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27화
127화. 변화를 택한 남궁세가.
“어째서 조용히 지켜보시는 게요?”
너무나도 침중한 분위기였기에 내 말은 이곳에 모인 남궁가 무인들의 귀에 쏙쏙 들어갔다.
“벌써 자신이 사라지셨소?”
“말을 삼가시오!”
남궁영현이 발끈하며 검을 뽑아들고는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희고 긴 수염을 펄럭이며 분노로 얼굴이 붉게 물든 남궁영현을 보자, 전생에서 사황련을 함께 토벌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성격이 불같은 그는 일단 전투에 나서면 정파인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악독하게 사파인을 죽였다.
물론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다면 그저 과격한 성품의 무인일 뿐,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무인이었다.
“나를 사파인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시오.”
내 조언에 남궁영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씀이시오?”
“그래야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쏟아낼 수 있을 테니까. 날 정파인이라 생각하면 가진 것의 칠 할도 꺼내기 힘들 것이오. 안 그렇소?”
남궁영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황련과의 대전을 끝으로 더는 사파와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그였다.
하여 같은 남궁가의 무인들도 장로나 원로급이 아니면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구양무인은 실로 무서운 사람이구려.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것이오?”
“꽤 많이. 자, 계속 입으로 싸우시겠소?”
남궁영현은 검집을 집어던진 후, 검을 가슴 정중앙으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검은 그의 손을 떠나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이기어검술.”
여기저기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무공으로만 따진다면 가주 남궁검보다 위라는 남궁영현의 본신무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제 끝났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남궁검은 승리를 확신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헛. 이, 이기어검술.”
바람 빠지는 듯한 말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남궁검은 급히 시선을 연무대로 돌렸다가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럴 수가? 구양무인도 이기어검술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이기어검술이 맞붙은 경우는 손에 꼽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남궁가의 무인들은 이 진귀한 광경을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입도 열지 않고 연무대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고오오오옹.
남궁영현의 검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그대로 내 머리를 향해 공격했다.
동시에 내 진기에 의해 조종되는 귀혼검은 남궁영현의 검을 향해 날아갔다.
쩌저정.
콰쾅.
강력한 진기로 둘러싸인 두 검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으헉.”
“크흑.”
주변에서 구경하던 무인들은 진기가 부딪치는 강력한 충격파에 급히 뒤로 물러났다.
일부 내공이 약한 무인들은 가벼운 내상을 입은 듯 얼굴이 희게 탈색되었다.
“다시 간다.”
웅성거림에 무인들의 시선이 다시 공중으로 쏠렸다.
남궁영현의 검이 뒤로 물러났다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귀혼검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와와와와!”
남궁가의 무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남궁영현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했다.
그때 비무를 지켜보던 남궁용무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남궁검 곁으로 다가갔다.
“가주.”
“말씀하시오.”
남궁검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
“다음은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졌다고 생각하시오?”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와 육십년을 함께 동고동락했습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으음.”
남궁용무의 조언에 남궁검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오랫동안 남궁영현과 함께 남궁가를 지켜온 남궁용무였기에, 누구보다 남궁영현을 잘 알고 있었다.
‘이기어검술로도 이기지 못하면 어쩌란 말인가? 진기를 쏟아내어 탈진한 그를 상대로 전 무인이 덤빈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내가 이런 비겁한 생각을 하다니.’
남궁검은 착잡해졌다.
그는 초조한 눈으로 비무를 지켜보았다.
점점 비무가 거칠어지고 있었고, 무인들의 함성은 더 올라갔지만, 남궁검과 남궁용무의 안색은 납덩이처럼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구양천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다.”
“같은 생각이오. 이기어검술을 쓰고도 저렇게 표정이라니.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무위를. 휴우, 괴물이나 다름없군.”
남궁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득 화운룡이 떠올랐다.
오직 무위 하나로 무림을 석권했고, 누구보다 강력한 권위를 움켜쥐었던 화운룡.
지금 구양천은 젊은 시절의 화운룡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앞서는 느낌이었다.
“졌소.”
