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84화
84화. 기호지세(騎虎之勢)-3.
암영은 몽롱한 상태에서 내가 쏟아낸 질문에 저항하지 못하고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핵심인 척무진의 지옥혈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젠장할. 제일 중요한 거는 측근에게도 비밀로 했단 말인가?”
난 혀를 차고는 암영의 수혈을 짚어 재웠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니 그럴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동남동녀 천 명을 희생해가며 지옥혈도를 수련했는데, 그런 추잡한 짓을 저질렀으니 측근에게도 자세한 건 알리기 싫었겠지. 어휴, 척무진. 이 지독한 놈 같으니라고. 무혁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좀팽이 같은 놈.”
몇 차례 욕설을 내뱉고 나자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다.
암영을 그대로 방치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모옥 뒤편으로 향하자, 거대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기괴하고 음산한 기운이 몰려왔다.
“이거 섬뜩한 걸.”
솔직한 심정이었다.
두려움이 일었다기보다는 찜찜함과 불쾌함 등이 섞인 역한 감정이었다.
아마도 원귀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안으로 들어가자 역한 냄새와 더불어 풍기는 기운은 더더욱 사악해졌다.
“이게 지옥혈도의 기운이로군. 남은 흔적이 이정도일진대, 만약 직접 펼쳐진다면 웬만한 무인들은 싸우기도 전에 사악한 기운에 휘말려 전투의지를 상실할 수도 있겠어.”
난 눈을 감고 최대한 기감을 끌어올려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천마여의신공을 익혔는데도 불구하고 살기가 들끓어오를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자, 들끓던 살기가 가라앉았다.
난 동굴을 살피며 안으로 걸어갔다.
사악한 기운을 빼고는 특별할 게 없는 동굴이었다.
안쪽에 이르니 둥근 석실이 나왔는데, 사악한 기운이 가장 강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동남동녀가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두 손을 모아 죄 없이 죽은 이들에게 명복을 빌고는 꼼꼼하게 벽면을 살폈다.
날카로운 도가 스쳐지나간 자국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지옥혈도의 위력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꼼꼼하게 자국을 훑어보고 머릿속으로 일련의 움직임으로 만들자 지옥혈도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천마검을 뽑아든 나는 원형의 석실에 새겨진 일련의 도의 흔적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초식을 펼쳐보았다.
천마교의 무공을 익혔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매우 상이했다.
말도 안됐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묘하군.”
무리(武理)가 느껴졌지만, 깊이 파고들면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생을 통틀어 처음 겪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무의 극의를 깨달은 나였는데도 그 무리를 깨우치기 힘들다는 건 일반적인 무리를 벗어나서 창안된 무공이라는 방증이었다.
“지옥혈도는 천마교에서 성장한 척전숭이 천마교에 한을 품고 만든 무학이다. 그러니 천마교의 무공인 듯하면서도 천마교의 무공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구나. 이 부분에서 내가 고전할지도 모르겠어.”
난 흘끔 동굴 밖을 살폈다.
아직 햇볕이 남아 있었기에 다시 집중하여 느낌이 오는 대로 천마검을 펼쳐 지옥혈도의 무리를 깨우치려고 노력했다.
동굴 밖이 어두워지자, 천마검을 옆구리에 꽂았다.
‘그래도 계속 시전하면서 생각한 결과 지옥혈도의 무리를 어느 정도 깨우칠 수 있었다. 난주현까지 이동하면서 고민해본다면 척무진과 싸울 때 큰 도움이 되겠어.’
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쉬이이익.
실로 예리한 암습이었다.
카캉.
하지만 이런 암습에 무너질 내가 아니었다.
막아야한다는 의지가 일자 진기가 일었고 호신강기가 내 몸을 감쌌다.
덕분에 암습자의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동시에 나는 왼손을 그대로 뻗어 장풍을 날렸다.
퍼펑.
“커헉.”
그는 실 끊어진 연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허공을 날아 그에게 접근해서 얼굴을 확인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암영이었다.
“분명히 마혈을 짚었는···.”
중얼거리던 내게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구양천의 몸으로 새롭게 인생을 살고 있을 무렵, 암흑혈천마교의 무리를 처치할 때 마혈을 찍었는데도 움직였던 무인들이 기억났다.
그게 충격적이어서 무림맹에도 전파했었는데, 내가 그걸 잠시 잊고 있었다.
“쿠헉.”
암영은 검붉은 피를 토해내며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암연혈뢰장이란 거야. 속의 장기를 완전히 뭉개버리는 무공이지. 단전이 박살났을 테니, 그대로 누워있게. 한 가지만 묻지. 마혈을 찍혀도 움직이는 비기는 혈천교에서 연구한 것인가?”
암영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 표정을 보고 내 짐작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암영 같이 충직한 성격을 가진 부류는 얼굴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기에 취조하기 수월했다.
“그래. 아주 귀찮아졌군. 이제는 모조리 죽여야 되니까 말이야.”
“죽여라.”
“그렇지 않아도 죽일 생각이네. 지옥혈도가 어찌 생겼는가? 잘 만들어진 명검처럼 생겼는가? 아니면···거대한 도? 그것도 아니면 만들어지다 만 쇠붙이?”
난 일부로 하나씩 묻고 잠시 시간을 띄워가며 묻는 방식을 택했고, 그러면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쇠붙이라고 질문한 것은 척전숭이 큰 부상을 입고 도주했기에 새롭게 지옥혈도를 만들 시간이 부족할 테니, 어쩌면 쇠붙이의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암영은 고맙게도 쇠붙이에서 눈썹 끝이 살짝 꿈틀하며 반응을 드러냈다.
“이 정도면 됐네. 그만 가시게.”
살짝 손을 휘젓자 암영은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시체가 되었다.
