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69화
69화. 암흑사련주의 진면목.
장안 남쪽 총령산.
척무진이 산 아래에 내려서자, 암영이 기척 없이 뒤따라 내려섰다.
척무진이 가만히 서있자, 암영은 천천히 걸어가더니 숲을 향해 이상한 새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스스슥.
섬뜩한 혈의를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척무진을 보더니 정중하게 포권했다.
“련주님. 오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이로군. 혈노. 교주께선 안에 계신가?”
“계십니다.”
“바쁘신가?”
“바쁘시긴 한데, 련주님을 만날 시간은 항상 있지요. 들어가시지요.”
척무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혈노 곁을 지나가다가 멈췄다.
“그동안 고마웠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척무진은 혈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숲 안으로 사라졌다.
암영은 그를 따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표정 여전하군.”
혈노가 이죽거리듯 질문하자, 암영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며 살벌한 음성을 쏟아냈다.
“아가리 함부로 놀리지 마라. 확 찢어버리기 전에.”
“훌훌훌. 자네는 여전하군. 알았네. 알았어. 그만하게. 난 돌아갈 테니까.”
혈노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음을 짓고는 숲속으로 사라졌다.
“빌어먹을 새끼.”
암영은 바닥을 발로 찼다.
평소 신중하던 그의 성품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마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졌다.
하지만 암영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숲을 바라볼 뿐, 더는 화내지 않았다.
숲속에는 십여 개의 건물이 듬성듬성 퍼져있었는데, 척무진은 가장 안쪽의 혈천각이란 이름이 붙은 건물로 들어섰다.
“어쩐 일로 오셨소?”
머리가 허옇게 센 혈의를 입은 늙은이가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그래도 사람이 왔으면 고개를 돌려야지. 쯧쯧.”
척무진이 혀를 차며 늙은이 앞에 앉았다.
그제야 늙은이가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왜 왔소?”
“차나 한잔 마실까 해서.”
“미쳤군. 미쳤어. 차가 련주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하시오?”
“미쳤지.”
척무진은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제야 늙은이 즉 혈교주가 천천히 몸을 돌려 척무진을 바라보며 앉았다.
그는 꼼꼼히 척무진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대성하지 못했소?”
“쉽지 않군.”
“그 무공을 대성하겠다고 천명의 동남동녀를 바쳤는데···. 허어, 도대체 얼마나 더 바쳐야 하오?”
“오늘 그거 말고. 다른 이야기 하세. 휘명이가 무림맹의 구양천이란 놈을 치러갔었네.”
“휘명이가 나섰으면 구양천은 죽었겠군.”
“아니. 오히려 휘명이는 내상을 입은 채 간신히 도망쳐왔고, 암흑십혈은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네.”
“그럴 리가?”
혈교주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휘명의 수라소수마공이 비록 구성에 이르렀다지만, 그 자체로 최상위 고수인데. 더군다나 암흑십혈이 돕는데 어찌? 설마 저들이 역으로 함정을 판 것이오?”
“구양천 한 명이었네.”
“이거야 원.”
척무진은 차분하게 척휘명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설명했다.
혈교주는 침착하게 듣고 몇 번 질문하고는 눈을 질끈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 혈교주가 눈을 뜨자, 척무진이 입을 열었다.
“감이 잡히는가?”
“모르겠소. 하지만 구양천과 화운룡이 깊은 관계란 건 알겠군요.”
“천의검법을 익혔으니 화운룡이 가르쳐줬겠지.”
“아니오. 제자가 아니오.”
혈교주는 고개를 흔들고는 주름이 가득한 이마를 찌푸리며 대화를 재개했다.
“뭔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소. 젊은 놈이 잠깐 배웠다고 천의검법을 대성한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혈뢰구강검술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느낌이오. 이는 어찌 설명할 거요? 이것도 화운룡이 가르쳐주었다? 말도 안 되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정말 화운룡이 죽은 게 맞소?”
“죽었어. 그건 확실해. 붕정을 비롯하여 여러 명이 그의 죽음을 확인했네.”
붕정(崩正)은 암흑사련에서 무림맹에 심어둔 첩자였다.
“세상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소.”
“그럼 다정이 화운룡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럴 수도 있지요.”
“무슨 개소리야!”
