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14화
114화. 다시 이어지는 인연(因緣).
“어서 오십시오.”
예상치 못한 제갈문현의 등장이었지만, 난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인사했다.
확실히 무림맹에 대한 기대치가 낮아졌기는 했지만, 그래도 전생에서 가장 믿고 의지했었던 제갈문현이었기에 어느 정도 격동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이러다 내가 돌부처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냉정해진 건지 무심해진 건지 모르겠어.’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서는 제갈문현에 대한 반가움이 솟구쳤다.
“건강하시군요.”
제갈문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인사했지만, 속으로 크게 놀라고 있었다.
‘확실히 변했다. 무공이 어떤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지만, 마음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한 건 확실하다. 이게 무림맹에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실로 궁금하구나.’
“어쩐 일로 예까지 오셨습니까?”
“계속 구양세가에 머물러 계시니 궁금해서요.”
“연락은 받으셨을 텐데요.”
내가 여중명과 삭천혁을 돌려서 언급하자, 제갈문현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큰 실수를 했군요. 그들을 보내지 말고 내가 직접 왔어야 했는데.”
“그러셨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그래도 손님이 왔는데 이렇게 마당에 세워둘 생각입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난 제갈문현을 내 방으로 안내했다.
제갈문현은 소박한 내 방을 둘러보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구양무인.”
“말씀하십시오.”
“이곳의 삶은 어떻습니까?”
“좋군요. 이제까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이기적으로 내 삶을 살아보고자 합니다. 이해가 안 되시죠?”
“네. 솔직히.”
제갈문현은 당혹스러웠다.
그가 기억하는 구양천의 삶은 지극히 자의에 의한 삶이었다.
척사검대를 창설하고 운용하는 측면에서도 구양천의 의지가 많이 작용했고, 이후 천산으로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림맹의 위한 삶을 살았다면 척사검대를 내버려두고 천산으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가 없어 곤혹스러웠다.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제갈문현에게는 전생을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삼켜버렸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미친놈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무림맹의 행동이 서운했다면 사과드리지요.”
“사과는 고맙게 받겠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사실겁니까?”
“예. 보다시피 이 삶이 굉장히 여유롭고 편하니까요. 제가 없더라도 무림맹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굳이 제가 무림맹에 돌아갈 이유는 없습니다.”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던 제갈문현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만약 무림맹이 타 세력과 격돌하게 된다면 중립을 부탁합니다.”
난 처음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담담하게 표정을 바꾸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을 도와달라고 하면 반발할 가능성이 크니 전략을 중립으로 바꾼 것이다.
역시 제갈문현이 현명했다.
정확하게 내 마음을 읽고 있었다.
“왜 도와달라는 말씀을 안 하십니까?”
“나중에 지켜보시다가 마음이 그리 정해지시면 도와주세요.”
괜히 말 한마디 건넸다가 제갈문현에게 말려들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게 내가 아는 제갈문현의 본 모습이니까.
조금 경계하던 내 마음이 봄바람에 눈 녹듯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지요.”
“구양무인.”
“말씀하세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까?”
“그림이라···. 이제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라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이제까지와의 삶과는 다른 삶이란 건 확실합니다.”
“혹 풍검을 아십니까?”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훅 들어온 질문에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깨끗하게 당했다.
아마도 이 질문을 하려고 이리 저리 빙빙 돌렸을 것이다.
그라면 지금의 내 표정만 보고 상황을 짐작했으리라 생각했다.
“역시 관계가 있으시군요.”
그는 내 표정을 보고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한듯했다.
“풍검의 무학은 중원의 무학과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고 들었는데 구양무인의 모습을 보니 그게 참이라 생각합니다. 천산으로 떠났던 것이 결국은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그 목적은 아니었지만, 어찌하다보니 그리 되었군요.”
결국 일부 사실을 인정했다.
제갈문현은 풍검과 연관되어있다는 부분을 파악하고는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대화방향을 바꾸는 현명함을 보여주었다.
“감숙성, 청해성을 중심으로 세력이 확장된 천마교를 어찌 보십니까?”
“글쎄요. 제갈 군사께서 아시다시피 천마교는 암흑사련과 극악의 관계일 뿐, 무림맹과 원한을 맺진 않았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무림맹과 천마교는 항시 부딪쳤지요. 그들의 힘이 강해지면 다시 무림에 피바람이 불겁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그걸 빌미로 싹을 짓밟지 마세요. 그게 더 큰 비극을 잉태하는 법입니다.”
“결국 무림에 부는 피바람을 피할 순 없다? 이 말입니까?”
“그게 우리가 죽은 후일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지 마세요.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말 제가 알고 있는 구양무인이 맞나 싶군요.”
제갈문현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군요. 오늘은 유익한 만남이었습니다. 다음을 기약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제갈군사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구양세가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제갈문현을 돌려보내자, 부친이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느냐?”
“큰 문제없을 겁니다. 제갈군사께서 우리 구양세가를 더 압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다행이고. 무공을 숨겼느냐?”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다녀간 무인들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래. 믿는다.”
구양현은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이쯤에서 끊고 내 어깨를 토닥인 후에 물러났다.
**
제갈문현이 물러간 후, 무림맹에서 더는 나를 귀찮게 굴지 않았다.
또 암흑사련도 어떤 이유에선지 더는 절정고수를 파견하지 않았다.
덕분에 정주현은 평화로워졌고, 난 여유로운 삶을 즐기며 무공수련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만월루에서 무인을 보냈다.
“만월루에서 오셨다고?”
“예. 금노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혹 시간이 되십니까?”
“가봐야지. 금노께서 부르신다면 가봐야지.”
