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92화
92화. 사막에서.
정주현.
금노는 만월루가 아닌 다른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자네로군.”
금노는 여리여리한 여인을 보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일어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이라고 합니다.”
“내가 금노일세. 전할 말이 있다고?”
“예. 구양 대협께서 보낸 서신입니다.”
“그에 대해 말해주겠는가?”
금노는 서신을 열어보지도 않고 구양천에 대해 물었다.
청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천하의 만월루주인 금노의 부탁을 거부하긴 쉽지 않았다.
특히 그는 황보연의 할아버지였으니 자세히 말해주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서신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구양 대협께서는 선대고인이 남겨놓으신 안배를 얻으려다가 실패하여 내공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영약을 통한 내공증진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공과 무위를 회복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허어, 이런 괴사가 있단 말인가?”
금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청을 바라보았다.
중원 제일의 정보단체인 만월루 수장 금노였기에 청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지만, 구양천이 천마라는 정보까지는 알지 못했다.
“저도 처음 듣는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만약 영약으로 해결이 된다면 무림맹으로 가셨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지.”
청은 차분하게 구양천과 나눴던 대화내용을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물론 금노 및 황보연에 관한 사안에 대해서 풀어냈다.
청의 이야기가 끝나자, 서신을 뜯어 읽은 금노의 표정은 굳어졌다.
예상했던 가장 안 좋은 내용이 서신에 기록되어 있었다.
“고맙네. 자네는 이제 어쩔 셈인가?”
“무림맹에 은퇴를 통보했습니다.”
“그렇군. 고생했네. 만약 마음이 바뀌거나 일자리가 필요하면 연락하게. 내가 자리하나 만들어줌세.”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만, 다시 무림에서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알겠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인가?”
“구양대협의 부모님을 뵙고 서신을 전달한 후, 무림맹에 갈 생각입니다. 그러면 정말 은퇴입니다. 만나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청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는 물러났다.
금노는 한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 일이 이리 꼬인단 말인가? 검제가 이루지 못한 꿈을 천이가 이룰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물론 언젠가는 내공과 무위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허어, 이를 어쩐다. 또 연이는 어쩌고. 실망이 가득할 터인데.’
경험이 많은 금노는 구양천이 내공과 무위를 회복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절정고수를 보았지만, 절정의 상태에서 내공을 모두 잃어버린 무인이 다시 절정의 고수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만큼 잃어버린 내공을 다시 회복하기 힘들었다.
특히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크기 때문에 ‘내가 과거에 이랬는데, 처음부터 다시?’ 이런 생각에 갇혀있다 보면 그대로 무너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구양천은 젊은 나이에 무림맹에서 촉망받는 유망주였으니, 그 실망감이 더 크리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서신에 자신을 찾지 말라고 했으니 그 상실감이 매우 클 것이다.
“답답하군.”
금노는 고개를 흔들고는 만월루로 향했다.
황보연은 금노가 돌아왔다는 말에 뭔가를 기대하는 표정으로 달려와 눈을 반짝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연아.”
“예. 할아버지.”
금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싸늘했기에 황보연은 깜짝 놀랐다.
“천이의 상태가 매우 안 좋구나.”
“오라버니가요?”
“그래.”
금노는 황보연에게 구양천의 현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해주고, 서신을 건넸다.
그는 황보연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서신을 펼쳐 읽은 황보연은 그 자리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
신장 온숙현.
천천히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는 나는 사막의 한가운데 바위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비록 뜨거운 햇빛을 피했지만, 확 달아오른 열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난 물을 한 모금 축이고는 머리를 바위에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난 참 이기적인 놈이야. 이런 중대한 일은 직접 찾아가서 말씀드리는 게 예의인데.’
부모님은 물론이고 금노, 황보연에 대한 미안함이 일었다.
누구를 먼저 꼽기 어려울 만큼 모두가 그리웠고, 미안했다.
또 놀랐을 제갈문현의 얼굴도 떠올랐다.
‘제갈문현은 잘하겠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냉정하게 잘 처리했으니까.’
