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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91화 (91/151)

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91화

91화. 고뇌(苦惱).

“이제 무림은 어찌될까요?”

청이 술을 따라주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무림맹, 암흑사련, 천마교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평화 아닌 평화의 시대가 찾아올 거야. 비록 척무진이 죽었지만, 그의 아들 척휘명을 중심으로 뭉쳐 있으니까 암흑사련이 크게 흔들리는 일은 없겠지. 천마교 또한 건재하고. 삼국시대라고 할까?”

“아, 옛날이 그립네요.”

“훗.”

“진짜로요. 화 맹주님이 계실 때는 이런 상황이 오기 전에 모조리 박살내버리셨잖아요.”

“양 맹주가 잘못하는 게 아냐. 화 맹주 그 양반이 좀 특별났던 거지.”

“어, 어. 그 양반이라니요?”

청은 깜짝 놀라 손을 휘저으며 덧붙였다.

“이곳이 무림맹원이 거의 없는 지역이고 대주님께서 무림맹을 떠나신다지만, 화 맹주님께 ‘그 양반’이란 말은 심했어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분인데요.”

“그랬어? 아, 미안.”

청은 쌜쭉 토라진 모습을 보이더니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대화주제를 바꿨다.

“황보 소저가 걱정되지 않으세요?”

“걱정은 무슨. 만월루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그녀는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

“그게 아니라···마음이 바뀌면 어떡해요?”

술을 들이키던 손이 멈칫했지만, 이내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죄송해요. 아픈 곳을 찔러서.”

“괜찮아. 이게 시험지가 되겠지.”

“시험지요?”

“응. 사실 연매가 어리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나를 좋아했었거든. 사랑까지는 아니고 호감정도. 그리고 만월루주인 금노 역시 구양세가에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고. 그녀의 호감이 사랑으로 바뀌게 된 건 내가 각성한 이후라고 봐도 무방해.”

“그렇군요. 여자는 남자의 그런 모습에 반하니까요. 특히 황보 소저는 무림인이니 더욱 깊이 빠져들었을 거예요.”

청이 맞장구를 치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고,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수련해야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지 알 수 없어. 어쩌면 말도 안 되게 빠를 수도 있고, 아니면 십년 넘게 걸릴지도 모르지. 아니면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연매는 아마 고민을 할 거야. 이런 나를 기다리는 게 옳을까? 아니면 새로운 대상을 찾는 게 옳을까?”

“너무 담담하시네요. 가슴이 아프실 텐데.”

“뭐, 현실이니까.”

난 싱긋 웃고 말았다.

이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것도 전생에서 누릴 수 있는 호사란 호사는 다 누려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걸 다시 누리겠다고 집착했다면 담담하기는커녕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을 테지만, 현재 처한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담담할 수 있었다.

한 이년 후에 정주현에 들를 생각이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황보연도 생각을 정리할 것이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이런 나를 받아줄 것이고, 승승장구했던 내 모습에서 받았던 강한 호감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었다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지만, 내 욕심 때문에 그녀를 구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잃어버린 무위를 되찾는 것이지 사랑쟁취가 아니었으니까.

“천생무인이야.”

“그렇죠. 대주님은 천생무인이죠.”

청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맞장구를 치며 술을 따라주었다.

그날 술이 취해 꽤 많은 술을 마셨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술을 마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그리고 술에 취해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전생을 포함해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

“젠장할 머리가 깨질 듯하군. 술을 많이 마시면 이런가?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술을 좋아하는 거야?”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에 난 힘겹게 눈을 떴다.

“헛.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고 남을 믿고 잔 게 얼마인지 모르겠군. 희한한 꿈을 꾸었어. 청을 안고 정사를 나누는 꿈이라니.”

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고는 씻기 위해 이불을 개키고 일어나려다가 화들짝 놀라 잠이 다 깼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불속에서 청의 체취가 진하게 느껴졌다.

“꿈이 아니었군.”