이제까지 온화한 표정으로 말하던 척무진이 악귀흉살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일갈했다.
“가면을 벗어던지는 게 훨씬 어울리는구려. 련주.”
“젠장할.”
척무진은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고,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자세히 말해보시게.”
“혹시 화운룡이 죽음을 위장하여 우리를 모두 속인 후에 구양천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면?”
“헛, 자네 어디 아픈가? 아무리 주안술을 익혔더라도 안 돼. 살아있다면 지금 83살이야.”
“반로환동이란 말도 있잖소?”
“그런 자는 본 적도 없고, 그걸 성공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네. 내가 가장 존경했던 형님도 반로환동하지 못했어. 반로환동은 무림을 떠도는 헛소문일 뿐이야.”
척무혁까지 언급되자, 혈교주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감이 잡히지 않나?”
“혹시···.”
“말해봐.”
“아니오.”
“아, 궁금하게 하지 말고. 나도 다정인지 구양천인지 하는 놈 때문에 지금 미칠 지경이야.”
“이혼대법이라는 게 있소.”
“이혼대법?”
“배교의 술법인데 사람의 혼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고 알려져 있소. 예를 들어 이혼대법을 대성하면 죽을 때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오. 물론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단 한 번도 이혼대법이 성공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소.”
“배교는 역사가 깊은데 어찌 성공사례가 없는가?”
“간단하오.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거기에 목숨을 걸고 익히겠소?”
혈교주의 반문에 척무진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구양천 때문에 매우 민감해져서 그렇지, 그 역시 이혼대법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혈교주의 말이 맞았다.
설령 이혼대법을 익혀 대성했다고 치더라도, 죽어야 혼을 옮길 수 있는데 어떤 미친놈이 이혼대법을 시연해보자고 죽겠는가?
“하긴 화운룡이 이혼대법을 대성했다손 치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말이 안 되지. 아니 대성했을 리가 없어. 그는 매일같이 우리 사파를 무너뜨리는데 평생을 바친 외골수인데 그걸 연구할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잖아.”
“그렇죠. 그놈은 머릿속에 사파를 무너뜨린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그러니 배교의 사술을 익힌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죠. 더군다나 엉터리인 이혼대법이라면 더더욱.”
척무진은 힘이 쭉 빠졌다.
그래도 혹시나해서 왔는데 역시나였다.
“휴우, 답답하군.”
“직접 련주께서 나서시는 게 어떻소?”
“훗, 내가 나서라? 후하하하하.”
척무진은 대소를 터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오겠네.”
“지옥혈도인가 뭔가 빨리 대성하시오. 무림맹에서 하도 단속을 해대서 사람 구하는 게 쉽지 않소. 련주께서 원하는 유형을 고르려면 동쪽까지 가야하니 미칠 지경이오.”
“알겠네. 노력하지.”
“몇 성에 이르렀소?”
“십성.”
“그 정도면 원하는 놈은 모조리 제압할 수 있지 않소?”
“불순한 기운을 몸 안에 주입되면 대성하기 어려워. 대성은 이뤄야지. 이제까지 사파의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이 화운룡에게 죽었어.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이만하면 되었다고 거기서 만족했기 때문이야.”
“그렇군요.”
혈교주는 왜 척무진이 백마산에 처박혀 지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고립시켜가며 살아가는 수도적인 삶은 오직 지옥혈도의 수련 때문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수많은 동남동녀를 제물로 바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아.”
“뭔가?”
“점을 잘 치는 노인네가 있는데···.”
“점?”
척무진은 혈교주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척무진은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 구양천의 상황은 상식적이지 않잖소? 그리고 그놈은 보통 점쟁이가 아니오.”
“점쟁이가 다 똑같지.”
“크크크. 점 값이 목숨이요. 그래도 똑같소?”
“부하들 목숨을 내놓으면 되겠군.”
“크크크크.”
“왜 웃는가?”
“그 늙은이가 보통 늙은이인줄 아시오? 목숨을 담보로 점을 쳐주는 늙은이가 그런 거에 속겠소? 그냥 가시오. 괜한 말을 했소.”
척무진은 입을 달싹거렸지만,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혈교주를 잠시 노려보다가 방을 나섰다.
**
난주현.