솔직히 제갈문현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실망하고 걱정했을 테지만, 내가 부재한 상황을 잘 풀어내고 있을 것이다.
사적인 인연을 생각하던 나는 다시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이거야 원. 풍검을 찾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군. 부디 연매가 나를 잊고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펼쳐질 인생은 나 역시 종잡을 수 없으니까. 그냥 정주현으로 돌아가 이대로 산다면 연매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공에 목숨을 건 내가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언제까지 연매에게 날 기다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난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요즘은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걷고 있었다.
속도는 매우 늦었지만, 사색할 시간이 많아졌다.
사람이 없는 사막을 홀로 걸으면서 그간의 삶과 내가 익혔던 무공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찰루현.
이백여 호가 모여 사는 작은 농촌마을이었다.
천산에서 발원한 강 덕분에 이곳은 사막임에도 불구하고 농경지가 꽤 많이 펼쳐져 있었다.
‘사막이라고 우습게 볼 게 아니었군. 고비사막은 사방으로 거대한 설산에 둘러싸여있으니, 얼음 녹은 물이 이 사막에 백 개가 넘는 마을 만들어놓았어. 휴우, 이걸 다 뒤질 생각을 하니 깜깜하군.’
오래된 객잔으로 들어선 나는 방을 하나 잡고 식사를 주문했다.
“무엇을 드릴까요?”
어색한 중원어.
명리종을 비롯한 천마교인들과 생활하지 않았다면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내가 중원인이란 걸 알고 중원말로 물었으니 감사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잘하는 음식을 주십시오.”
“예. 그럼.”
“잠시만요.”
돌아가려는 그는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바람의 마을을 알고 있습니까?”
난 질문을 하면서 그의 표정변화를 집중적으로 살폈지만, 특별한 변화는 감지되지 않았다.
“글쎄요. 그런 마을이 있다는 소문은 언뜻 들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군요. 주인에게 물어보지요.”
“고맙습니다.”
감사를 표하자, 그는 물러났다.
잠시 후.
양고기를 양념한 요리와 빵이 나왔는데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맛은 괜찮군.”
일단 식성이 무얼 가리지 않았기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간 열심히 걷느라 배가 고팠기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식을 흡입하고는 마지막으로 물을 마셔 입가심을 하며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주인에게 물어본다던 종업원은 이후 아무런 말도 없었기에 더는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생각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벌써 밖은 어두운 밤이었다.
운기조식을 한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일어나.”
섬뜩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뉘시오?”
어둠속에 숨은 사내를 바라보며 정체를 묻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봐라? 내공은 별 볼일 없는 놈이 왜 이렇게 담이 세?”
“질문은 내가 했소. 누구시오?”
“네가 바람의 마을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바람의 마을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벌써 네 달째 사막을 헤매고 있었는데, 드디어 단서를 찾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만큼 기뻤다.
눈앞에 있는 자의 무위가 느껴졌다.
단번에 제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간신히 잡은 단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소.”
“그곳을 왜 궁금해 하느냐?”
“이유를 말하면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시겠소?”
“내 질문에 먼저 답하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놈의 멱을 따는 건 일도 아니니까.”
상대의 협박이 가소로웠지만, 일단 참았다.
“이유를 말하면 정말 가르쳐줄 것이오?”
“내 질문에 대답해.”
그의 말에 짜증이 어리기 시작했다.
“풍검의 후예를 만나고 싶소.”
“이놈이···.”
번쩍.
그의 검이 빠르게 뽑히더니 그대로 내 목을 노렸다.
악독한 수법.
난 살짝 몸을 틀어 그의 검을 피하면서 뇌정지탄을 날려 그의 마혈을 찍었다.
“악랄하군. 초면인데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했는가?”
순식간에 바뀐 내 기세에 그는 눈만 끔뻑거렸다.
“혀를 깨문다고 죽는 거 아니니까 자살시도는 하지 말도록. 독단을 깨물어봐야 소용없어. 네놈만 죽도록 고통스러울 뿐이지. 사람 목숨이란 게 그리 쉽게 죽지 않아. 특히 무공을 수련하여 육체가 단련된 경우는 더더욱.”
