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09화
109화. 필사의 탈출.
“지금 뭐라고 하셨소?”
섭유청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통지를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오. 련주님께서는 두 분이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소. 하지만 이번 일의 실패로 본련의 위상이 추락했으니 이에 대한 처벌이 꼭 필요하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인들이 반발할 테니까.”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직위를 강등시키면 되지 굳이 뇌옥에 6개월이나 갇혀야 되냐 이 말이외다.”
“조용해질 때까지 잠시만 쉬었다가 나오면 되오. 그래야 그들의 불만이 좀 사그라지지 않겠소?”
만통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섭유청을 설득했다.
하지만 섭유청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다시 말씀드려보시오. 뇌옥에서 6개월이라니. 말도 안 되오. 휴우.”
“이미 결정된 사안이외다. 오늘은 섭 무인답지 않소이다.”
“번복될 수 없소?”
“이제까지 련주님께서 한 번 결정한 내용을 번복한 적이 있소이까? 그리고 이는 그대들을 위한 조치요. 최대한 예우를 갖춰 대하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옛 직위로 복권시켜주겠다고 약속하셨소. 어떻소? 이렇게 배려해주셨으니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게 도리 아니겠소? 좀 힘들겠지만, 눈 딱 감고 6개월만 다녀오시오.”
섭유청은 청파검과 눈을 마주치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하루만 시간을 주시오. 내일 아침에 뇌옥으로 직접 가겠소.”
“그러시오.”
만통지는 선선히 대답했다.
“고맙소.”
섭유청이 감사를 표하고 청파검과 함께 물러나자,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만통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것 봐라?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만통지는 섭유청이 중대한 무언가를 보고하지 않고 숨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뇌옥처분이 가혹하긴 했지만, 섭유청이 사고 쳐서 암흑사련의 위상을 실추시킨 걸 생각하면 결코 무겁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척휘명은 시간이 지나면 섭유청과 청파검의 직위를 복권시켜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섭유청이 이렇게 불손한 태도로 나온다는 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암흑일혈을 불러라.”
만통지의 명령에 시중을 들던 노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후.
암흑일혈은 노인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시오?”
만통지는 대답하지 않고 암흑일혈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뭔가를 설명했고, 암흑일혈의 표정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소?”
“모든 건 내가 책임지겠소. 그들이 아무 일 없이 내일 아침에 뇌옥에 들어간다면 괜찮겠지만, 만약 저들이 련주님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도주하기라도 한다면 본련이 크게 흔들릴 수 있소.”
“으음.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지요. 련주님 얼굴에 먹칠하는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소.”
암흑일혈은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척휘명의 명령이 내려왔는데, 그걸 거부하고 암흑사련을 탈출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척휘명의 권력누수로 비춰질 수 있었다.
특히 섭유청과 청파검은 암흑사련에서 비중이 절대 작지 않았으니, 만에 하나 그들이 그런 일을 저지른다면 암흑사련은 밑바닥부터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만통지는 곧장 암흑일혈을 부른 것이다.
“만약 그들이 멈추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도주하면 어떡하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제압해야 하오. 감히 련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본련을 탈출하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그런데 련주님의 명령을 받지 않고 이리 해도 괜찮겠소?”
“선조치후보고할 생각이외다. 만약 아무 일도 없었다면 괜히 련주님의 심기만 상하게 만드는 꼴이니까.”
만통지의 냉혹한 대답에 암흑일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가 암흑십혈을 이끌고 주요 통로를 감시하겠소. 만약 일이 발생하면 호각을 길게 불 테니, 그때부터는 만 군사께서 지휘하시오.”
“알겠소. 부탁하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암흑일혈은 만통지에게 포권하고는 물러났다.
섭유청 처소.
청파검은 불안한 표정으로 방안을 서성거리다가 섭유청 앞에 털썩 앉아 입을 열었다.
“이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섭유청이 대답하지 않자, 청파검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뇌옥 안에 갇혀 혈맥이 터져 죽고 싶습니까?”
“휴우, 정말이지 진퇴양난이로군.”
