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21화
121화. 악가장의 굴욕.
“소피 좀 보고 오겠소.”
거나하게 취한 모용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길에 쥐도 좀 잡으시오.”
“알고 계셨소?”
“참긴 참았는데, 영 신경 쓰여서.”
“크크. 하긴. 구양무인께서 모를 리가 없지.”
모용수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장원 서쪽의 높은 나무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모용수는 신형을 날리면서 검을 뽑았고, 날카로운 예기가 검 끝에서 흘러나와 쭉 뻗어나갔다.
악소흔의 명령을 받고 장원을 감시하던 악귀명은 기함을 하며 검을 뽑았다.
“으헉.”
장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움직이지 않으며 감시하고 있었기에 설마 발각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악귀명이었다.
“흥.”
모용수는 악귀명이 내지르는 검을 비스듬하게 피했는데, 옷자락이 살짝 베어질 만큼 아슬아슬했다.
동시에 그의 검은 악귀명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커헉.”
잠시 전까지 술에 거나하게 취했었던 모용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과감한 공격이었고, 단 일초 만에 승부가 났다.
모용수는 악귀명의 마혈과 아혈을 제압하여 공중에서 빠르게 경공술을 펼쳐 장원으로 돌아왔다.
그때 멀리 위치해 있던 악귀명의 부하들은 몸을 날려 도주했는데, 모용수는 굳이 그들까지 추적하지 않았다.
대장을 잡았으니 잔챙이들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털썩.
모용수는 악귀명을 마당에 내려놓고는 비로소 소피를 보러 갔다.
“이 자는 악귀명이에요.”
청은 악귀명을 꼼꼼하게 훑어보더니 바로 알아차렸다.
사수현에서 육년을 산 그녀였기에 단번에 그가 악가의 악귀명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럼 악소흔이 나를 감시하라고 이 자를 보낸 건가?”
“그럴 거예요. 다정님한테 악가의 무인들이 크게 무너져서 매우 조심해야 하는데, 이렇게 대놓고 이곳을 감시한다는 건 악소흔의 명령이 없다면 불가능하죠.”
“흐음.”
“제가 조사해볼까요?”
활짝 웃는 청을 보며 악귀명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광필 무리를 상대로 강력한 무위를 자랑했지만, 그녀는 원래 추적, 은폐, 취조에 일가견이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알았어요.”
청은 오른손으로 엎어져있는 악귀명의 허리띠를 잡아들고 장원 뒤편으로 이동했다.
“허어.”
소피를 마치고 온 모용수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내가 하려고 했는데.”
“원래 저쪽 전문이오.”
“뭐하던 분이시오?”
모용수는 눈을 반짝이며 관심을 드러냈다.
“소마각 소속으로 집행인을 지원했었소.”
“어쩐지. 그렇다면 취조는 확실하겠군.”
암흑사련을 대상으로 첩보활동에 주로 나섰던 조직이 참마각, 소마각이었기에 모용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저자가 악소흔의 명령으로 이런 짓을 벌였다면 어찌할 생각이오?”
“사람이 말로 달래도 알아듣지 못하면 몽둥이로 다스려야 하오.”
“호오. 기대하겠소.”
모용수는 싱긋 웃으며 술잔을 들었고, 나 역시 술잔을 들어 부딪친 후에 단숨에 들이켰다.
정말 오랜만에 즐겁고 편안하게 마시는 술자리였다.
얼마 후.
청이 나타났다.
“고생했어.”
“고생은요.”
“왜 왔대?”
“저를 감시하려고요.”
“응?”
“엥?”
나와 모용수는 동시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기 때문이었다.
“악소흔이 직접 악귀명에게 명령했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고요. 다만 악소흔의 모친이 서영이라고 서씨세가 출신입니다. 아마도 내가 서광필을 죽였으니 서영이 앙심을 품었을 테고, 기회를 봐서 저를 제거하려고 감시했겠죠. 뭐.”
나와 모용수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이런 추잡한 일에 끌어들여서.”
“어차피 이곳을 떠날 때 그냥 조용히 나갈 생각은 없었어요. 다정님 아니었더라도 서광필은 제 손으로 요절을 냈을 거예요.”
“그래도 미안해. 이제부터는 내가 나설 테니까, 평이를 살펴줘.”
“네. 낭군님.”
청은 활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내원으로 이동했다.