웬만하면 이놈을 살살 달래서 바람의 마을을 찾으려고 했었는데, 나를 죽이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바람의 마을이 어디지?”
“모른다.”
“난 반드시 알아야겠네. 지옥의 고통을 줘서라도.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군. 그러니 위치를 말해주게. 부탁하겠네.”
풍검의 후예를 만나 그의 무공을 배워야했기에 가능한 이들과 악연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여 정중하게 부탁하고는 그의 마혈을 풀어주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중원인치고는 예의가 있군.”
“중원인의 숫자가 많은데 어찌 좋은 사람만 있겠는가? 쓰레기만도 못한 자들이 넘쳐나지. 그들이 이곳 신장에서 몹쓸 짓을 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지.”
“헛참.”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풍검은 어찌 아셨소?”
그의 말투가 존대로 바뀌자 나 역시 존대로 바꿨다.
“목씨 성을 가진 무인에게 들었소. 절정무인이 되고 싶다면 신장으로 가서 풍검을 배우라고.”
“잘못된 정보를 들었군. 풍검은 그대가 아는 것처럼 절정무학이 아니오.”
“그래도 괜찮소. 한번만이라도 풍검의 후예를 만나고 싶소. 부탁하오.”
난 다시 한 번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예전이었다면 뻣뻣한 내 허리가 숙여지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모든 걸 내려놓은 요즘은 생각자체가 그때와는 완전히 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이야기를 합시다.”
밖에서 들려온 말에 난 깜짝 놀랐다.
비록 내공을 상실했다지만, 감각은 그대로였는데 전혀 그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사님의 말대로 이들은 평범한 자들이 아니로구나.’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나 역시 그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밖에 있던 자는 나를 힐끔 보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아끼던 내공을 사용하여 경공술을 펼쳤다.
“헉, 헉.”
예전이었다면 호흡이 거칠어지지도 않았을 짧은 거리였지만, 내공의 대부분을 상실한 지금은 죽을 만큼 힘들었다.
“내공을 숨기지 않았군요.”
“숨길 이유가 없지 않소?”
“난 중원인을 믿지 않소.”
단호한 말투였다.
그동안 이곳에 몰려든 중원인이나 중원무림인이 이곳에서 꽤 많은 진상짓을 한 게 틀림없었다.
“난 중원인이지만, 이곳과 인연이 깊소. 혹 이리찰극을 아시오? 그곳의 명리종 대인과 인연이 있소.”
“이리찰극의 명리종?”
“그렇소.”
“자세히 말해보시오.”
사납던 그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난 천마교주였던 사실은 숨기고, 천마교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명리종과 다섯 무인에 대해 자세히 풀어냈다.
“천마교인인데 어찌 예까지 오셨소?”
“내공을 잃었는데 회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소. 그때 누군가 알려줬소. 풍검의 후예를 만난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대의 진짜 정체를 밝히시오.”
“그럼 바람의 마을로 데려다주시겠소?”
침중한 표정으로 한참 나를 노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약속하겠소.”
“남아일언중천금이요.”
“난 중원인과는 달리 약속을 어기지 않소.”
이곳으로 온 중원인들이 어지간히 분탕질을 했나보다.
“난 천마교주였던 목진석이오.”
“헉, 처, 천마교주? 그렇다면 암흑사련주 척무진을 물리친···.”
“그렇소. 그와 싸우고 난 후 내공을 잃었소. 영약도 통하지 않소. 이제 대답이 되었소?”
천마교주로 재직하면서 구양천이란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목진석이란 가명을 썼었다.
원래 천마교주는 목씨들이 대를 이었기에 목진석이라 지었다.
“그렇소. 안내하겠소. 꽤 머니 잘 따라오시오. 힘들면 말하시오. 쉬어갈 테니까.”
“고맙소.”
작은 배려였지만,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십년 내공으로는 제대로 경공술을 펼칠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수 없으면 풍검의 후예를 찾는데 몇 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네 달만에 찾았으니까.
난 그를 따라 바람의 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