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11화
111화. 은밀히 세를 키우다.
“당분간 저를 도와줄 손님입니다.”
“수용입니다.”
내가 모용수를 수용으로 세가사람들에게 소개하자, 그는 당당하게 포권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세가사람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용수에게서 풍겨지는 기운이 실로 범상치 않았고, 한눈에 봐도 역용을 한 게 티 났기 때문이었다.
“잘 오셨소. 내가 천이 애비 되는 사람이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오. 험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모용수는 다시 한 번 포권했을 뿐 입을 꾹 다물었다.
“천아, 나 좀 보자.”
“예.”
난 모용수에게 내 방으로 가서 기다리라고 한 후, 구양천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누구냐? 절정고수로 보이던데.”
“사연이 있어 이름을 바꾸고 제 그늘로 들어왔습니다.”
“마인이냐?”
“그쪽에 있었습니다.”
구양현은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지독히 많아보였지만, 그는 더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보다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 말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이 아비는 너를 믿는다.”
“고맙습니다”
“녀석. 네 덕분에 우리가문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밝히길 꺼려하는데 굳이 캐묻고 싶지 않구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단속할 테니, 네 마음대로 살아보거라.”
구양현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내원으로 향했다.
모용수를 데려왔으니 혹시라도 무림맹과 부딪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양현은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난 실눈을 뜨고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구양천으로 다시 태어난 이후, 가장 놀라운 인물이 구양현이었다.
평범한 무인인 구양현은 다소 유약해 보였지만, 전형적인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유형이었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말만 앞서는 인간을 싫어했던 나로서는 구양현이 정말 마음에 들었고, 요즘에는 정말 아버지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난 천천히 걸어 방으로 향했다.
“어떻소?”
“어색하오.”
모용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구양무인께서는 그리 강한데 왜 무공을 숨기고 사시오?”
“귀찮아서.”
“뭐가 귀찮소?”
“대의명분에 얽매여 사는 게 이젠 싫소. 이제는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소.”
“그럼 세상을 속이고 사는 게 재밌소?”
“재미는 없소. 그냥 지쳤다고나 할까? 세상에 염증이 일었다고나 할까? 쉬고 싶은데 자꾸 여기저기서 손을 뻗어 나를 데려가려고 하니 답답하구려.”
모용수는 내 말을 들으며 머릿속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건 살만큼 산 노인네들이 하는 말인데. 내 나이도 팔십을 넘었지만, 아직도 세상에 미련이 많거늘. 이 어린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이 집에 머무르면서 답답하면 밖을 돌아다녀도 좋소. 편하게 사시오.”
“내가 암흑사련과 연락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겨우 삼 개월만 살고 싶으시오?”
모용수는 흠칫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비참한 자신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가 해야 할 일이 뭔지를 정확히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으면 온힘을 다해 구양천을 보호해야 한다는 걸.
“빌어먹을. 팔십이 넘은 나이에 호위무사를 하게 생겼군.”
모용수는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생의 미련을 내려놓는다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나보고 죽으란 말이오?”
“금제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요. 하나는 삼 개월마다 해혈받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다 포기하는 것. 그럼 해결책이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르오.”
“무슨 무당 말코도사도 아니고. 모두 잃느니 차라리 죽겠소.”
모용수는 내 말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완전히 물러나자, 성휘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공자님.”
“왜?”
“저 수용이란 자는 굉장히 유명한 무인이죠?”
“삭천혁보다 위라고 보면 된다.”
“후아, 정말이지.”
“그만. 더 묻지 마.”
“예. 가주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거든요.”
“왜 왔어?”
“저는 공자님 편입니다. 공자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믿고 따를 생각입니다.”
“그게 다야?”
“네!”
“싱겁기는.”
난 성휘가 마음에 들어 활짝 웃었다.
며칠 후.
섭유청은 초라한 모습으로 정주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구양세가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을 때, 모용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너, 이 자식.”
“서, 설마. 한빙마검?”
섭유청은 기겁하여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따라와.”
“나, 날 죽일 생각이오?”
“이 멍청한 놈이 뭐라는 거야? 네놈도 금제 당했지? 그래서 본련에서 도망쳐서 여기에 온 거잖아.”
섭유청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바뀌었다.
“설마 모용선배도···. 금제 당했소?”
“빌어먹을. 네놈 잡으러 왔다가 완전히 망했다.”
모용수가 자리에 털썩 앉자, 섭유청도 따라 앉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아련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제 어떡할 생각이오?”
“뭘 어떻게? 죽을 생각이 아니면 구양천의 호위무사로 살아야지. 그가 잘못되면 내 목숨도 날아가니까.”
“선배마저 당하다니···. 믿어지지 않소.”
“이기어검술을 쓰는데 나라고 별 수 있냐?”
“그 정도요?”
“네놈에게는 모든 걸 드러내지 않았겠지. 하지만 정말 무시무시했다. 지금 실력만으로 본다면 련주님도 그의 상대가 아니야. 그런데 왜 저러고 살까?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데.”
“희한한 놈이오. 젊은데 완전히 늙은이처럼 행동한다니까요.”
“나도 느꼈어.”
“그건 그렇고 나 해혈받아야 하오. 시간이 거의 다됐소.”
“느낌은?”
“서서히 혈맥이 굳어지는 느낌이오. 운기조식을 해도 개운하지 않고, 진기순환이 원활하지도 않고.”
