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103화
103화. 천산을 내려오다.
끝내 목영청은 나타나지 않았다.
실로 당혹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난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곳에서 하루를 꼬박 보냈다.
‘내게 이걸 보여주시고 산화하신 건가?’
황망함과 안타까움에 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그동안 목영청에게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이렇게 갑자기 헤어질 줄 알았다면 평소 잘해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간 나타나시겠지.’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다 잡았다.
풍검과 그 일행이 떠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난 당분간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중원으로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수련을 통해 내공을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아직 내 몸 속에는 천마여의진기와 지옥혈도의 기운이 남아있었다.
운기조식을 통해 그것을 음양진기로 바꿔야했다.
이번에 풍검과의 비무에서도 드러났지만, 절정의 고수를 상대하려면 내공이 부족한 감이 있었다.
지옥혈도를 연마한 암흑사련주를 제압해야했기에 내공을 늘리는 것은 필수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풍검이 머무르던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풍검이 떠날 때 선물을 남겼다고 했었는데, 목영청을 찾다보니 이제야 거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방에 들어서자 서탁 위에 책자가 놓여 있었다.
천마교무학고찰.
난 떨리는 손으로 그 책자를 들었다.
“풍검. 정말 고맙소.”
난 허공에 대고 풍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는 역시 도량이 큰 무인이었다.
역대 풍검들은 이곳에서 무학을 수련하면서 천마를 꺾으려고 노력했을 테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이 책자일 것이다.
절정무인인 역대 풍검들은 천마교무학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절로 궁금증이 일었다.
천천히 책장을 펼치며 읽어 내려갔다.
익히 알고 있던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역대 풍검들의 독특한 시각이 반영된 해석이었다.
덕분에 천마교 무학을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었고, 이것은 무학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책자를 품에 넣은 나는 모옥을 나와 천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 부근 빙벽에 이른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을 취했다.
“크흑. 이 고통은 여전하군.”
극양, 극음 두 진기를 충돌시키자 잊고 있었던 고통이 찾아왔다.
익숙한 고통이었지만, 도저히 참기 어려운 고통이기도 했다.
난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두 진기를 충돌시켜 음양진기를 얻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1년 후.
난 지난 1년 동안 천산을 벗어나지 않고 오직 운기조식에 매달렸다.
“이거야 원. 상거지나 다름없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물을 떠먹으려다가 그곳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먹고 자는 시간이외에는 오직 내공수련에 집착하다보니 이제는 상거지 중의 상거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굳이 씻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공을 연마하고 운기조식할 시간도 부족했으니까.
“사냥이나 해볼까?”
난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했다.
세찬 바람소리만 가득했지만, 이내 그 안에서 이질적인 소리를 포착했다.
순간 내 몸은 빠르게 계곡을 타고 산을 넘기 시작했다.
“이놈 봐라?”
눈앞의 작은 산양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요리조리 기가 막히게 피해 다녔다.
체력단련할 목적으로 진기를 운용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진기를 사용할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정도에 지면 어찌 지옥혈도를 꺾겠는가?”
이를 악물고 다시 산양을 쫓았다.
그렇게 뛰고 또 뛰어서 일각이 지난 후에 산양을 잡을 수 있었다.
꼬르르륵.
뱃속에서는 벌써 음식을 달라고 요동치고 있었다.
풍검일행이 천산을 떠나고 몇 달 뒤 모옥에 저장해두었던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이후로는 배가 고플 때마다 이렇게 사냥하여 배를 채우곤 했다.
화르르륵.
천마검으로 산양을 해체한 후, 일부는 극양진기를 끌어올려 익혀 배를 채웠다.
나머지 고기는 잘라서 자루에 넣은 후, 이동하려다가 난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곳이 있었던가?”
정신없이 산양을 쫓다보니 전혀 엉뚱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우걱우걱.
고기를 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작은 동굴이 눈에 들어왔다.
빙벽 사이에 생긴 동굴이었는데, 웬만해서는 찾기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내볼까?”
어차피 거처가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동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입구는 작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점차 넓어졌다.
동굴 입구에 양고기자루를 내려놓은 후,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기를 끌어올려 손바닥위에 횃불모양을 만들자, 동굴 안은 환해졌다.
적은 양이긴 하지만, 진기를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깝긴 했다.
하지만 횃불이나 야명주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뭐지?”
중간 쯤 이르렀을까?
섬뜩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자리에 앉은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죽은 자로군. 그것도 무인이었어.”
진기를 끌어올려 그를 관찰한 결과 그가 오래 전에 사망한 무인이란 걸 깨달았다.
다만 이곳이 워낙 춥고 건조하다보니 시체가 썩지 않고 보존되었으리라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바닥에는 그가 써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분명 손가락으로 바닥을 파서 쓴 글씨였지만, 붓으로 쓴 듯 깔끔하고 멋진 글씨체였기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글을 읽기 시작했다.
“허어, 초대 풍검이라.”
뜻밖이었다.
설마 초대 풍검이 이곳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는 이대 풍검에게 모든 것을 전수한 후, 세상을 경험하겠다며 천산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놀랍게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글은 길게 이어졌는데, 그가 세상을 떠돌면서 경험했던 부분을 적어놓았다.
특히 무인답게 여러 문파의 무공해석을 늘어놓았는데 심도 깊은 분석이었다.
