, 그의 딸뻘밖에 안 되는 우희는 머뭇거림 없이 없애야 한다는 말을 토했다.

죽은 자. 그리고 없어져야 하는 자!

죽은 자라는 말에 남궁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자신의 아들 남궁적이 회복될까?’

남궁찬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기혈은 막히기 시작했고, 운행을 멈춘 내공은 단전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귀찮다는 듯이 남궁찬이 손을 흔들었다.

“이 문제는 문사와 모용가주에게 부탁드리겠소. 두 분이 알아서 하시오. 그가 준비되면, 나머지 필요한 것은 청하는 대로 내가 가져다 드리리다.”

혀를 차며 등을 돌리는 남궁찬을 보며 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찬이 방을 나가자 모용곽이 우희를 격려했다.

“그는 지금 할 기운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수밖에요…….”

우희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할 일이 많았다.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    *    *

우희는 마지막으로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았다.

“이번 일은 아는 사람이…….”

모용곽이 말을 받았다.

“적을수록 좋겠지요.”

“적은 게 아니라 없어야 합니다.”

모용곽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나(羅) 소저와 내가 죽기 전에는 없을 수가 없소.”

모용곽은 끝내 우희를 문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우희는 불쾌함에 몸을 떨었다. 그렇다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감추기 위해 몸을 돌려 창에 기댔다. 숨을 고른 다음 얼굴을 돌렸다.

“영(零)을 만들 수는 없어도 최소화시킬 수는 있지요. 최소화! 이 일을 계획한 저와 진행할 모용가주, 그리고 뒷일을 책임질 남궁가주.”

모용곽이 너무나 모른다는 듯이 눈을 흘겼다.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오. 이 일은 적어도 세 명은 더 알게 될 것이오.”

우희는 몸을 돌리지 않고 말했다.

“그것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우희의 말뜻을 알아들은 모용곽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송자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 자리에 엎어졌다. 본 적은 없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일어나 여기 앉게. 기다리고 있었네.”

일어나라는 말에도 송자는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로도 그는 죽은 목숨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앉으라는 말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

송자는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어찌 감히, 총관님과 함께 겸상을…….”

알아서 기는 송자의 반응에 남경 총관은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지도 모른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번에 자네의 공헌으로 지금 장안에 소문이 자자하다네. 대작들이 모두 두 발 쭈욱 뻗고 잘 수 있다고 말이야…….”

총관이 내미는 잔을 받으면서도, 송자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을 느꼈다. 아직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빠른 속도로 정황을 분석해 보았다. 아무리 남경의 고관 집만을 노려서 유명해졌지만, 분명 현당과 그의 일당은 도적 무리에 불과했다. 자기들은 의적입네 뭐네 떠들어도, 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한낱 불한당 무리였다.

겨우 도적을 잡았다고 총관이 좌우 시위를 물리고 일개 포두와 겸상을 받는다? 여기에는 분명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걱정이 앞섰다. 그가 모르는 큰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자네 눈빛을 보아하니, 내가 여기 있는 게 믿기지 않는 모양이구먼?”

총관이 웃는 낯으로 술을 따랐다.

송자는 조용히 술을 받았다. 일개 포두인 그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일까?’

송자는 뭔가 꼬투리를 잡힌 게 있는지 열심히 생각했다.

송자는 포교로 시작해서 포두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일개 포두의 비리를 가지고, 총관 정도 인물이 왈가왈부할 리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내치면 되었다.

‘그럼 청탁할 것이라도?’

청탁이라고 해봐야 누구를 봐달라거나, 수사해 달라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송자는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포두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총관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한계보다 훨씬 광범위했다. 포두가 할 수 있는 일을 총관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총관이 송자의 고민을 안다는 듯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리 고민할 것 없네. 내가 자네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 리가 있겠나?”

부탁이라는 말이 나왔다. 역시 청탁이었다. 송자는 손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총관이 하는 청탁이라면 거절하기 힘든 명령에 가까울 것이고, 또한 그의 입장에서는 들어주었다가는 나중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놈의 처형일이 언제지?”

송자는 그놈이 누구인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날짜를 계산할 필요도 없었다. 현당을 붙잡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때문에 그의 처형을 직접 확인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언제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총관은 송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자네가 보기에 그자가 어떻던가?”

처음으로 송자는 입을 열었다.

“아까운 놈입니다. 만약 지금 같은 태평성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일국의 왕이 되었을 만한 놈이지요.”

말을 꺼낸 후, 송자는 당황했다. 일국의 왕이라니! 그런 불손한 말을 내뱉은 자신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다가는 어찌 될지 모르는 판에…….

“그래. 죽이기에는 정말 아까운 놈이라더군. 모두들…….”

총관은 자신의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더 있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

송자는 서둘러 총관의 뒤를 따랐다.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는데, 이야기가 끝나다니…….

총관이 나오는 송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가서 드시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아깝다고 말이야. 그 말 잊지 말기 바라네. 뭐 하느냐? 손님을 안으로 뫼시지 않고!”

총관은 서둘러 나서며 송자의 등을 안으로 떠밀었다.

실내에는 아직 손도 안 댄 음식이 가득했다.

*    *    *

탕탕.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현당은 몸을 일으켰다.

“쯧. 어서 들게.”

간수가 들고 온 음식을 내밀었다. 사기그릇에 여러 가지 찬들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전과 달랐다. 잔도 하나 있었고, 조그맣지만 술병도 있었다.

현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방은 중죄인만 다루는 독방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사방이 벽이 아니라 창살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죄수들의 음식이 보였다. 그의 것과 달랐다. 커다란 솥에 한꺼번에 이것저것 부어서 끓인 후에 국자로 대충 나무 그릇에 퍼 담은 것이 이곳 음식이었다. 수저로 먹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집어먹기 때문에 건더기보다 국물이 더 많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제 알 수 있었다. 현당에게 제공된 것은 이른바 최후의 만찬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죄수가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나무그릇을 들어 보이며 그에게 먹으라고 권했다.

함께 옥에 있는 사람들은 내일 날이 밝으면, 현당의 형이 집행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모르고 있던 사람은 현당뿐인지도 몰랐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찌 된 일인지 분위기로 눈치를 채고 있는 것이리라. 싸늘한 냉기가 옥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불쌍하다는 동정과 자신은 저런 처지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가 섞여 있었다. 그중에 가장 크게 형성되는 공감대는 이제 곧 떠날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방해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었다.

간수마저 현당의 식사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배식을 멈추고 기다렸다.

“어서 빨리 줘. 난 배가 고프다고.”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딜 가나 행복한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한 때도 있고,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한자리에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한쪽에서 지르는 소리가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옆 사람과 소곤거렸다. 하지만 너무나 조용했기에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었다.

“저놈, 내일 나간다더니, 신이 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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