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61화
61화. 결심하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면하고 나왔을 때, 집무실로 들어온 황엽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걱정을 드러냈다.
“별일 아닐세. 오늘은 황 부대주와 마 부대주가 대원들을 훈련시키게. 난 생각할 게 있어서 도저히 짬을 낼 수 없군.”
“알겠습니다.”
황엽은 의문을 표하지 않고 곧장 복명했다.
척사검대는 사실상 황엽이 이끌어 나가고 있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 조직의 수장이었지만, 그를 믿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필요하면 일정한 기간 동안 외부에 출타하는 건 물론이고, 지금처럼 홀로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도 척사검대는 잘 돌아갔다.
‘어떡해야 하나?’
홀로 남은 나는 의자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곤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천마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목영청의 말대로 천의검법으로 암흑사련주를 이길 수 없다면?
이것이 문제였다.
‘아직은 암흑사련이 불안정하고 준비가 덜 되었기에 조용히 있는 게 아닐까? 조사님 말대로 암흑사련주가 그렇게 강하다면 결국 대의를 위해 내가 천마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무림맹주이면서 천마라? 이게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군.’
허탈함과 분노가 밀려왔다.
한참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분명한 것은 처음보다 천마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누그러졌다는 것이다.
내가 천마의 핏줄인 것도 한몫했지만, 정말로 암흑사련에게 중원무림을 통째로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 의논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저녁까지 고민한 후, 목영청을 찾았다.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가 나타났다.
이제는 그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았는가?”
“천마가 되려면 어떡해야 합니까?”
“훌훌훌. 결정했구먼.”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자세히 상황설명을 듣고 결정하려고요.”
“그게 그거지.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걸세. 일단 천산으로 가게.”
“천산이요?”
“그래. 그곳이야 말로 천마교가 탄생한 신성한 지역이지.”
“하지만 암흑마교가 출범한 이후 그곳은 폐허가 되었는데요. 수많은 무림인이 그곳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천마교의 유물을 그런 식으로 얻을 수는 없지. 내가 척은광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듣고 보니 목영청의 말이 옳았다.
“그럼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천산으로 가. 그곳에 도착하면 알려주겠네.”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그건 나도 장담할 수 없네. 무공비급을 얻어 익혔을 때, 천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안배된 관문을 통과해야 하거든.”
“천마교가 무너졌는데 그게 남아있겠습니까?”
“남아 있을 거야. 만약 없어졌다면···무림은 끝일세. 그럼 자네는 절대 암흑사련주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어떻게 그걸 장담하십니까?”
오기가 치밀어 올라왔다.
전생에서 천하제일인이었고, 사마외도의 무리를 모조리 격파한 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저평가를 받으니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이걸 보게. 과거 척은광의 무공인데, 흉내만 내겠네. 자네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이 무공의 무서움을 잘 알걸세. 척은광도 이걸 대성하진 못했지.”
목영청은 말을 마치더니 소매를 팔꿈치가 드러나도록 걷었다.
기수식을 잡은 그의 팔이 희게 물들었고, 느릿하게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품이 나올 만큼 느렸다.
이후 번개같이 빨라지기도 했고, 다시 느려지기도 했다.
날카로운 예기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느껴지는 게 있는가?”
“글쎄요.”
“이건 수라소수마공(修羅素手魔功)일세. 천마교의 무공인데, 암흑마교에서 가져갔지. 이 수라소수마공을 극성으로 익혔다면 손이 투명해질 만큼 흰색이 되고, 매우 부드러워지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수라소수강기는 매우 패도적이라 각종 무기를 수수깡 부러뜨리듯 꺾어버릴 수 있지.”
“천의검법에는 강기를 날릴 수 있는 초식이 있습니다.”
“강기도 파훼할 수 있네.”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단서를 붙였잖은가? 대성했을 때 그 위력이 나온다고.”
“수라소수마공이 최고의 무공입니까?”
“천만에. 진짜는 따로 있지.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 있어.”
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강기를 파훼한다는 수라소수마공도 기겁할 일인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무공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지옥혈도(地獄血刀)의 비밀을 풀었다면 천의검법으로 절대 대적할 수 없네. 척은광도 지옥혈도의 비밀을 풀지 못했어. 이걸 풀려면 암흑마교와 혈천교가 힘을 합해야 해. 그래서 그들이 연합한 암흑사련이 두려운 것이지.”
난 입을 열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옥혈도는 제 주인을 스스로 선택한다네. 천마교 역사상 최강자는 3대 천마셨지. 자네도 한번은 들어봤을 거야. 목씨 성에 의천이란 이름을.”
목의천.
어찌 모르겠는가?
그에 의해 중원무림이 초토화되었는데.