“훌륭하군.”
난 책자를 꺼내어 공란에 초대 풍검이 남긴 심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한때 절정고인이었던 그의 심득은 시간을 두고 연구할 가치가 충분했다.
“시신을 수습해야 할 텐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의 시신을 양지바른 곳에 매장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푸스스스스.
시신을 들려고 손을 댄 순간 놀랍게도 그의 시신은 가루가 되어 가라앉았다.
이런 기사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직접 눈으로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당혹스러웠다.
일단 정신을 차리고 그의 옷에 가루를 쓸어 담았다.
깨끗이 쓸어 담고 나자, 그가 앉았던 자리에 글씨가 쓰여진 게 보였다.
“이게 진짜로군. 자신의 시신을 수습해준 자에게 내리는 선물이야. 만약 재수 없다며 부서 버리고 그대로 동굴을 나섰다면 절대 얻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것을 읽은 나는 깜짝 놀랐다.
하나의 검결과 보법이었는데, 그가 평생심득이었다.
“묘하군.”
난 그 자리에 앉아 풍검과 비무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리고 초대 풍검이 남긴 검결을 비교했다.
닮았지만, 달랐다.
“아마도 이 검결은 초대 풍검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심득을 얻었고, 그로 인해 변형이 되었을 것이다. 내겐 축복이로군. 특히 그 현란한 보법의 원리까지 얻었으니까.‘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을 만큼 기뻤다.
가루가 된 시신을 들고 손을 뻗어 초대 풍검의 심득을 훼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누가 또 이 심득을 얻을지 모르겠지만, 후인을 위해 남겨둘 생각이었다.
동굴 밖으로 나온 나는 진기를 손끝에 모아 돌처럼 단단한 얼음구덩이를 판 후에 초대 풍검을 묻고 명복을 빌어주었다.
3년 후.
천산 정상.
만년설 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한 무인이 뒷짐을 지고 서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완전히 상거지였지만, 풍기는 기운은 가히 대종사를 연상케 했다.
“휴우. 이곳에서 벌써 4년째로군.”
난 고개를 흔들었다.
무공에 미쳐 오랜 시간을 천산에서 보냈는데,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었다.
내공은 5갑자에 달했고, 초대 풍검이 남긴 심득과 풍검이 남긴 천마교무학고찰을 연구했고, 천마교와 정파무공을 명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천산에 오르기 전보다 확실하게 한 단계 올라섰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비록 내공은 전성기 때보다 1갑자 적었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발전했고 강해졌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려가자. 세상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군.”
천천히 천산을 내려와 거처로 사용했던 모옥에 들렀다.
그곳에서 옷과 몇 가지 물품을 챙긴 나는 천산을 내려왔다.
천산을 내려와 강가에 이르렀을 때는 밤이 깊었고, 난 옷을 벗고 물속에 뛰어들었다.
살을 에일 듯한 추위가 몰려왔지만, 가볍게 진기를 끌어올려 일주천하자 한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진기를 이용해 물을 뜨겁게 만들어 여러 번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난 후에 강물에서 나와 옷을 걸쳤다.
“이제 비로소 사람다워졌군.”
오랜만에 객잔으로 들어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너무 어두워졌기에 노숙하기로 결심했다.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운 후, 붉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려니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난 참 무심한 놈이군.”
모닥불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노라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향의 부모형제, 금노와 황보연, 청, 제갈문현을 비롯한 무림맹 무인들, 명리종을 비롯한 천마교인들까지.
모두 내게 귀한 사람들이었는데 무공에 빠져 살면서 그들에게 연락조차 취하지 않았으니, 누가 내게 무정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욕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긴 천산으로 들어온 지 벌써 5년이나 지났으니, 결코 적은 시간은 아니었다.
처음에 풍검을 만나려고 올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오래 천산에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풍검이 떠나고 4년을 더 있었으니.
그리운 사람들을 하나 하나 떠올렸고, 마지막에는 엉뚱하게도 암흑사련의 인물들이 떠올라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전혀 그립지 않았고 생각하기도 싫었는데 한번 생각하자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척무진으로부터 여러 무인을 떠올렸고, 종당에는 척휘명이 눈앞에 있는 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난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척휘명. 정신 못 차리고 지옥혈도를 익혀 세상을 어지럽힌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세상을 어지럽히면 그런 자들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만약 개과천선했다면?
하지만 난 고개를 흔들었다.
개가 똥을 끊지 척휘명이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척무진에 비하면 척휘명은 언행이 가벼운 자인데 제대로 지옥혈도를 연마했는지 모르겠군. 아니 악독함은 척무진보다 몇 단계 위니 오히려 지옥혈도를 익히기엔 적임자인지 모르겠어. 어쨌든 지옥혈도를 익혔다면 척휘명 넌 내 손에 죽는다.”
난 고개를 흔들어 암흑사련에 대한 생각을 떨쳐냈다.
괜히 그들을 생각하자 마음이 불쾌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무를 들어 모닥불을 쑤석거리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계획했다.
“일단 이 몸의 부모님을 만나는 게 순리겠지.”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했다.
다시 무림맹이나 천마교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또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혀 허우적대며 바쁘게 살긴 싫었다.
이제부터는 내 방식대로 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