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99화
99화. 짧은 여행을 떠나다.
6개월 후로 풍검과의 비무약속을 잡았지만, 난 수련방식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이후 3개월 정도 천산정상에서 수련하던 나는 그곳을 내려와 풍검을 찾았다.
“중원을 돌아보고 오겠다고요? 설마 비무를 피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갑작스러운 내 부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풍검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절대 그런 일은 없소. 만약 그렇다면 나 목진석은 사람이 아니라 개요.”
내가 당당하게 마음을 밝혔지만, 풍검의 어두운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나를 믿지 못하겠소?”
“이제껏 목 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해줬소. 그리고 비무를 약속했었소. 그 비무를 끝으로 우리 인연은 끝날 것이오. 그런데 3개월이 남은 이 시점에서 중원으로 떠나겠다는데 목 공이 나라면 믿고 보내줄 수 있겠소?”
풍검은 합리적인 의심을 드러냈다.
“그대의 생각이 옳소. 내가 중원을 돌아보려고 하는 이유는 그곳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내 무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기 때문이오. 그간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명상하며 지냈는데, 천마교의 무공을 전반적으로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소. 그렇기에 궁금하오.”
“그럼 나와 비무를 하고 떠나시오. 그럼 불필요한 오해를 할 필요는 없잖소.”
“물론 그게 현실적이오. 이보시오. 풍검.”
“말씀하시오.”
“그대가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준 것처럼 나 역시 최선을 다해 비무에 임해드리고 싶소. 지금처럼 뭔가 미진한 상황에서 비무를 하는 건 풍검께 실례라고 생각하오. 반드시 돌아오겠소. 그리고 비무에서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소.”
내가 마음을 열어 진심을 보이자, 풍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풍검께서도 명리종을 이기고 선조의 금제를 풀었지만, 이곳에 남아 있소. 왜 그렇겠소? 아마도 찜찜함 때문일 것이오. 적어도 천마교 무공의 진정한 위력을 알고 싶을 테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을 것이오. 그 과정을 통해 풍검의 완성을 노리리라 생각하오. 내 생각이 틀렸소?”
“푸하하하.”
풍검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대소를 터트리더니, 정중하게 포권하며 머리를 숙였다.
“내가 참으로 용렬한 모습을 보였소. 부끄럽소이다. 다녀오시오. 여기서 기다리겠소. 조금 늦더라도 괜찮으니 서두르지 마시오.”
“약속은 지켜야지요. 기다린 시간이 실망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나 역시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소.”
“믿어주셔서 고맙소. 3개월 후에 뵙겠소.”
난 풍검에게 정중하게 포권하고는 그의 모옥을 나섰다.
내가 모옥을 나서자, 울리우수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풍검에게 조언했다.
“저 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괜한 시간만 낭비한 꼴이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또한 운명이겠지.”
“예? 그게 무슨?”
운명이라는 풍검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자, 울리우수는 깜짝 놀랐다.
“걱정하지 마라. 그는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으니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만약 네 예상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내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지. 중원이 넓은 듯해도 좁다. 그가 촌구석에서 숨어살지는 않을 테니,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내 손에 죽는다.”
풍검은 담담하게 말하고는 울리우수를 바라보았다.
울리우수는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그 역시 무인으로서 진정한 비무를 원하고 있어. 난 그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울리우수는 즉각 복명했다.
그의 역할은 조언이었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셈이었다.
여기서 더 조언한다면 자칫 풍검의 분노를 살 수도 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명리종도 단번에 꺾었을 만큼 풍검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3개월 후가 기대되는구나.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어설픈 세치 혀로 나를 실망시킨다면 그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홀로 남은 풍검은 냉혹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
천산을 내려온 나는 강가에서 몸을 씻었다.
예전이었다면 체면 때문에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이제는 별다른 고민 없이 훌훌 벗고 씻었다.
물론 밤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예전이었다면 아무리 사람이 살지 않는 벽지이고 밤이었더라도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깨끗이 씻고 청삼으로 갈아입은 난 강가에 모닥불을 피우고 앉았다.
“이제 어떡할 것이냐?”
목영청이 말이 뇌리를 울렸다.
“글쎄요.”
“글쎄요라니. 당연히 천마교로 가야지.”
“천마교에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설마 무림맹으로 갈려고.”
“그곳도 가지 않으려고요.”
덤덤한 내 대답에 목영청은 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대화를 재개했다.
