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66화
66화. 정주현에서 천산으로.
쐐액.
쐐애애액.
귀혼검은 이제까지와 다른 검법을 펼쳐냈다.
검초를 펼칠 때마다 섬뜩한 느낌이 풍겨 나왔고, 패도적인 기운이 연공실 내부를 도배했다.
“묘하군. 묘해.”
반 시진을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른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저 혈뢰구강검술을 흉내 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밖으로 괜찮게 펼쳐졌어. 이 정도면 상당한 경지라고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잠시 생각하던 나는 어떤 생각에 도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의검법과 짝을 이루는 건곤여의신공의 뿌리가 화씨세가의 선조인 화진운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목청영의 아들인 목진운이었다.
다시 말해 건곤여의신공의 뿌리가 천마교라고 생각하면 암흑마교의 마공을 내 몸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도 건곤여의신공의 극의를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로서는 그게 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외에도 척무혁과 지긋지긋하게 싸우면서 그의 무학에 익숙해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재밌군.”
나는 선 채로 운기조식을 한 후, 다시 귀혼검으로 혈뢰구강검술을 펼쳤다.
내가 천마교의 후인이라 생각하고 펼쳐서일까?
이제는 친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혈뢰강(血雷罡)!”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강력한 적색강기가 귀혼검에서 뿜어져 나와 연공실 철벽을 때렸다.
쿠쾅쾅쾅.
석실은 무너질 듯 크게 흔들렸다.
천의검법 폭풍참륜과 맞먹는 위력이었다.
폭풍참륜이 강기륜의 형태라면 혈뢰강의 강기창이었기에 속도 면에서는 훨씬 빨랐다.
“폭풍참륜의 강력함과 혈뢰강의 속도를 섞을 순 없을까?”
별 뜻 없이 중얼거린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무공목록을 작성한다면 적어도 십위 안에 포함될 무공을, 그것도 전혀 성질이 다른 무공을 섞을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건곤여의신공과 찰떡궁합인 천의검법의 근원을 찾으면 천마교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의검법이 도가나 불가의 무공이었다면 건곤여의신공과 찰떡궁합일 리가 없었다.
일단 결심이 서자,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겨 혈뢰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초식을 대조했다.
완전히 다른 초식이었고, 내공을 운용하는 방법 또한 달랐지만, 고민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들었다.
난 다시 혈뢰구강검술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하루종일 내공을 소모하며 검술을 펼쳤고, 다 소모되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기조식하여 내공을 채운 후에 다시 펼쳤다.
드르르륵.
며칠 만에 연공실을 나왔다.
아직 완벽하게 원하는 성과를 얻은 건 아니었지만, 계속 밀폐된 연공실에 있으니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기에 연공실을 나선 것이다.
“괜찮니?”
모용혜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내가 며칠 동안 연공실에서 나오지 않자 걱정되었나보다.
“괜찮습니다. 생각할 게 있어서 좀 오래 머물렀습니다.”
“가자. 밥은 먹고 해야지.”
“그러고 보니 많이 배고픈데요.”
“이 녀석이.”
모용혜는 등짝을 철썩 때리고는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에게서 뭉클한 모정이 느껴졌다.
임시거처에 도착하자, 의외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금노와 황보연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난 금노를 보자 반사적으로 포권했다.
금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연을 가리켰다.
“난 괜찮은데···. 이쪽이 괜찮지 않은 거 같군.”
그때 모용혜가 다가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모용혜는 평소에도 황보연을 며느리감으로 점찍고 있었기에, 무심한 내 모습에 애를 태웠었다.
그러고 보니 연공실 앞에서 기다린 것도 황보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보연은 놓치기 아까운 여자인 것만은 분명하니까.
“바보같이 놓치지 말고. 어서 가봐.”
그녀를 보는 순간 머쓱한 감정이 들었다.
전생에서도 일중독이었는데, 이번 생에서도 그걸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금노와 모용혜는 슬며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연매.”
“몰골이 그게 뭐에요? 그래도 척사검대주인데 좋은 옷은 몰라도 깔끔하게 챙겨 입지 않고요.”
“그러게 말이야.”
