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47화
147화. 삭천혁과의 대화.
백마산.
삭천혁은 적호단원 이십 명을 데리고 백마산 아래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홀로 오려고 했지만, 매우 중요한 존재인 차기맹주로 옹립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호위대로 삼아 데려왔다.
“이곳에서 기다리게.”
“안 됩니다. 혹 잘못되면 어쩌시려고.”
“만약 그가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너희들이 도움이 되겠느냐? 솔직히 말해 우리 모두 죽는다.”
삭천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냉정하게 현실을 짚자, 그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구양천이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지금 데려온 이십 명의 무인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기다리거라. 별일은 없을 것이다. 너희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야.”
“조심하십시오.”
그들은 결국 삭천혁의 지시에 복명했다.
삭천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몸을 날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공술을 전속력으로 펼쳤다면 진즉에 구양천이 머무르는 모옥에 도착했을 테지만, 그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파공성이 나지 않도록 적당한 속도로 올라갔다.
산의 중간쯤 올라가자 전망이 탁 트였고, 아담한 모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 구양천이 임시로 머무르고 있는 숙소라고 생각한 삭천혁은 옷매무시를 다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들어오게.”
거의 도착했을 무렵, 구양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소 친근함이 섞인 반말이었기에 삭천혁은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삭천혁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평상에 편안히 앉아 있는 구양천과 그 뒤에 시립하고 있는 적요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물러나 있거라.”
“예.”
적요산은 내 명령에 지체 없이 모옥을 벗어났다.
“이리 앉으시게.”
삭천혁은 내게 가볍게 포권하고는 평상에 앉았다.
“의외로군. 자네가 직접 올 줄은 정말 몰랐어.”
“장안현에서 급하게 회의가 진행되었고, 제가 차기맹주에 선임되었습니다.”
“허어, 정말 축하하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자네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늙은이들을 조심하게. 그들을 무시하지는 말되 일정 부분 견제하란 말일세.”
“조언 가슴 속에 새기겠습니다.”
“여전히 조심스럽군. 맹주가 되었다면 목에 힘이 들어갈 만도 한데.”
“아무리 맹주라지만, 천하제일인 앞에서 목에 힘을 줄 수야 있겠습니까?”
삭천혁은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말투가 한결 편해졌다.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왜 내가 무림맹의 일에 훼방이라도 놓을까 걱정이라도 되는가?”
“저희가 척사검대원을 죽이는 큰 실수를 했으니까요. 물론 그 당사자들은 구양무인께서 모두 죽였지만, 그렇더라도 구양무인께서 복수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있습니다. 아직 천마교, 풍검, 암흑사련 잔당 등이 남아 무림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는 상황이기에 이걸 막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삭천혁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무림맹에서 나와 친분이 깊은 몇 안 되는 무인이 바로 삭천혁이었다.
그는 내 성격을 잘 알기에 빙빙 말을 돌린다거나 잘못을 숨기는 물 타기를 전혀 하지 않았고,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며 사과를 이어갔다.
“척사검대원 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있을 거야.”
“부대주 황엽을 비롯해 일부가 크게 다쳤지만,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리로 데려오시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성대히 제사지내고, 그 가족들에게 확실하게 보상하겠습니다. 또 필요한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적극적으로 반영하겠습니다.”
삭천혁은 조건을 걸지 않고 즉각 내 요구에 응했을 뿐만 아니라, 추가조건까지 제시했다.
분쟁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는 그의 진실한 마음이 느껴졌기에 나는 그를 존대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확실히 차기 맹주님께서는 다르시군요.”
말투가 변하자, 삭천혁은 차갑게 얼어붙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구양무인께 인정을 받으니 이제야 맹주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암흑사련의 잔당이나 천마교, 풍검은 중원무림을 흔들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무림맹에서 그들을 먼저 도발하지 마시오. 그럼 당분간은 무림에 평화가 올 것이외다.”
“암흑사련의 잔당까지요?”
“그들은 산서성에서 어떤 문파를 설립할 텐데, 완벽하게 내가 통제할 수 있소. 보증하지요.”
“구양무인께서 그리 보증해주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확실히 삭 맹주와는 말이 통하니 좋군요.”
“무림의 평화가 제일 중요하니까요.”
“한 가지만 묻겠소.”
“말씀하십시오.”
삭천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에 집중했다.
“삭 맹주도 화 맹주와 많은 시간을 보냈소. 그렇다면 그의 방식에 젖어있을 텐데, 내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시는구려. 진심이외까?”
무림맹과 노선이 다르면 적이라 판단하고 공격하여 굴복시키거나 섬멸했던 화운룡의 방식을 지적하자, 삭천혁은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더는 같은 방식을 고집하기 보다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대 생각이오?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생각이오?”
“제갈군사께 조언을 받았습니다.”
“삭 맹주는 솔직해서 참으로 좋소.”
“부족하면 주변에 조언을 구하는 게 옳고, 제갈군사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이니까요.”
“알겠소. 돌아가시오.”
삭천혁은 잠시 망설였다.
아직 무림맹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뜨뜻미지근하게 물러나는 게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하고는 물러났다.
