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31화
131화. 척휘명.
“언제 오셨습니까?”
척휘명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혈천교주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하지만 혈천교주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기에 척휘명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척휘명은 짜증을 내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목소리에 전혀 힘이 느껴지지 않았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의 머리가 평소보다 커보였고, 다리가 작아보인다는 점이었다.
“어헉.”
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아래에 있었고, 혈천교주가 바닥에 발을 딛고 서서 고개를 위로 젖히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말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입이 열렸다.
“고생했네. 이제 자네와 척무진이 이루지 못한 패업은 이 곡진헌이 이루겠네. 편안히 쉬게.”
“무, 무슨···.”
“뭐긴. 자네의 몸을 내가 차지하는 것이지.”
그제야 척휘명은 혈천교주 곡진헌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곡진헌이란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그저 혈천교는 암흑사련에 충성하는 조직으로 생각했었고, 곡진헌은 지옥혈도 수련을 돕는 늙은이 정도로 생각했었기에 그의 개인적인 신상에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물론 곡진헌은 자신의 이름을 굳이 알리지 않았고, 다른 이들도 모두 혈천교주로 불렀었기에 이름을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래도 무관심했던 건 사실이었다.
오만이 불러온 참사였다.
하지만 혼령을 바꾸는 기이한 대법이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 그럼 난 어찌···.”
“그건 나도 몰라. 어딘가로 날아가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말이 안 돼? 화운룡이 왜 죽었는지 알아?”
반쯤 넋이 나간 듯 했던 척휘명의 표정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설마 화운룡도 이런 방식으로?”
“그렇지. 하지만 실패했어.”
“죽었잖아.”
“죽었지. 하지만 역대 최강이라는 그의 육체를 빼앗진 못했지. 그의 영혼이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나도 몰라. 지금도 구천을 떠돌 수도 있고, 완전히 사라졌을 수도 있지. 걱정하지 마라. 내가 그 실패 이후 많은 연구를 했다. 넌 적어도 다른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지. 크크크.”
“안 돼!”
“쯧쯧쯧. 다시 태어나면 누군가 이유 없는 선의를 베풀 때 넙죽 받아들이지 말고 의심부터 해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네가 이리된 건 너의 오만함과 안일함 때문이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
“소리 쳐봐야 소용없어. 지금 네 모습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곡진헌은 우울한 눈빛으로 척휘명을 바라보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즈만커 단 푸르단. 아즈만커 단 푸르단.”
곡진헌은 마지막 의식을 위해 고대 천축어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척휘명은 의식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 이, 이럴 수는 없어.”
척휘명은 자신이 길게 늘어나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리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던 척휘명의 영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척휘명이 눈을 떴다.
쿵.
그의 옆에 음침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혈천교주 곡진헌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척휘명은 무심한 표정으로 곡진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혈영!”
“예. 교주님.”
“이놈. 내가 지금도 교주이더나?”
“죄송합니다. 련주님.”
“앞으로 조심하거라. 천하를 쟁패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것이다.”
“예. 련주님.”
“그리고 저 시체는 치워.”
“사인은 노환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알아서 처리하고. 자네가 다음 혈교주를 맡게.”
“영광입니다.”
혈영은 충직하게 복명했다.
“저.”
“말해봐.”
“혹, 척휘명이 새롭게 태어난다면 이 사실을 알릴 겁니다. 그럼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푸하하하하.”
혈영의 걱정을 들은 척휘명 아니 곡진헌은 대소를 터트렸다.
“누가 그걸 믿겠느냐? 세상의 누가 영혼을 바꿔치기 했다는 사실을 믿는단 말이냐? 그럴수록 그놈은 미친놈으로 몰릴 것이다.”
“그래도 만에 하나란 게 있습니다. 차라리 그 영혼을 소멸시켰으면 좋았을 겁니다.”
“혈영.”
“예. 련주님.”
곡진헌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영혼을 소멸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가는 나게 어떤 화가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 화운룡을 죽인 후에 내가 몇 년 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지 않는가? 이번에 척휘명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그렇군요. 제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그건 그렇고 이거 괜찮군. 역시 젊음이 좋아.”
곡진헌은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몸을 이리 저리 둘러보았다.
“저, 련주님.”
“말해봐.”
“은밀하게 사람을 풀어 척휘명을 찾아보겠습니다.”
“굳이.”
“아닙니다. 척휘명이 무공을 모르는 미천한 자의 몸에 환생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절세마공과 무인으로서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불행한 일을 겪지 않는다면 분명 골칫거리가 될 겁니다.”
“마음대로 해.”
곡진헌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혈영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 역시 혈영이 걱정한 부분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건 척휘명이 아무리 열심히 무공을 익히더라도 잘해야 절정에 불과할 테고, 자신은 지옥혈도를 십일성이나 익힌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척휘명이 암흑사련에 훼방을 놓을 순 있겠지만, 크게 타격을 입히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혈영 말대로 초기에 척휘명을 잡아 죽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았기에 허락한 것이다.
**
낙양.
낙하(洛河)와 북망산 사이에 자리 잡은 낙양현은 예부터 낙하가 범람하면 피해를 많이 입었다.
하여 북망산 가까운 고지대에는 부촌이, 낙하 주변에는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특히 동남쪽은 빈민굴로 유명했는데, 그 중심에는 낙양거지들이 촌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척휘명은 간신히 눈을 떴다.
넘치던 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 이게 뭐야?”