남궁영현이 되돌아온 검을 거꾸로 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패배를 시인했다.
남궁용무와 남궁검이 느꼈던 부분을 남궁영현은 직접 겪으면서 큰 좌절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의 얼굴은 침통함으로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왜?”
“아니 이기고 있었잖아?”
하지만 다른 무인들은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까지 강력하게 구양천을 몰아붙이던 남궁영현이 갑자기 패배를 시인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은 누가 나서겠소?”
내가 차분하게 말했지만, 남궁검의 귀에는 천신이 말하는 것처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때 남궁영현이 남궁검에게 다가와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오. 아니오. 이건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정말 강합니다. 전성기의 화 맹주보다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직접 상대했던 남궁영현의 조언이었기에 남궁검에게는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이제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렇게 강한 무인이라면 직접 검을 섞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나서겠소.”
“가, 가주. 패배한다면···.”
급히 말리는 남궁용무의 손을 남궁영현이 붙잡고 고개를 흔들자, 남궁용무는 말을 맺지 못했다.
-어차피 누구도 구양천을 이길 수 없소. 가주께서는 지금 한계에 직면해 있소. 어쩌면 구양천과의 비무가 그 한계를 깨는 데 도움을 줄 것이오. 그만큼 구양천의 무위는 압도적이오.
그때 남궁검이 몸을 날려 연무대로 올라서자, 남궁가의 무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손을 들어 화답한 남궁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구양무인. 내가 마지막이오. 한 수 가르침을 받겠소.”
남궁검은 정중하게 포권했다.
나 역시 정중하게 포권했다.
가주인 그를 존중하기 위해 귀혼검에 진기를 불어넣었고, 귀혼검은 청색강기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것이 검강인가?”
무인들은 경악하며 크게 술렁거렸다.
검강보다 윗급인 이기어검술을 본 그들이었지만, 기껏해야 검기를 구사하는 그들에게는 이기어검술보다 화려한 검강이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다.
“으음.”
남궁검은 검강의 색깔과 형태만 보고도 이 싸움이 얼마나 힘들지 감이 왔다.
그는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고, 그의 검도 적색강기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촹촹.
쾅쾅.
강력한 검강이 서로 충돌하자,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강력한 충격파에 무인들은 깜짝 놀랐다.
이미 충격파를 경험했던 그들이었기에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내상을 입은 무인은 없었다.
“저기다.”
무인들은 일제히 공중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상에서 싸우던 둘은 공중으로 떠올랐고, 적색검강과 청색검강이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몇 번의 밀고 당기기가 이어졌고, 남궁검의 안색은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콰콰쾅.
땅이 꺼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고, 남궁검은 하늘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주.”
남궁용무가 그를 받으려고 몸을 날렸다.
하지만 남궁검은 손을 휘저어 남궁용무를 말리고는 힘겹게 바닥에 내려섰다.
“완패로군.”
그때 나는 그의 반대편에 내려섰다.
평온했던 내 표정도 이제는 붉게 상기된 상태였다.
비록 오갑자의 내공을 지닌 나였지만, 이기어검술과 검강을 연속으로 펼치면서 몸에 무리가 갔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걸까?
남궁검의 표정은 구양영현처럼 참혹하진 않았다.
“구양무인도 결국 사람이었구려.”
“당연하지요. 확실히 힘에 부치는군요.”
“졌소.”
남궁검은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구질구질하지 않은 남궁검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럼 이 사람의 뜻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나 또한 무인이오.”
남궁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허어, 안 들어주면 본 남궁가를 박살낼 기세더니 이렇게 변하시는구려.”
남궁검은 천천히 걸어와 내 손을 잡았다.
“남궁가의 일은 이 사람에게 맡겨주시고 돌아가시오. 이 남궁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문제를 해결하겠소.”
“그럼. 남궁가주의 말을 믿고 돌아가겠습니다.”
난 그에게 정중하게 포권하고 돌아섰다.
무인들의 따가운 시선이 내게 몰려왔다.
분노.
당황.
질투.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천천히 남궁세가를 나섰다.