난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 그녀의 감정을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결론으로 도출될지는 알지 못했다.

“청.”

혹시 그녀가 방에 남아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저도 무림맹을 떠날 거예요. 대주님께 폐를 끼치지 않을 게요. 무운을 빌어요. 천랑. 그리고 부탁하신 서신은 모두 전달할게요.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이것도 꿈이 아니겠지.”

난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일어나 깨끗하게 씻은 후, 운기조식을 통해 주정을 털어냈다.

그러자 깨질듯하던 머릿속이 조금은 맑아졌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청은 서신을 남기지 않았다.

곧장 객잔을 나온 나는 청에게 만나고 싶다는 표식을 남겼다.

보통 이런 표식을 남기면 적어도 한 시진 이내에 청이 나타나곤 했었는데, 오늘은 하루를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떠났구나.”

허탈감이 밀려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녀가 내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공을 잃고, 내가 가지고 있던 명예롭던 지위를 모두 내려놓으면서 나는 해탈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부모님이나 황보연에게도 냉정하게 서신을 보낼 수 있었고, 오랫동안 함께 했던 청이 사라졌음에도 크게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뱀의 피를 타고 났는지도 모르겠군. 내가 이렇게 차가웠다니.”

난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풍검을 찾으러 가자.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

무림맹.

청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하자, 정보루는 발칵 뒤집혔다.

“이게 정말인가?”

제갈문현은 상기된 표정으로 서탁을 손바닥으로 치며 육영서에게 물었다.

“사실입니다. 청이 보낸 서신입니다. 그녀가 거짓으로 이런 서신을 보낼 리가 없잖습니까?”

“청을 불러들여.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은퇴했습니다.”

“뭐라? 은퇴?”

“네. 아마도 그녀가 가장 큰 충격을 받았겠지요. 다 포기하고 무림을 떠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휴우.”

제갈문현은 앉은 상태에서 허리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의 기둥이 될 것으로 의심하지 않았던 구양천을 잃었고, 가장 유능한 연락책을 잃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육영서에게 명령했다.

“달라진 건 없어. 암흑사련과 천마교의 정보를 파악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평화를 유지해야 해.”

“언젠가는 암흑사련과 천마교를 무너뜨려야죠.”

“그래야겠지. 하지만 당장은 아니야. 무림맹과 정파무림의 분위기도 뒤숭숭하니 시간을 가지면서 내부결속을 도모해야 해.”

“알겠습니다.”

육영서는 제갈문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비록 중원에서 암흑사련 지부를 모조리 쫓아내고 음지에서 암약했던 첩자를 색출해 체포했지만, 정파무림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꼬 지금 그 충격을 극복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혼란스러웠기에 당분간은 오직 안정만 생각하는 제갈문현이었다.

맹주전.

제갈문현의 어두운 표정을 본 양천린은 말없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맹주님. 오늘은 안 좋은 소식입니다.”

“말해보시오.”

안 좋은 소식이란 말에 양천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제갈문현을 재촉했다.

“척사검대주 구양천이 모든 내공을 잃었습니다.”

“뭣이?”

양천린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실입니다.”

나직한 제갈문현의 대답과 착잡한 그의 눈빛을 본 양천린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허어, 어쩌다가?”

“정확한 사유는 모릅니다. 천산에 풀어 놓은 안배를 얻으려고 갔으니, 그 부분에서 잘못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지요.”

“어허, 그럼 어쩐다? 그런 상태로 척사검대주를 계속 맡을 순 없잖은가?”

“그는 은퇴의사를 전해왔습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차기 척사검대주를 선발하게.”

너무나도 쉽게 양천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제갈문현은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구양천은 무림맹에 큰 공을 세운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애도를 표하고 며칠 후에나 이런 조치를 시행하리라 생각했었다.

양천린의 냉정함에 제갈문현은 처음에 화가 났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이해되었다.