“젠장할. 혈옥칠절금이라고 해서 반신반의했었는데. 사실이었군.”
모용수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섭유청의 표정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금제가 어마 무시할 것으로 짐작했었지만, 설마 해결책이 없다는 그 악랄한 혈옥칠절금일지는 몰랐다.
“나도 구양세가에서 살고 싶소. 이제 도망칠 곳도 없고.”
“너도 호위무사가 되려고?”
“별 수 있소? 암흑사련에서 쫓고 있는데, 살 방법은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는 수밖에. 내가 볼 때, 암흑사련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모든 걸 포기하면 금제를 벗어날 수 있다던데.”
모용수는 무심한 표정으로 해결책을 툭 던졌다.
섭유청은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머리를 데구르르 굴렸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말코도사할 것도 아니고 그냥 해혈받으면서 살겠소.”
“그럴 줄 알았다. 네놈이나 나나 어쩔 수 없는 사파인이다.”
모용수는 활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객잔이라도 들어가서 씻고 밥이라도 먹어라. 기다리면 내가 구양무인을 모시고 갈 테니까.”
“전 구양세가로 가면 안 됩니까?”
“나도 거기서 눈치 보이는데 너까지 끼어들려고? 아서라. 괜히 그 어린놈이 화를 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웬만하면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이거 느낌인데, 그가 독하게 마음먹으면 련주님보다 더 무서울 거 같다.”
“같은 생각이오. 알겠소. 그럼 청월루에 머무르고 있겠소.”
모용수는 섭유청에게 손을 흔들고는 사라졌다.
이틀 후.
난 모용수와 함께 청월루로 향했다.
“잘하셨소.”
“이건 순전히 내 느낌인데···.”
“말하시오.”
“계속 식구가 늘어날 거 같소.”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데.”
내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서자, 모용수도 멈춰 섰다.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시오. 낭중지추란 말도 못 들어 보셨소? 구양무인께서 어떤 연유로 자꾸 무림과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림은 구양무인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오. 원래 절대고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무림과 연을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소.”
“휴우, 지긋지긋하군.”
“정파, 사파 모두 싫소?”
내가 대답하지 않자, 모용수가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럼 독자세력을 만들어 무림을 일통하는 건 어떻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젠 그 세력다툼이 진절머리가 나오.”
모용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말은 겨우 삼십대 초반인 구양천이 할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발언을 쏟아내려면 천하를 일통한 적이 있는 자라야 가능했다.
‘한때 무림의 절대자라 불렸던 화운룡 정도가 되어야 간신히 할 수 있는 말을···. 허참. 이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모르겠군. 뭐, 실력은 최정상급이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있지만. 휴우, 어떻게 인생을 살면 저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아무튼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시오.”
“귀담아 듣고 있소. 갑시다.”
우리가 경공술을 펼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청월루.
섭유청은 나를 보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존경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아마도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난 곧바로 해혈을 시작했다.
“이게 끝입니까?”
너무 간단히 끝났기에 섭유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오.”
난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하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섭유청은 이리 저리 몸을 움직이고 진기를 순환시켜 확인하고 있을 때, 모용수도 내 곁에 앉았다.
섭유청은 완전히 해혈되었음을 깨닫고 환한 표정으로 앞에 앉았다.
“섭 무인.”
“예.”
“삼 개월이오. 시간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마시오. 늦으면 나도 방법이 없소.”
“어찌 그걸 잊을 수 있겠습니까?”
섭유청은 감사를 표하다 묘한 기류를 느꼈다.
그 전에는 대놓고 반말을 하며 무시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자신을 존중해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섭유청도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어서 그렇지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을 경력을 가진 전대거마였다.
“구양무인.”
“말씀하시오.”
“내가 섭유청을 데리고 정주현 인근에 머무르겠소. 구양세가에 며칠 머물러봤는데 더는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소. 나와 잘 맞지도 않고.”
“그럴 것이오. 정파와 사파의 간격은 매우 크니까. 무공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차이도 크고. 이해하오.”
“그리고 내 방식대로 세력을 키우겠소.”
모용수는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삼 개월마다 해혈받는 입장이다 보니 큰 소리 칠 입장이 아니었고, 나와 대화를 많이 나누면서 성향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시오.”
“정말이오? 그래도 괜찮겠소?”
모용수는 깜짝 놀라 급히 되물었다.
“생각해보니 모용무인의 말대로 무림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소. 물론 아직도 무림에 관여하고 싶지는 않소. 하지만 모용무인이 세력을 만들어놓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 적어도 내가 숨겨진 패를 하나 가지고 있는 셈이니까.”
섭유청은 입을 꾹 다물고 나와 모용수의 대화를 경청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기에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나와 모용수를 번갈아보며 바라보았다.
난 모용수를 바라보며 한 가지는 확실히 했다.
“조심하시오. 만약 당해내지 못할 상황이 닥치면 내게 연락하시오. 내가 구해드릴 테니까.”
“알겠소. 우리 사파인들은 목숨을 중시하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목숨을 귀히 여기는 건 사파나 정파나 모두 똑같소. 일부 고집이 세고 명분을 중시 여기는 자들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지만, 그런 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소?”
난 싱긋 웃고는 술을 주문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술을 마시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날 저녁.
난 홀로 구양세가로 돌아왔고, 모용수는 섭유청을 데리고 청월루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