내가 완전히 물러나자, 남궁검은 무인들을 해산했다.
그의 곁에는 남궁용무, 남궁영현, 남궁현이 남았다.
남궁검은 두 원로도 돌려보냈다.
“아들아.”
“예. 아버지.”
남궁검의 장남 남궁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가 성인이 된 이후 남궁검은 한 번도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기에 남궁현은 몹시 긴장했다.
“이제는 씀씀이를 아껴써야겠구나.”
“정말 구양무인의 뜻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생각입니까?”
“그럼?”
남궁검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남궁가를 떠받드는 여러 세가 중에서 문제가 많은 세가를 털어내고 혼내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데려가시지요. 구양무인도 이 정도 성의를 보이면 더는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남궁가라는 이름이 그리 가볍지 않다.”
“아, 아버지.”
“그들과 유착관계를 맺지 않아도 사실 자급자족이 가능해. 우리 남궁가가 보유한 전답과 거기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만 천 가구가 넘는다. 그동안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어. 구양무인과 싸우면서 그걸 깨달았다.”
“그전보다 대우가 줄어들 텐데, 그럼 무인들이 불만을 가질 겁니다.”
“비대해졌으니 줄여야지.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남궁현은 갑자기 달라진 남궁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까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남궁세가의 세를 확장하는데 힘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아버지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습니까?”
남궁현은 모질게 혼날 각오를 하고 질문했다.
하지만 남궁검은 그를 나무라기는커녕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벽이 보인다.”
“벽이 보인다뇨?”
“너는 알 것이다. 내 무공이 어떤 한계에 직면했고, 그걸 넘어서려고 고민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고행했음에도 그걸 깨뜨리지 못했다. 왠지 아느냐?”
“죄송합니다. 알려주십시오.”
“한계···. 나를 막고 서 있는 벽이 얼마나 거대한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야 벽을 넘어서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니냐? 그래서 좌절했었다.”
“그럼 구양무인과의 비무를 통해 그걸 확인했습니까?”
“그래. 이제는 그 벽이 보이는구나. 까마득히 높아. 하지만 그 끝이 보여.”
남궁검의 마음속에서는 희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폐관할 동안 네가 나를 대신하여 남궁가를 지키거라. 두 원로와 의논하여 지역유지와의 밀착관계를 끊어내고 건전한 관계를 정립해. 이제부터 남궁가는 다시 태어난다.”
남궁현은 남궁검의 마음이 왜 돌아섰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지금도 남궁검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궁검의 성격을 보았을 때 결정을 바꾸지는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일단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다른 생각하지 마라. 그때는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예. 아버지.”
남궁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날렸다.
홀로 남은 남궁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할. 좋은 시절 다 지나갔구나.”
그는 점차 작아지는 남궁검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난 언제나 아버지처럼 높은 경지에 올라설까? 정말 벽이란 게 있는 걸까? 그리고 그걸 넘어설 방법을 깨달았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사람이 변할 수 있을까? 모르겠군. 모르겠어.”
남궁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궁검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그의 무위가 아직은 크게 부족했다.
남궁현은 남궁용무와 남궁영현을 찾아가 남궁검의 의지를 전달했다.
동시에 그와 나눴던 대화도 전부 들려주었다.
그러자 두 원로는 이해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주께서 알을 깨고 나오면 남궁가는 천하를 오시할 수 있을 겁니다.”
남궁영현이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구양천에게 패배하는 수치스러운 결과를 맞이했지만, 남궁검이 한계를 돌파할 계기를 마련했기에 남궁영현과 남궁용무는 웃을 수 있었다.
밝은 미래가 보였다.
“소가주.”
“예.”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럼 아버지께서 강해지시고 구양천을 넘어서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
“아마 힘들 겁니다. 가주님의 성정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 소가주께서도 무공수련에 전념하십시오. 세상이 곧 바뀔 겁니다. 남궁가가 이리 무너졌는데 어떤 세가가 버티겠습니까? 그는 화 맹주보다 더 고수입니다.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할 겁니다.”
남궁영현은 남궁현을 다독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