“악정후가 오면 움직이지요.”
모용수의 제안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상황이 훤히 짐작되었다.
‘청에게 복수하고 싶은데 나와 모용수가 있으면 불가능하니까 감시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녀가 홀로 남으면 악가장의 무인을 보내 납치하거나 죽이려고 그랬겠지. 이것들이 그렇게 두드려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
난 제대로 혼을 내주겠다고 단호하게 마음을 먹었다.
**
산동 악가.
악귀명의 부하들이 돌아오자, 악가는 다시 발칵 뒤집혔다.
특히 악소흔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이런 멍청한 놈. 악귀명 그 자식은 도망쳤어야지. 왜 모용수에게 맞서?”
악소흔은 발을 동동 굴렀다.
“저 맞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엄청나게 빠른 경공술로 갑작스럽게 들이닥쳤기에 그도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악소흔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소식을 들은 무인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원로 악은혁은 그들을 돌려보내고 원로 악무형만 남겼다.
악무형은 그와 동급이었기에 물러가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악소흔은 답답한 표정으로 악은혁에게 질문했는데, 대답은 엉뚱하게 악무형에게서 나왔다.
“차라리 구양천을 찾아가서 사과합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악은혁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악무형은 물러서지 않았다.
“구양천과 그 과부는 밀접한 관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서 계속 머무를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녀를 감시했다는 사실을 지금쯤 취조를 통해 알았을 테고, 그럼 분노한 구양천이 이리로 몰려올 건 자명한 일입니다. 먼저 사과하여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야 합니다.”
“또 굴욕을 당하란 말이오? 그대는 가주께서 구양천에게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원하는 거요?”
“이러다가 그가 먼저 악가로 들이닥치는 날이면 그때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오.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이거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외다.”
“아니 왜 그가 이곳에 와서 난동을 부린다고 생각하오?”
“그와 싸우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소. 그리고 그는 악가가 정파로 거듭나길 요청했고, 그 일환으로 산동의 무가를 불러 모아 잘못을 알리라고 했소. 그런데 이런 짓을 했다면 그가 어찌 나올지는 자명하오. 지금은 먼저 용서를 구하는 게 최선이오. 가주. 어서 결정하셔야 합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악무형은 악은혁과 말싸움을 중단하고 급히 악소흔에게 시선을 돌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악소흔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모친 서영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구양천에게 당한 악감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주. 진정 냉철했던 분이 맞습니까?”
“그만 하시오. 정 그렇다면 당신이 대신 가서 사과를 하든 말든 하시오. 가주의 체통을 생각해야지.”
“가주.”
악무형은 악소흔에게 연신 결단을 촉구했지만, 끝내 그로부터 긍정적인 답을 얻어내진 못했다.
외부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 악정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악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싹 바꿔야 해. 썩은 살은 모조리 도려내야 해.’
악정후는 좀 더 지켜보다가 몸을 날려 그곳을 떠났다.
악정후가 장원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늦은 밤이었지만, 나와 모용수는 잠을 청하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안 주무셨군요.”
“악소흔은 어찌하고 있소?”
내 질문에 악정후는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모용수는 혀를 쯧쯧 찼고, 난 담담한 표정으로 경청할 뿐이었다.
악정후의 말이 끝났고, 방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내일 아침 악귀명을 데리고 악가로 갑시다.”
내가 침묵을 깨트리자, 모용수가 입을 열었다.
“난 이곳에 남겠소. 혹시 모르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그래도 남고 싶다면 남으시오.”
“하여간 구양무인은 이렇게 여자를 모른다니까. 쯧쯧. 알겠소.”
모용수는 툴툴거리고는 내 뜻을 따라 악가로 가겠다고 대답했다.
“제가 악귀명을 만나 추가로 조사를 하겠습니다.”
“그러시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다음날.
청은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를 배웅했고, 나 역시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독하고 무서운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산서성에서 암흑사련의 추적을 따돌리려고 나를 업고 산을 넘었던 그녀였다.
악가장.
쾅.
모용수는 거칠게 문을 부숴버렸다.
악가의 무인들이 몰려나왔고, 곧이어 악소흔도 모습을 드러냈다.
“구양무인.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그러는 자네는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난 똑같이 반박하며 악귀명을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이 자가 내가 있는 장원을 감시하고 있었네. 자네의 명령을 받았다고 실토했어. 이를 어찌 설명할 생각인가?”