“무슨 생각이냐?”
“이제는 좀 자유롭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조직의 영광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삶은 이제 그만 둘 생각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무림맹이나 천마교에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하기 힘들구나. 그럼 뭐 하러 그리 열심히 수련했단 말이냐?”
“무공이 약하면 정말 쥐 죽은 듯이 살아야하지만, 강하면 내 뜻대로 조용히 살 수 있으니까요. 생활방식을 바꾸겠다는 것이지 세상을 좀 먹는 악당들을 내버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암흑사련도 내 손으로 끝장낼 생각이고요.”
“척무진 때문에 네가 희한하게 변했구나.”
“밑바닥까지 떨어진 후에 새로운 방식으로 오랫동안 수련하고 명상하며 지난 생을 돌이켜보니 이리 되었습니다. 천마교는 명리종이 잘 이끌어나가겠지요. 만약 위험해진다면 돕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맙다.”
목영청은 굳건한 내 의지를 확인하고는 더는 설득하려들지 않았다.
“이제 어떡할 생각이냐?”
목영청은 처음에 했던 질문을 다시 쏟아냈다.
같은 질문이었지만, 내 대답은 처음과 달랐다.
“닥치는 대로 비무해 볼 생각입니다.”
“무슨 소리야? 네 상대가 될 놈은 천하를 뒤져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텐데. 네 내공이 비록 삼갑자로 예전의 육갑자에 비하면 절반밖에 되지 않지만, 오히려 순도가 높아졌기에 지금이 더 위력적이야.”
“지켜봐주세요. 재밌을 겁니다.”
“도대체 네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겠구나.”
목영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역시 더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목영청은 이내 사라졌다.
“조사님께서 실망하셨겠네.”
난 불을 쑤석거리며 중얼거렸다.
물론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내 계획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까지의 삶은 나를 바라보며 기대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한 삶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라도 내 방식대로 삶을 살고 싶었다.
짧게 잠을 청한 나는 새벽녘에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끈 후, 발걸음을 옮겼다.
온숙현.
청과의 추억이 있던 이곳에 도착하자, 잠시 싱숭생숭한 마음이 일었다.
‘잘 살겠지.’
청에 대한 추억에 잠겼던 나는 발걸음을 옮겨 온숙현 남쪽의 한 장원으로 향했다.
대력문(大力門).
‘이름 참.’
처음 듣는 문파였는데, 이름이 영 어색했다.
“누구시오?”
정문을 지키던 무인이 나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옆구리에 걸린 검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무자(求武者)요. 문주를 만나고 싶소.”
정중하게 목적을 밝히자, 무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종종 비무를 청하는 떠돌이 무인들이 존재했는데, 아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한 듯 했다.
이런 경우는 무가에서 흔한 일이었기에 대부분은 그 요청을 받아주었다.
만약 비무를 거부한다면 겁쟁이라는 소문이 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는 공손하게 말하고는 급히 안쪽으로 사람을 보냈다.
잠시 후.
제법 힘을 쓰게 생긴 자가 거들먹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구무자라?”
“그렇소. 무공을 배우기 위해 세상을 떠돌고 있소.”
“죽을 수도 있소.”
“괜찮소.”
“나 원 참.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어 보이는데 무슨 배짱인지.”
그는 연신 헛참을 연발하더니 거대한 도를 들었다.
난 집중하여 그의 내력을 살폈고, 대략 30년의 내공임을 확인했다.
부웅.
그의 대도가 내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하품이 날 정도로 어설픈 초식이었지만, 기다렸다가 머리에 이르렀을 때 약간 몸을 움직여 피했다.
“엇.”
내 머리를 쪼갰다고 확신했던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이, 이놈이.”
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연속으로 강력한 공격을 날렸다.
하지만 그의 대도는 내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했다.
“헉헉.”
결국 그는 제풀에 지쳐 바닥에 주저앉았다.
“누구십니까?”
그제야 그의 입에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구무자일 뿐이오. 이곳에서 가장 강한 자를 불러주시오. 아니면 무인 전체를 불러서 연합공격해도 좋소. 비무결과는 절대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소.”
“잠시 기다리시오.”
그는 눈알을 떼구르르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가 안으로 달려갔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자, 목영청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주먹감도 안 되는 놈들하고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에잉. 쯧쯧.”
난 대답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문주로 보이는 자가 30여명의 무인을 이끌고 나왔다.