“빨리 말하십시오. 안 그러면 나 혼자라도.”
“무슨 말인가?”
섭유청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청파검을 바라보았다.
“뭐긴 뭐요. 살아야지.”
“설마 본련을 탈출하려고? 그래서 어디로?”
“구양천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죠.”
“그런다고 그가 살려줄까?”
“여기서 맥없이 죽는 것보다야 뭐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본련은 도주자를 용서하지 않아. 더군다나 우린 본련에 위상을 실추시켰으니 땅 끝까지라도 쫓아올 거야.”
“그럼 혼자 죽으십시오. 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곳을 나가겠습니다.”
청파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림맹에서 암흑사련의 첩자질을 한 것도 살아남기 위해서였지 암흑사련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청파검은 살기 위해 암흑사련을 버릴 결정을 너무 쉽게 내릴 수 있었다.
“정말···나갈 생각인가?”
섭유청이 청파검을 손을 잡으며 묻자, 청파검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억울해서라도 살아야겠습니다. 밑바닥에서 태어나 평생 첩자질하는 거지같은 인생을 살았는데, 마지막에 부귀영화는 누리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죽을 순 없지요.”
섭유청은 청파검을 만류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혈맥이 터져 죽느니 살려고 발버둥이라도 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혼란스럽던 섭유청의 마음은 탈출로 굳혀졌다.
“같이 가세.”
“잘 생각하셨습니다. 둘이 탈출하면 한 명은 살아남겠죠.”
“둘 다 살아야지.”
“그러면 좋죠.”
섭유청과 청파검은 혁낭 안에 필요한 물품을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마음 단단히 먹어. 처음에는 별일 없을 테지만, 곧 추적이 시작될 테니까. 그때부터는 악몽의 연속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섭유청은 청파검과 함께 방을 나섰다.
밖은 보름달이 떠서 사물을 구별할 수 있었다.
둘은 천천히 걸어서 중문을 통과한 후, 서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누구십니까?”
“혈마도일세.”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서문을 지키던 수문장은 난데없는 혈마도 섭유청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잠시 밖을 나갔다 와야겠네.”
“안됩니다. 규정을 잘 아시지 않습···. 커헉.”
수문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을 바라보며 뒤로 쓰러졌다.
그걸 신호로 청파검이 몸을 날려 부하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본색을 드러내셨군.”
스스스슥.
암흑일혈이 모습을 드러내자, 섭유청과 청파검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그제야 섭유청은 모든 일이 틀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강호경험이 풍부한 늙은 생강인 섭유청은 암흑일혈이 끝이 아니란 생각이 들자, 결단을 내렸다.
“죽여!”
섭유청이 명령을 내리고는 암흑일혈에게 달려들자, 청파검도 달려들어 협공에 나섰다.
암흑일혈과 섭유청의 실력은 비슷했는데, 청파검까지 협공하자 암흑일혈은 힘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어디로 도주할지 몰라 암흑십혈로 골고루 분산시켜 놓았는데, 그 틈을 섭유청이 파고든 것이었다.
도주하거나 항복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예상밖으로 공격해오자 암흑일혈은 심히 당황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호각을 꺼내 도움을 요청했다.
“삐이이이익.”
호각소리를 들은 섭유청의 공격은 더욱 집요해졌다.
결국 암흑일혈은 둘의 집요한 공격 앞에 쓰러졌다.
푹. 푹.
“커헉.”
암흑일혈이 쓰러지자, 섭유청과 청파검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고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쫓아라!”
암흑십혈 중 아홉이 추적에 나섰고, 다른 무인들도 합세했다.
그 시각.
련주실에는 만통지가 척휘명 앞에 부복하고 있었다.
“그걸 왜 미리 말하지 않으셨소?”
“제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이 도주할 확률이 낮았고, 만일에 대비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휴우.”
척휘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는 만통지를 질책하지 않았다.
아니 칭찬하는 게 옳았다.
낌새가 이상하면 조치를 취하는 게 옳았다.
그 때마다 계속 보고한다면 척휘명은 매우 피곤할 것이다.