‘하긴 구양 대주가 너무 강했어. 맹주님은 자신이 상관맹주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겠지. 그렇다면 지금 맹주님의 이런 반응도 이해가 돼. 그래도 아쉽군. 아쉬워. 무림맹이 강해지고 무림이 평화를 되찾으려면 구양천 같은 무인이 맹주가 되어야 한다.’

맹주 상관현은 화운룡이 급성장하면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맹주직을 내놓아야 했다.

양천린은 구양천의 급성장에 분명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구양천의 성장을 마냥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는 없었을 테고,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동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는 완전히 무림을 떠난 것인가?”

양천린의 질문에 제갈문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닙니다. 내공을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하더군요. 그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 지 알 수 없었기에 척사검대주를 내려놓고 은퇴의사를 밝힌 겁니다.”

“훌륭한 결단이야. 적어도 십년은 걸리겠군. 그가 돌아오면 그때 자리를 마련해주세.”

“알겠습니다.”

제갈문현은 굳이 청에 대해서는 보고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중요한 연락책이었지만, 그녀의 은퇴가 맹주에게 보고할 사안은 아니라 생각했다.

“척사검대가 흔들리지 않을까?”

“척사검대는 물론이고 사대단도 모두 흔들리겠지요. 구양 대주가 그들을 휘어잡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무림맹의 일원이니 결국은 대의를 받아들일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구양천의 존재감도 차차 잊혀지겠지요.”

“그래.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 화 맹주가 없으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잖은가?”

양천린은 탄식했다.

화운룡이 죽었을 때, 무림맹을 비롯한 정파무림, 사파무림이 발칵 뒤집어졌다.

특히 정파무림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었는데, 그들은 무림이 크게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매우 걱정했었다.

이후 양천린이 맹주로 취임해 무림의 안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구양천이라는 신성이 나타나면서 무림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척무진의 죽음을 계기로 무림맹의 옛적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세인들은 화운룡을 잊어갔다.

만약 무림이 극도의 혼란상태였다면 그들은 화운룡을 그리워했을 테지만, 평화가 이어지자 자연스럽게 그를 잊었다.

“상관현을 어찌할까요?”

상관현이란 이름이 나오자 양천린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전 무림맹주이자 원로원주가 암흑사련의 세작으로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세작들이 그를 세작으로 지목하여 추포했지만, 사안이 워낙 중대했기에 정보루에서는 그를 가둬두고 은밀하게 조사를 이어갔다.

특히 상관현은 일관되게 암흑사련의 세작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었다.

“실로 애매하게 되었어.”

“그렇습니다. 사실 무림맹과 암흑사련이 극한의 대립을 이어가는 상황이라면 상관현을 쳐내도 되지만, 이렇게 안정을 되찾고 있으니 그게 조심스럽습니다.”

“그렇지.”

양천린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암흑사련과 전쟁 중이라면 상관현을 죽여 무림맹과 정파무림에 경각심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써 평화가 찾아왔는데 상관현을 첩자라는 죄명으로 죽인다면, 애써 평화를 되찾은 무림은 크게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어쩌면 암흑사련에서 무림맹을 흔들려고 일부러 그랬는지도 몰라.”

아무런 증거도 없는 추측이었지만, 제갈문현은 그럴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그 역시 처음에는 단호하게 상관현을 붙잡아 들여 일을 처리했지만, 세작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관현은 억울하게 끌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기에 양천린의 말에 반발하지 않았다.

“은퇴시키는 선에서 끝내세. 그리고 이번 일은 덮고 가는 걸로. 물론 상관현의 입에서 이번 일이 나오면 안 돼.”

“알겠습니다. 제가 그를 만나 처리하겠습니다. 만약 거부하면 어쩔까요?”

“그러진 않을 거야. 상관현은 고집이 셀뿐이지 바보는 아니니까. 우린 그에게 명예를 살릴 방법을 제안할 뿐이고, 그는 받아들이겠지. 늙은이에게는 명예 말고는 남는 게 없어.”

양천린은 탄식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제갈문현은 그런 양천린을 응시하다가 포권하고는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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