그들은 온갖 무기를 들고 살벌한 기세로 몰려오더니 나를 둘러쌌다.
“누구신가?”
“구무자요. 그대가 대력문주요?”
“내가 우문광일세.”
대력문주 우문광.
온숙현을 비롯한 이 일대에서 꽤 유명한 도객이었다.
“비무를 청하겠소.”
우문광은 무인을 뒤로 물리고는 도를 뽑아들고는 도집을 집어던졌다.
“내 아들을 물리쳤다고 기고만장하지 말게.”
“물론이외다.”
난 가늘게 눈을 떠 그의 내공을 살폈다.
대략 일갑자.
역시 수준차이가 크게 났다.
나 역시 내공의 일부에 제한을 걸어 그와 같은 일갑자만 사용하는 상태에서 비무에 나섰다.
“들어오게.”
“먼저 오시지요. 내가 선제공격하면 문주께선 제대로 도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패배할 것이외다.”
도발적인 내 태도에 우문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그의 곁에 있던 흑의무인이 내게 달려드는 것을 시작으로 다른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거야 원. 오합지졸이 따로 없구나. 중구난방으로 공격하다니. 쯧쯧.”
목영청의 한탄을 들으며 나는 그들과 맞섰다.
최대한 그들의 무기가 몸에 닿기 전까지 버텼다가 피하거나 막는 것을 반복했는데, 내공을 제한한 상태에서 감각과 경험으로 움직이려니 예상보다 힘들었다.
특히 이렇게 중구난방 식으로 공격받는 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이걸 콱. 그냥.’
단숨에 강기를 일으켜 싹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참았다.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막으려니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지만, 난 조금도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그만.”
우문광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던 무인들이 똥 씹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죽을힘을 다해 나를 공격했지만,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굉장한 고수로 보이는데 이런 비무가 의미가 있습니까?”
우문광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의미가 있소. 부탁하겠소. 우 문주.”
내가 정중하게 부탁하자, 우문광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나왔다.
“이얍!”
그의 대도가 빠르게 지쳐 들어왔다.
확실히 이제까지 상대했던 무인들보다 수준이 높았다.
이번에도 일갑자로 내공을 제한한 상태에서 그에게 맞섰다.
“헉헉.”
우문광의 도는 빠르게 무뎌졌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툭.
검집으로 우문광의 가슴을 툭 치자, 그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맙소. 비무결과를 절대 소문내는 일은 없을 것이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신형을 뽑아 올려 대력문을 떠났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
온숙현 외곽의 강가에 이르자, 목영청이 더는 참지 못하고 나섰다.
“네가 마음만 먹었다면 대력문은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생각을 모르겠어. 실전경험이 부족해서 그걸 회복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말이 안 돼. 저런 하수들과 검을 섞으면 오히려 퇴보하지 진보할 리가 없으니까. 또 저런 놈들은 아무리 실전경험이 떨어졌더라도 단번에 제압할 수 있고. 대답해봐. 도대체 뭐야?”
“재밌습니다.”
“재밌다니? 저런 하수들과 싸우는 게?”
“네. 아주 신선한 비무였습니다.”
“혹시···. 미쳤냐?”
“아뇨. 지극히 정상인데요.”
“그럼 왜?”
“경험해보려고요. 그간 제 인생은 뭐랄까? 뛰어난 사부와 영약을 통해 체계적인 수련을 하여 높은 경지에 올랐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참 허무하단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공허하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오늘 부딪친 대력문만 하더라도 수준은 낮지만, 매우 거칠었고 조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 이들만의 저열한 방식이 있었고요. 예상치 못한 방식을 겪으면서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네가 그러겠다니 더는 간섭하지 않으마. 이게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원.”
목영청은 탄식하고는 사라졌다.
난 가만히 앉아 강물을 바라보며 대력문도들과의 비무를 되새겨보았다.
솔직히 도움이 될 만한 초식은 없었다.
다만 거칠고 허술하며 조악한 초식을 상대할 때 가끔씩 섬뜩함을 느꼈었다.
그건 다듬어지지 않은 원초적인 살기였다.
또한 그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싸웠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거도 나름 재밌군.’
나는 자갈을 하나 집어들어 강물에 던졌다.
퐁당.
퐁당.
자갈을 던졌을 때 강물에는 동심원이 일었다.
그걸 바라보며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몸을 일으켜 이웃한 초라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