아직도 척사검대원의 죽음에 분노하는 감정이 깊은 나를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 서자 곧바로 일어선 것이다.
“적요산.”
나직한 내 부름에 적요산은 신속히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어떠냐?”
“무슨 말씀이신지?”
“삭천혁과 나눈 대화를 네가 다 들었다는 걸 알고 있다. 네 마음을 알고 싶구나.”
“이렇게 끝내기는 너무 억울합니다.”
“그래 네 마음 잘 안다.”
난 가만히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입을 열었다.
“척사검대를 제압하라고 명령을 내린 양천린, 그걸 부추긴 온세혁, 실행한 소양혜는 내 손에 죽었다. 또 강우충은 잘못을 사죄하는 의미로 왼팔을 잘랐고. 이만하면 되었다. 현무단, 주작단원을 모조리 죽여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적요산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동료를 잃은 그의 아픔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나는 더 이상 그를 다독이지 않았다.
“황엽과 살아남은 대원들이 곧 이리로 올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죽은 이들을 위해 성대히 제사지내고, 그 유족들에게 보상을 할 거야.”
“죽은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작은 성의지. 때로는 이런 성의가 중요한 법이다.”
“휴우, 죄송합니다. 제가 울컥해서 감히 대주님의 명령에 반발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난 말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에게 어떤 위로를 한들 그 아픔이 쉽게 사라지겠는가?
다만 가해자를 죽인마당에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인 현무단원, 주작단원까지 모조리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후.
삭천혁은 암흑사련 본단을 무림맹 장안지부로 개편하고, 강우충을 청룡단주 겸 무림맹 장안지부장으로 임명하고 청룡단을 배치해 놓고는 남은 무인들을 이끌고 무한현으로 급히 돌아갔다.
빨리 무한현으로 돌아가 해결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었기에 여기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백마산.
“대주님.”
황엽은 나를 보자마자 울컥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무공이 부족하여 살아남은 기구함 때문이었는지 그의 안색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잘 살아왔네.”
지금 어떤 위로가 통하겠는가?
그저 그의 어깨를 다독여주었을 뿐이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살아서 돌아온 이십여 명의 대원들을 일일이 격려해주었다.
대부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제갈문현이 빠르게 조치를 한 덕분에 반신불구가 된 이는 없었다.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른 후에 정주현으로 돌아가세. 그리고 무한현에 있는 가족들은 정주현으로 올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고. 자네들이 원한다면 정주현에서 우리 함께 사세.”
“명을 받들겠습니다.”
황엽이 대표로 즉각 복명했다.
이미 무림맹에서 배신당한 그들이었기에 갈 곳이 없었다.
난 이들을 한 명씩 자리에 앉히고 진기를 몸 안으로 밀어 넣어 차분하게 살폈다.
비록 의술을 익히진 않았지만, 신체구조를 잘 알고 있었다.
또 그들의 단전과 혈맥을 살펴 가능하면 무인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끔 도와주고 싶었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온 그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공감하고 있었다.
난 그들의 상세를 살피면서 동시에 막혔던 혈맥도 뚫어주었다.
덕분에 그들의 혈맥은 확장되고 더욱 튼튼해졌으며, 단전도 더욱 활성화되었다.
그래서일까?
죽을상이었던 그들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천생 무인인 그들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내 마음 한 켠에 쌓여 있던 무거운 돌 하나를 덜어낸 기분이었다.
이후로 적요산은 그들을 지휘하여 무공을 연마했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난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앞으로 그대가 대주를 하게.”
“제가요?”
“왜 문제 있는가?”
“저는 무공이 약합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그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싸움은 적요산이 해야지. 문파를 이끌 재량은 오직 자네뿐이야. 적요산은 내가 책임지고 강하게 키우지.”
내가 강권하자, 황엽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적요산의 말을 듣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럴까?”
내 부름에 적요산은 대원들에게 잠시 휴식을 주고는 급히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황엽에게 대주를 권했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당연합니다.”
“자넨 대주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는가?”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입니다. 황 부대주께서 지금까지 훌륭하게 척사검대를 이끌어왔습니다. 척사검대원 뿐만아니라 무림맹의 누구도 그의 능력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척사검대주는 당연히 황 부대주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난 무위가 약하네.”
황엽이 급히 나서자, 적요산이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가 죽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적요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적요산이 이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황엽이 비록 무공은 약하지만, 다른 면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고 대원들을 잘 챙겼다는 방증이었기에 난 무척이나 이런 상황이 만족스러웠다.
“이제는 받아들이게. 황 대주.”
“제가 이런 중책을 맡아도 될지 모르겠군요. 그저 부대주면 족한데요.”
“충분합니다. 누가 감히 황 대주님에게 반대하겠습니까?”
적요산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결국 황엽은 대주를 받아들였다.
황엽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난 그를 진심으로 격려했다.
“적요산.”
“예.”
“앞으로 독하게 훈련시킬 테니 각오하게. 이렇게 또 당할 수는 없잖은가?”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적요산은 충직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며칠을 더 머무른 나는 그들과 함께 백마산을 떠나 정주현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