“씻고 나와서 식사해요. 어서요.”
그녀는 욕간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욕간에 들어서자 뿌연 수증기가 올라오는 따끈한 욕조가 준비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처음 보는 무복이 개어져 있었다.
화려하게 새겨진 문양을 보니 매우 젊은 취향이었기에 모용혜가 아닌 황보연이 준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이 씻어요. 생각 같아서는 내가 들어가서 박박 밀어주고 싶네.”
“알았어.”
밖에서 쫑알거리는 황보연의 잔소리가 귀엽게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는 내 마누라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사람 사는 거겠지.”
풍덩.
난 옷을 훌훌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니 살 것 같았다.
이대로 한참동안 몸을 담그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밖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괜찮군.”
긴 머리를 묶어 뒤로 쓸어 넘기고, 화사한 무늬가 그려진 청의무복을 입은 후에 거울을 바라보니 멋졌다.
욕간을 나와 조금 걸었을 때, 밖에서 기다리던 황보연이 다가왔다.
“이제 내가 아는 구양천 오라버니같네요. 아까는 정말 상거지인줄 알았어요.”
“하하하. 상거지 소린 처음 듣는군.”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가요.”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신데.”
“제가 허락받았어요. 가요.”
“그럴까?”
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떨쳐버렸다.
정주현에는 무림맹 하남성지부를 비롯한 수많은 정파가 포진해 있었기에 대로상에서 뭔 짓을 벌이기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검법은 어때?”
둘 다 무림인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무공으로 옮겨졌다.
특히 황보연은 벽씨검법이 몸에 맞지 않아 성과가 나지 않았었는데, 내가 전수해준 구천선자의 검법인 구천현검법을 솜이 물을 흡수하듯 받아들였다.
“괜찮아요. 많이 올라갔는데, 오라버니가 정주현에 안 계시니까. 더는 집중이 안 돼요.”
“이거 영광인걸. 누가 하남제일미인 연매에게 이런 말을 듣겠어?”
“피이, 마음에도 없는 말은 잘하시네요.”
“진짜야.”
“그러신 분이 무림맹에서 서신한통 보내지 않았어요? 연서라도 좀 보낼 것이지. 얼마나 기다렸는데.”
황보연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짝사랑하는 수많은 남자를 물리치고 구양천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의 기대대로 너무나도 훌륭하게 성장했으니까.
하지만 무심함이 느껴질 때면 여자로서 마음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그런 헛헛함을 떨치려는 듯 살며시 팔짱을 꼈다.
“다음에는 연서를 꼭 보내야 해요. 안되면 전서구로 살아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주시고요. 내가 이렇게 매달릴 여자가 아닌데···. 정말 자존심 상한단 말예요.”
“미안해. 내가 조금 더 잘할게.”
왼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꼭 감싸 안았다.
전생에서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낯부끄러운 말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조금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내 표정을 보고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와 식사도 하고 강변을 거닐었다.
우리 뒤에는 싱글싱글 웃는 중년 무인 한 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는 금노가 황보연의 안위를 걱정하여 붙인 무인이었다.
그는 웃는 상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고 매서웠다.
처음 보는 고수.
‘역시 만월루를 얕보면 안 돼. 저런 무인이 숨어 있었다니.’
그를 보자 황보연을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만월루 팔층에서 황보연과 만났다.
“자신 있게 펼쳐봐.”
“오라버니 다쳐도 난 몰라요.”
“내가 무림맹 사대단주를 모조리 제압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치고 들어와. 그래야 도움이 될 거야.”
내 입으로 이렇게 자랑하려니 낯 뜨거웠다.
하지만 오늘은 황보연을 위해 팔불출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표정은 확 밝아졌다.
쉬이이익.
그녀의 검이 기습적으로 허공을 가르며 옆구리를 베어왔다.
확실히 저번보다 간결하고 빨라졌다.
캉.
내가 가볍게 쳐내자, 그녀의 검은 집요하게 내 몸의 사혈을 노리고 들어왔다.
처음에는 막지 못하면 어쩌나 약간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면, 첫수의 교환을 통해 헛된 걱정이란 걸 깨닫고 야무지게 공격해왔다.