운기조식을 그만둔 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그를 따라 세가를 나섰다.
만월루.
“어서 오게.”
“반갑습니다.”
“그리로 앉게. 이거 얼굴보기도 힘들어졌군.”
금노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내게 자리를 권했다.
난 그가 왜 불렀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 앉아 그가 말해주길 기다렸다.
“인내심이 늘었군.”
“적어도 금노와 대화할 때는 조급해선 안 되니까요.”
“역시.”
금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이를 한 장 건넸다.
“이걸 알려줄까 말까 많은 시간을 고민했네.”
“바쁘신 금노께서 무엇을 고민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정말 궁금했지만, 일부러 종이를 펼치지 않고 물었다.
예전이었다면 중원무림의 변동에 관련된 사안이었겠지만, 지금은 내가 거기에 관심이 없으니 아닐 것이다.
“청.”
“청이라고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이 커졌다.
“역시. 관심을 기울일 줄 알았어.”
“오랫동안 함께 한 동료였으니까요.”
“한번 만나고 싶지 않은가?”
“벌써 육년 전에 미련 없이 제 곁을 떠난 자입니다. 또 인연이 된다면 모를까? 굳이 시간을 내서 만나고 싶진 않군요.”
“한번 만나보게. 그 종이엔 청의 주소가 적혀있다네.”
“왜 이런 호의를 베푸십니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금노 입장에서는 내가 황보연과의 관계를 끊은 셈이었으니, 악감정을 가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청은 동료이기 전에 여자였다.
특히나 젊고 아리따운.
그렇기에 왜 금노가 그녀의 주소를 내게 알려주는지 몹시 궁금했다.
“글쎄. 나도 사람인지라 처음에는 자네가 미웠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자네와 연이는 인연이 아니란 걸 느꼈어. 자네와 연이는 군계일학이었지. 그래서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고. 하지만 그 뿐이었어. 물론 둘이 인연이 이어져 혼인을 했어도 괜찮았을 거야. 하지만 이대로도 나쁘진 않지.”
“연매는 행복합니까?”
“내가 볼 땐 행복하게 살고 있네. 어쩌면 여자는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남자를 만났을 때 행복하니까. 물론 이는 내 생각이야.”
금노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여전힌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내게 청의 주소를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또 그녀의 주소를 알고 있다는 건 꽤 오랫동안 추적하고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그랬다면 분풀이라도 했을 수도 있을 텐데.
“금노의 속내를 모르겠군요.”
“검제를 향한 내 존경심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니까.”
이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내가 예뻐서가 아니라 검제 구양의의 손자이기에 금노는 내게 잘 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제야 나는 종이를 펼쳤다.
주소 말고는 다른 특이사항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난 금노의 표정에서 말하지 않은 뭔가 중요한 사안이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
청은 무림을 떠나겠다고 공언한 후에 내 곁을 떠났었다.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는 그녀를 찾아냈다는 건 금노의 집요한 노력 덕분이었다.
“더 말씀해주실 것은 없습니까?”
“없네. 자네가 직접 그녀를 만나봤으면 좋겠군. 이건 호의일세.”
“감사합니다.”
난 정중하게 포권했다.
“혹시 그녀가 위험에 처했습니까?”
“절정무인이라면 모를까? 웬만한 무인은 그녀를 어쩌지 못해. 원래 강했던 그녀를 자네가 더욱 강하게 키웠지 않은가?”
“그렇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동료였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납치되거나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면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잘됐군요.”
“한번 찾아가보게.”
“꼭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가보면 알 거야.”
금노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겨주는 웃음이었다.
“절 놀리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자네는 내 말을 들은 걸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걸세. 아니 후회할지도 모르겠군. 그렇더라도 그곳을 찾아간 건 훌륭한 선택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금노를 뒤로 하고 만월루를 나온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이렇게 나오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꿈인 듯한 그녀와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니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 방식대로 산다. 내가 그녀를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지.”
고민하던 나는 그녀를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부친을 찾았다.
“산동성에 다녀오겠다고?”
“예. 지인을 만나보려고요.”
“그래. 계속 집에만 머무르고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느냐?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거라.”
“예. 아버지.”
“녀석. 걱정하지 말고.”
부친은 자세한 이유를 묻지 않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가볍게 행장을 꾸린 나는 성휘에게 구양세가를 부탁한 후, 세가를 나섰다.
그대로 산동성으로 가려다가 걸리는 게 있어서 모용수가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간판도 없는 평범한 장원이었는데, 벌써 열 명의 무인이 드나들고 있었다.
“허어, 내가 원했던 방향이 아닌데.”
난 고개를 흔들었지만, 굳이 모용수를 말릴 생각은 없었다.
“어서 오시오.”
연락은 받은 모용수와 섭유청이 달려 나와 허리를 숙였다.
나에 대한 존경심이라기보다는 금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잠시 산동성에 다녀올 생각이오.”
“산동성에요? 목적을 물어봐도 되겠소이까?”
모용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왜 그런지는 짐작이 되었다.
만약 시간에 맞춰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그들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으니까.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 자를 만나려고 하오.”
“그럼 우리도 함께 따라가겠소.”
“굳이···.”
거부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한빙마검만 따라오시오.”
“알겠소.”
모용수는 환한 표정으로 포권하고는 섭유청에게 전음을 날렸다.
-만약 그곳에서 시간이 지연되면 곧바로 사람을 보내서 알리겠네. 자네 해혈할 시기를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말게.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알려주십시오.
모용수와 섭유청의 모습을 보며 괜히 금제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장원을 부탁하오.”
“다녀오십시오.”
나와 모용수가 몸을 날리자, 섭유청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동쪽 하늘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