“현상황은?”
“동쪽으로 도주 중입니다.”
“으음. 우리 피해는?”
“암흑일혈이 중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잡을 수 있겠소?”
“독안에 든 쥐입니다.”
“가능하면 생포하시오. 왜 저런 행동을 했는지 알아야겠소.”
“예. 련주님.”
척휘명은 손짓으로 물러나라고 명했고, 만통지는 포권하고는 련주실을 물러나왔다.
홀로 남은 척휘명은 창문을 열고 동쪽을 바라보았다.
‘섭유청. 청파검. 네놈들이 무덤을 파는구나.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순종적이던 놈들이 내가 련주가 되니까 이런 짓을 벌여?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척휘명은 주먹을 으스러지게 꽉 말아 쥐었다.
장안현 서쪽.
“헉헉. 빌어먹을.”
섭유청은 연신 욕설을 쏟아내며 달렸다.
그 뒤를 청파검이 따라 달리고 있었는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철푸덕.
청파검이 엎어지는 소리에 섭유청은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이럴 시간 없다니···.”
섭유청은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은가?”
“이 빌어먹을 인생. 이제 좀 피나 했더니.”
청파검의 옆구리에선 피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에게 당한 거야?”
“모르겠습니다. 정신없이 막아서는 놈들을 뿌리쳤는데···.”
섭유청은 고민하는 눈을 본 청파검이 입술을 비틀었다.
“뭘 고민하십니까? 나를 버리고 가십시오. 혼자라도 사십시오.”
“미안하네.”
“날 죽여주십시오. 생포되면 모진 고문을 당할 겁니다.”
“할 말 있는가?”
“엿 같은 인생!”
청파검이 욕설을 내뱉었다.
섭유청의 눈빛이 매워짐과 동시에 그의 손에서 적색강기가 발출되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섭유청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이런 지독한 놈.”
암흑이혈은 청파검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치를 떨었다.
“추적해!”
암흑이혈의 명령에 암흑삼혈이 나머지 칠혈을 이끌고 섭유청 추적에 나섰다.
암흑이혈은 청파검의 시체를 암흑사련으로 옮기라고 명한 후에 그 역시 추적에 나섰다.
오일 후.
암흑사련.
“죄송합니다. 저를 처벌해주십시오.”
만통지는 척휘명 앞에 엎드려 치죄를 청했다.
“일어서시오.”
척휘명은 답답했지만, 만통지를 질책하지 않았다.
만통지는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앉았다.
“청파검은 섭유청이 죽였소?”
“예. 그의 독문무공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이오?”
“지금 찾고 있는데 행방이 묘연합니다.”
“혹 낙양 쪽으로 간 건 아니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그쪽으로 무인을 집중배치했는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는 산서성으로 도주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늙은 너구리 같으니라고.”
척휘명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무림에서 구를 대로 구른 섭유청은 암흑사련의 포위망을 예상하고는 허를 찔러 도망간 것이다.
“정주현에 무인을 보내시오.”
“정주현은 무림맹 영역이니 자칫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은밀하게 움직이면 괜찮을 것이오. 숨어서 지켜보다가 그가 나타나면 제압해서 데려오고, 그게 어려우면 죽이시오. 세 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으면 복귀하라고 하고.”
“그럼 알맞은 무인을 선발하여 보고 후 출발시키겠습니다.”
척휘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련주실을 나온 만통지는 몇 걸음 걷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훌륭하게 성장하셨구나. 실로 현명한 판단이다. 섭유청이 갈 곳은 결국 구양세가 뿐이다. 구양천을 만나고 와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구양천이 섭유청과 청파검에게 뭔 짓을 저질렀다는 게 분명해. 그리고 6개월의 뇌옥생활을 못하겠다고 도주했으니까···련주님의 의견대로 적어도 3달 이내에는 나타날 것이다. 도대체 뭘까? 구양천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만통지는 생각을 거듭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구양천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고는 정주현으로 보낼 무인을 생각했다.
다음날.
부련주 한빙마검 모용수가 정주현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