쐐애애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달라졌다.
그녀의 검이 아슬아슬하게 내 목을 한촌차이로 지나갔다.
예전이었다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을 그녀지만, 비무에 집중한 나머지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난 주로 방어에 집중하며 그녀가 가진 무위를 제대로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이고.”
황보연은 곡소리를 내며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힘이 하나도 없어요.”
“비무해보니 어때?”
“재밌어요. 정말 후련하게 가지고 있는 걸 모두 쏟아냈어요.”
“다행이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오라버니는 왜 이렇게 강해요? 상식을 초월하니 이게 현실인가 싶기도 하고. 무림맹으로 떠나기 전보다 훨씬 강해진 거 같아요. 그때도 엄청났지만, 지금은 까마득한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랄까?”
“연매가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할아버지가 몇 번 비무해 주셨는데, 그 느낌과 비슷했어요. 사실 웬만한 무인은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비무하지 못하거든요. 죽을까봐. 진짜 마음 놓고 비무하는 무인은 할아버지와 오라버니뿐이에요.”
금노만큼 강하다는 황보연의 말에 절로 흐뭇함이 일었다.
전생에서야 금노보다 우위에 있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와 대등한 위치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기뻤다.
금노가 얼마나 무서운 무인인지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또 정주현을 떠날 거죠?”
“응. 할 일이 있어서.”
“많이···위험해요?”
“조금?”
그녀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난식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연서는 바라지 않을 테니까 전서구를 통해 소식이라도 알려줘요.”
“그럴게.”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녀가 와락 안겨왔다.
살짝 감긴 그녀의 얼굴은 실로 매혹적이었고, 난 그녀의 입술을 탐닉했다.
입맞춤이 시작되자, 그녀는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조금이나마 갈증이 가신 거 같아요.”
그녀는 흐트러진 상의를 단정하게 고쳤다.
“땀 냄새 났죠?”
“몰랐는데.”
“피이, 거짓말. 약속 잊으면 안 돼요.”
“꼭 연락하지.”
그녀의 당부를 듣고는 만월루를 나섰다.
밖으로 나온 나는 이곳에서 시간을 꽤 지체했다는 걸 깨달았다.
전생에서 가족이 없었고, 비정했던 부분이 가장 큰 후회로 남았었기에 이번 생에서는 그걸 지키고 싶었다.
그런 일환이었기에 난 이곳에서 시간을 지체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남성지부에 들러 가족과 인사한 나는 곧바로 정주현 외곽 객잔으로 향했다.
“오래 걸리셨네요.”
청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녀를 데리고 가지 않고 이곳에서 쉬면서 기다리게 한 이유는 황보연 때문이었다.
둔했던 나는 그녀의 감정을 얼마 전에야 눈치 챘다.
그 이후로 가급적이면 사무적으로 대했고, 가능하면 그녀가 감정적으로 힘들 수 있는 일은 피했다.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어. 푹 쉬었어?”
“네. 덕분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자.”
“어디로요?”
“천산. 정확히 말하면 천산 인근의 온숙현.”
“엄청 머네요.”
“그곳은 위험한 곳이니까 도착하면 온숙현 안가에 머무르고 있어. 내가 정기적으로 서신을 줄 테니까, 그걸 정주현과 무림맹으로 보내고.”
“알겠습니다.”
“그리고···거기로 가는 도중에 누군가가 나를 기습하면 절대 끼어들지 말고 은잠해서 지켜봐. 이건 명령이야.”
“그럴 생각이었어요. 원래 연락책은 집행인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아요.”
그녀는 애써 명랑하게 대답했지만, 눈꼬리가 살짝 떨렸고 난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도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반드시 지켜. 만약 이 명령을 어기면 다시는 보지 않을 테니까.”
난 일부러 한 번 더 강하게 내 의지를 전달했다.
암흑사련의 암살자들과의 싸움에서 그녀를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내 조언을 받아 많이 강해진 건 사실이었지만, 나를 암습하는 무리들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자.”
나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위험에 처하면 제가 꼭 지켜드릴게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곧바로 몸을 날려 내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