“그자는 악가에서 파문당했소. 그러니 더는 악가와는 상관없소.”
“파문?”
모용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때 바닥에 엎드려 있던 악귀명의 표정이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어제도 모진 고문을 버티면서 최대한 진술을 회피했었는데, 그 결과 파문이라니?
악소흔의 냉정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었기에 악귀명의 좌절감은 컸다.
“악소흔 가주가 시켰소! 그리고 기회가 되면 과부를 이리로 끌고 와서 주리를 틀어 서광필의 복수를 한다고 했소! 또 악 가주는 무림맹에···.”
“입 다물라!”
악귀명이 배신감에 치를 떨며 낱낱이 진실을 밝히자, 안색이 홱 바뀐 악은혁이 분노하며 장풍을 날렸다.
펑.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모용수가 그 앞을 막아선 것이다.
“계속하라.”
“악 가주는 무림맹에 신고하여 구양무인을 암흑사련의 주구로 몬다는 계획을 세웠소. 모용무인과 함께 있으니 분명 통할 것이라 하였소.”
충성한 대가로 파문을 당한 악귀명은 눈이 뒤집혀 알고 있는 사실을 모조리 토설했다.
그로 인해 악가장의 분위기는 싸늘해졌고, 악소흔은 표정은 핼쑥해졌다.
만약 이 사실이 무림맹에 알려지고, 악귀명이 증인으로 나선다면?
“구, 구양무인. 악귀명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자요. 미, 믿지 마시오. 난 한 번도 감시하란 지시를 내린 적이 없는데 제 놈이 공을 세우겠다고 나선 것이오. 천성이 쓰레기 같은 놈이오.”
“이런 죽일 놈의 새끼 같으니라고.”
참다못한 모용수가 앞으로 나섰다.
“악귀명은 네놈에게 충성하겠다고 모진 고문에도 입을 꾹 다물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불었다. 그러면서도 네놈을 걱정했는데 뭐 파문? 거짓말쟁이? 에라이 빌어먹을 놈아! 이 후레자식아!”
“모용무인 참으시오.”
난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모용수를 달랬다.
“악소흔. 네놈을 무림맹으로 끌고 가겠다. 순순히 따르라.”
“그럴 순 없소.”
악은혁을 비롯한 무리가 급히 내 앞을 막아섰다.
후우우우웅.
콰콰콰쾅.
진기의 회오리가 일었고 그들은 종이장처럼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지금 살심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걸 모르는가? 한 번 더 내 앞을 막아선다면 그때는 모조리 목을 벨 것이다.”
악소흔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작심하고 무공을 펼치면 악가장이 초토화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악귀명.”
“예.”
“악소흔과 함께 공모한 무리가 누군가?”
“원로 악은혁···.”
악귀명은 차분하게 지명하기 시작했다.
만약 파문당하지 않았다면 악귀명이 이렇게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모용무인. 추포하시오.”
“흐흐흐. 오늘은 멋지시오.”
퍽. 퍽. 퍽.
모용수는 일부러 두드려 패며 그들을 제압하고는 마혈과 아혈을 찍었다.
“악정후.”
“예.”
“그대가 이곳의 상황을 정리하시오. 한때 악소흔과 가주경쟁을 펼쳤었고, 그의 사형이었으니 자격은 차고도 넘치오. 그리고 원로 악무형.”
“예? 예.”
악무형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제정신을 갖고 있는 무인이 그대뿐인 것 같소. 악정후를 도와 산동 악가는 다시 태어나야 하오.”
실로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악무형은 감히 반발하지 못했다.
“갑시다. 무한현으로.”
“그러지요. 흐흐흐.”
모용수는 수레를 가져와 악소흔 무리들을 짐짝처럼 싣고는 악가장을 나섰다.
“자, 잠시만.”
악무형이 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이시오?”
“그들이 죄를 지었지만, 그래도 악가의 가주이고 원로, 장로이니 최소한의 대우를 부탁합니다.”
난 가만히 악무형을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악무형은 급히 무인을 선발했고, 비용으로 쓰라며 금을 건넸다.
모용수는 재빨리 금을 받아 챙기고는 악가 무인들을 부하처럼 부리며 악소흔 무리들의 마혈과 아혈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내공을 금제했다.
“가자.”
모용수는 악가 무인들을 부려 악소흔 무리를 이끌고 무한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