장안에서 고비사막에 이르는 중간지역에 황하를 끼고 발달한 교역도시였다.
중원인, 강족, 저족, 색목인까지 모인 이곳에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네요.”
청 역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치 딴 세상에 온 거 같아요.”
“그래. 말로만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군.”
“알고 계셨어요?”
“소문은 들었지. 벽안, 금발, 흰 피부. 온숙현에도 상황이 이럴 텐데, 몰랐어?”
“저도 이쪽은 처음이거든요. 온숙현 안가는 정보루 소속이고, 전 소마각 소속이라 장안 서쪽은 아예 와보지도 않았어요.”
“밥이나 먹고 가자.”
“예.”
난 청과 함께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객잔으로 들어섰다.
특이한 음식도 눈에 띄었지만, 평소에 먹던 음식을 주문했다.
천산까지 빨리 가야 하는데, 엉뚱한 음식을 먹었다가 배탈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식사를 마친 후, 방 두 개를 잡았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까 일찍 자둬.”
“네. 주무세요.”
그녀의 방문을 닫고 나온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상에 걸터앉아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어차피 잠은 조금만 자도 충분했기에 시간이 남으면 운기조식과 명상에 빠져들었다.
극의에 다다른 나였기에 실전적인 비무보다는 명상과 가상수련에 매진하는 게 효과적이었다.
물론 척휘명이나 암흑십혈처럼 고수들과 대결했을 때 얻는 것이 가장 많았지만, 그런 고수를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인가?
운기조식을 취해 단전을 채운 나는 명상에 빠져들었다.
척휘명을 상대로 혈뢰구강검술을 펼쳤는데, 실전에서 전력으로 펼친 것이 검술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그와의 대결 마지막부분에서 혈뢰구강검술과 천의검술을 동시에 사용했는데,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해. 두 검법의 장점을 취해 하나로 만드는 데 진전이 있었어.’
최근 들어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천의검법의 뇌정지탄과 혈뢰구강검술의 혈뢰강이었다.
둘을 장점을 모아 하나의 초식을 만든다면?
생각만 해도 전율이 일었다.
폭풍참륜에 버금가는 무지막지한 초식이 될 것이다.
폭풍참륜에 비하면 내공소모도 적으니 내게는 꼭 필요한 초식이었다.
‘천산까지 가면서 계속 연구해봐야겠어. 이걸 완성한다면 비장의 패가 될 것이다.’
그날 새벽이 될 때까지 명상은 계속 이어졌다.
보름 후.
드디어 온숙현에 도착했다.
밤에 계속 명상을 이어가다보니 더 빨리 올 수 있었는데 조금 지체되었다.
“이곳이군.”
“네. 정보루 안가입니다.”
“여기서 기다려. 위험하니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지.”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녀와 헤어진 나는 곧장 서쪽에 위치한 천산으로 향했다.
공터에 이르자,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에 무인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자세를 취했다.
“잘돼야 할 텐데.”
매우 긴장되었다.
그간 연구한 뇌정지탄과 혈뢰강을 합친 초식을 시험할 생각이었다.
이게 성공하면 뇌정지탄처럼 언제든지 지공처럼 발출이 가능하면서 혈뢰강처럼 위력이 클 것이다.
콰쾅.
“아닌가? 위력은 괜찮은데 펼치는 게 불편하군. 좀 더 빠르고 쉽게 펼칠 수 있어야 해.”
다시 명상에 잠겼다.
일부분을 수정한 나는 살며시 왼손을 뻗었다.
쿠쿠쿠쿵.
네 개의 손가락 끝에서 적색강기가 빠르게 발출되었다.
“아까보다 위력은 조금 감소했지만, 훨씬 편해졌어. 속도도 훨씬 빠르고. 뇌정지탄 위력의 두 배라.”
분명 만족스러운 성과였지만, 미진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자.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어디 처박혀서 계속 무공이나 연구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 조사님 말씀대로 천산에 가서 천마의 유물도 얻어야 하고, 그 무공도 익혀야 해. 그리고 암흑사련이 설치기 전에 무림맹으로 돌아가야지. 그런데 정말 천마가 되어야 하나? 답답하군.”
난 이내 고개를 흔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냈다.
미래의 일이 어찌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현재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천산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