목소리도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듯 앳된 목소리였기에 척휘명은 깜짝 놀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상거지나 다름없는 아니 진짜 거지 아이였다.
“야, 이 새꺄.”
우렁찬 목소리에 척휘명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덩치 큰 거지새끼가 몽둥이를 들고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본 척휘명은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소리 질렀냐?”
“아니 이 새끼가 처 돌았나? 감히 내게 너어?”
“시끄럽다.”
척휘명은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저었다.
척무진의 손자인 그는 태어난 후 항상 받들어져 살았기 때문에 거지가 된 지금도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예전의 습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덩치 큰 거지는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뒤지려면 호랑이 수염을 못 뽑겠냐? 동냥을 해 오랬더니 여기서 잠이나 처자기나 하고. 그것도 모자라 감히 이 왕팔에게 개겨? 오늘 좀 맞자. 너 같은 놈은 하루 종일 맞아야 정신을 차려.”
“허어, 이런 미개한 놈을 보았는가?”
척휘명은 기가 막혔다.
한 눈에 보더라도 무공의 무자도 모르고 힘만 센 놈이었다.
이런 병신 같은 놈과 드잡이 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서글퍼졌다.
절정의 고수를 발아래 두고 무림맹, 천마교와 맞섰던 때가 머릿속에 생생했다.
“죽어라. 이 새꺄!”
왕팔의 오른손이 크게 반원을 그렸고,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더욱 크게 반원을 그리고는 정확하게 척휘명에게 떨어졌다.
척휘명은 분노하여 손을 뻗었다.
“어라?”
그제야 척휘명은 몸뚱아리에 내공이 한 오라기도 없는 걸 깨달았다.
철이 들기 전부터 벌모세수를 통해 무인이 되기 좋은 몸으로 만들어졌고, 온갖 영약을 먹어 내공을 키웠던 그였기에 내공이 전혀 없는 이런 상황은 매우 낯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빠악.
“아이고.”
척휘명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엄살 부리지 마. 이 새끼. 감히 왕초인 내게 개겨?”
왕팔은 모질게 매질을 이어갔다.
그의 몽둥이질은 실로 예술이었다.
아프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중상을 입을 만한 곳을 피하며 때리고 있었다.
물론 척휘명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기에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놈. 가만 두지 않겠다.”
“아이고. 나 죽네.”
“살려줘어어어.”
척휘명은 처음에는 품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모진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싹싹 빌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난 후에야 겨우 매질이 멈췄다.
“차렷!”
왕팔의 지시에 척휘명은 바닥에서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온 몸이 녹신거리고 죽을 맛이었지만, 몽둥이찜질을 당하자 그의 명령에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내가 누구냐?”
“모르겠는데요?”
“뭐? 몰라?”
“히익. 때, 때리지 마십시오. 머리를 맞았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왕팔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잔뜩 움츠린 척휘명을 때리려다가 그만두었다.
생각 같아서는 더 두드려 패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크게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동냥해올 아이가 줄어드니 자신만 손해였다.
“내가 왕초 왕팔이다.”
‘왕팔? 하아, 정말 촌스러운 이름이다.’
“그렇군요.”
“당장 나가서 동냥해와. 이번에도 제대로 해오지 못하면 너 나한테 맞아 죽을 줄 알아. 알겠어?”
“알겠습니다.”
“나가봐.”
척휘명은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빌어먹을.”
전력을 다해 거지소굴을 뛰쳐나온 척휘명은 낙하강변에서 물에 자신을 모습을 비춰보고는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의 모습이 처량했지만, 슬픈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곡진헌. 이 개자식. 두고 보자.”
척휘명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곡진헌에 대해 울분을 토해냈다.
한참 동안 곡진헌에 대해 욕설을 퍼붓고 악을 쓴 척휘명은 배가 고파서 그만두었다.
“이게 배고픔이란 건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먹고 싶으면 언제든 맛있는 음식을 먹었었기에 굶주림이란 걸 모르고 자란 그였다.
지금은 뭐든지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의 시선은 곁에 놓인 바가지로 향했다.
콰직.
척휘명은 발로 차서 바가지를 깨버렸다.
그는 물로 뛰어들어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아 짠 후에 몸에 걸쳤다.
그래봐야 여전히 상거지 꼴이었지만, 그래도 냄새는 덜 났다.
“승부를 건다. 암흑마교에는 평범한 무인을 단기간에 고수로 만드는 비법이 있다. 역천마혈공으로 승부를 건다. 물론 이걸로 곡진헌 네놈을 어쩌긴 어렵겠지만, 일단 이 비참한 위기를 벗어나야 하니까.”
역천마혈공(逆天魔血功).
천마교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무공으로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주로 하급무사들이 익히는 내공심법이었다.
역천마혈공의 장점은 초단기간에 상당한 내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고, 단점은 급진적인 내공심법이라 이걸 익히다가 절반은 주화입마에 빠진다는 점이었다.
또 빠른 시간 안에 이류에 오를 수 있지만, 거기가 한계란 점도 단점이었다.
하여 매우 위험하고 장래성이 보이지 않기에 정파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심법이었지만, 인성을 상실한 암흑마교에서는 이 심법을 유용하게 활용하여 무림맹에 맞서왔다.
“젠장할. 내가 역천마혈공을 익힐 줄이야. 어쩔 수 있나? 일단 살아야지. 그 다음에 제대로 무공을 익히자.”
척휘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할수록 비참한 마음만 들자, 그는 고개를 흔들어 부정적인 상념을 떨쳐냈다.
척휘명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북망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