이후에도 잠시 기다렸지만, 누구도 백마산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암영이 나를 기습하기 전에 암흑사련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닌 듯싶었다.
“희한한 놈이군.”
암영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던 나는 그대로 바닥을 박차고 경공술을 펼쳐 백마산을 내려갔다.
백마산의 상황을 암흑사련에서 알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꼭 필요한 용무가 아니면 누구도 만나지 않는 척무진의 폐쇄적인 생활방식 때문이었다.
청령산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명리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했던 것을 얻었습니까?”
“지옥혈도란 무공에 대해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으니 소득이랄 수 있소.”
“어떤 느낌입니까?”
“아주 사악하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지닌 자라도 그 기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종당에는 광기어린 살인마가 될 정도요. 천마여의진기 덕분에 난 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아무튼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마물임에는 틀림없소.”
“암흑사련주가 그리 악하다는 소문이 없었습니다만.”
“아마도 그 역시 지옥혈도의 무서움을 알고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오. 복수하기도 전에 미친 살인마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갑시다. 안내하시오.”
“예. 전속력으로 갈 테니, 놓치지 말고 따라오십시오.”
“알겠소.”
명리종은 나를 흘끔 보더니 엄청난 속도로 경공술을 펼쳐 산을 내려갔다.
순식간에 어둠속으로 사라질 정도로 빨랐다.
난 경공술을 펼쳐 정확하게 그의 뒤를 따랐다.
만약 이 어둠속에서 그를 보고 따라가려고 한다면 시각의 한계 때문에 곧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여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느끼며 경공술을 펼쳤다.
척무진 일행을 추월하기 위해 나와 명리종은 짧게 휴식을 가지며 경공술을 펼쳐야 했다.
특히 난주현에 이르는 길은 험준한 산악지대의 계곡과 고개를 잇는 길이었기에 추월하려면 산을 넘어야 했다.
삼일째 되는 날.
무리해서 경공술을 펼친 명리종은 기어코 탈이 났다.
“전 괜찮습니다. 이제 저 산만 넘으면 난주현이니 먼저 가십시오. 이삼일 정도 요양하고 기운을 수습한 후에 따라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고민에 잠겼다.
무리한다면 그를 엎고라도 갈 수 있겠지만, 척무진을 상대해야 하는 만큼 무리하긴 힘들었다.
“정양해서 몸이 완벽해지면 그때 오시오. 알겠소?”
“알겠습니다.”
“맹세하시오?”
“예?”
“어설픈 충성심으로 몸이 낫지 않았는데 급히 돌아와서 저들과 싸운다면 자칫 희생당할 수 있소. 난 그대를 잃고 싶지 않소. 그러니 다 나으면 돌아오겠다고 맹세하시오.”
“교주님.”
명리종은 배려에 감격했다.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는 한 사람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배려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서.”
“맹세하겠습니다. 반드시 몸이 다 나은 후에 난주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렇더라도 며칠이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알고 있소. 그때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공중으로 솟구친 후 앞으로 날아갔다.
분명 경공술이었지만, 육갑자에 이르는 내공과 경공술에 대한 무리를 깨달았기에 경공술을 펼치는 내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새가 산비탈을 타고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허어, 교주님의 무위는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구나. 진정 신인이로다.”
명리종은 경공술을 펼쳐 산을 내려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
난주현.
암흑사련 난주지부로 사용되던 건물에 도착하자, 찰극, 탑성, 목제, 오로, 극립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일제히 포권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적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총관은 중간에 탈이 나서 요양을 취하고 있네. 잠시 탈진했을 뿐이니, 며칠 내로 도착할 것이야.”
미리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준비하게. 곧 저들이 도착할 거야. 대략 인원은 오십 명 정도. 무위가 매우 뛰어나다고 볼 수 있네. 거기에 련주 척무진도 포함되어 있고.”
“저, 총관도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찰극이 조심스럽게 우려를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수적으로 밀리는데 절대고수인 명리종이 없다면 불리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더는 그를 생각하지 말게. 여기서 끝장을 내야지. 자네들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난 저들을 정찰하고 올 테니까.”
“위험합니다.”
“따라올 생각 말게. 오히려 자네들이 곁에 있으면 더 귀찮아지니까.”
명리종의 경공술도 느려서 보조를 맞추기 힘들었는데, 이들이라면 더할 것이다.
특히 자칫 교전이 벌어졌을 때,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발생한다면 이들은 분명 짐이 될 게 분명했다.
만약 나 혼자라면 암흑사련주가 직접 추격해도 벗어날 자신이 있었지만, 이들은 절대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난 혼자가기로 마음먹었다.
“척무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자신이 있으면 나서게.”
그들 중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경공술이 제일 낫다는 오로도 감히 나서지 못했는데, 척무진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준비하고 있게. 적어도 저들이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힘이 좀 빠진 상태여야 해볼 만한 싸움이 되지 않겠는가? 수적으로 부족한데 쌩쌩하다면 이기기 힘들어. 그러니 자네들은 여기서 준비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냉정하게 명령을 내리자, 그들은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이게 최선이야.”
난 선 채로 내공을 일주천하고는 그대로 몸을 솟구쳤다.
까마득하게 솟아올라 빠르게 날아가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오로는 고개를 흔들었다.
“교주님의 경공술에 비하면 난 새 발의 피 수준이로군.”
“그 정도는 아니니 너무 자학하지 말게.”
찰극이 다가와 오로를 위로했다.
“자자, 준비하세. 교주님께서 친히 저들의 예봉을 꺾어 놓았는데, 우리가 저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교주님을 뵙겠는가? 아니 그런가?”
탑성의 주장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천년을 기다린 끝에 찾아온 기회였다.
모두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