“지옥혈도는 3대 천마의 유품이겠군요.”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다지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영청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닐세. 하늘의 장난이랄까? 그 당시에 천마교엔 두 명의 천재가 탄생했네. 한 명은 하급 교인이었지.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재였네. 한번 보면 무의 이치를 깨우칠 정도였지. 이름은 척전숭이었네.”
“그런 천재도 있습니까?”
“나도 그저 들었을 뿐이네.”
“그, 그렇군요.”
“처음에는 3대 천마께서 그를 우대해주셨어. 하지만 얼마 안 가 호랑이새끼를 키웠다는 걸 깨달았지. 그의 자질은 3대 천마에 못지않았거든. 아니 넘었다고 봐야지.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되었고, 그가 반란을 일으켰네.”
“아, 그래서 3대 천마가 중원정복을 뒤로 미루고 급히 회군했었군요.”
“그렇지. 천마교의 비극이었지. 그때 많은 무공이 소실되었고, 뛰어난 고수가 죽었네. 그 역시 삼대 천마를 당해낼 수 없었네. 자질로만 따지면 그가 우위에 있었지만, 삼대 천마는 도저히 그가 넘어설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었지.”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
천마교 최고의 비전절예라면 아무리 천재인 척전숭이었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삼대 천마 역시 천재였으니, 승패는 명약관화했다.
“그럼 지옥혈도는 척전숭의 유품입니까?”
“그렇지. 척전숭은 삼대 천마에게 패배한 직후 도주했어. 실로 대단한 놈이었어. 모두 그가 죽임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도망쳤으니 그의 천재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되지. 하지만 그는 오래 살지 못했네. 아마 오일을 넘기지 못했을 거야. 암연혈뢰장(黯然血雷掌)에 맞으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그럼 지옥혈도는 뭡니까?’ 하고 묻고 싶었지만, 참고 그의 다음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옥혈도의 주인이 천마교를 멸하리라. 척전숭이 도주하면서 했던 말이지.”
“그럼 척은광이 척전숭의 후인이었군요.”
“그건 몰라. 시간도 많이 흘렀고, 외모도 너무 달랐으니까. 물론 척전숭만큼 천재도 아니었지. 또 그는 천마교의 부교주였어. 부교주정도 되면 뒷조사를 하지. 그런데 깨끗했어.”
그러니까 지옥혈도는 실체가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시하기엔 매우 찜찜했다.
그 정도 천재였다면···어떤 방법으로든 수를 내지 않았을까?
어쩌면 예상보다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른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지옥혈도 때문에 천마가 되라고 하신 겁니까?”
“짧게 보면 수라소수마공에 대처하기 위해서지. 이건 확실해. 극성의 수라소수마공은 천의검법을 제압할 수 있네. 물론 오히려 역으로 천의검법에 당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이것만으로도 천마가 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네. 그리고 지옥혈도의 후예가 등장한다면 무림은 피바다가 될 거야. 그걸 막으려면 삼대 천마께서 남기신 안배를 얻어야 해. 그분이 척전숭을 가장 잘 아니까.”
다 듣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천마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지옥혈도를 전설이라 취급하며 무시했다가 그 후예가 무림에 나오는 날이면 그야말로 무림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척전숭이 원한이 깃든 천마교의 무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행운인 줄 알게. 자네와 내가 연결되지 않았다면 이런 기회조차 없었을 테니까.”
“그럼 어째서 제게만 반응하셨습니까? 천년이 흐르는 동안 화씨조상 중에서도 뛰어난 무인이 많았는데요.”
“난들 알겠는가? 그저 운명이라 생각한다네.”
운명이라는 말이 정말 무겁게 와 닿았다.
그렇다면 내가 구양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도 무림을 위기에서 구하라는 운명인가?
나 역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겪고 나니, 지옥혈도의 후예가 출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암흑사련주가 지옥혈도의 후인이면 곤란한데.”
“훌훌훌. 자, 천산으로 당장 떠나자. 시간이 없다.”
“아뇨. 무림맹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주현에 들렀다가 가야 하고요.”
최소한 이 몸의 부모에게 인사는 하고 갈 생각이었다.
“그리하게. 준비되면 부르게. 너무 늦지는 말고.”
목영청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는 그대로 사라졌고,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벌써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난 그대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어둠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무림맹 건물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군. 내가 천마가 되어야 한다니. 이중적인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무림맹주이며 동시에 천마라면 정사 양쪽에서 공격을 받을 테니까. 피곤한 일이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고개를 흔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냈다.
정보루.
아침 일찍 제갈문현을 찾았다.
“어인 일입니까?”
내가 정보루에서 기다리고 있는 매우 이례적인 상황에 제갈문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안이겠군요. 들어가시죠.”
제갈문현은 자신의 집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식은 차를 따라 내게 권하고는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자, 말씀하세요.”
“잠시 무림맹을 떠날 생각입니다.”
“떠나다니요?”
제갈문현은 화들짝 놀랐다.
현재 무림맹은 척사검대를 중심으로 사대단이 움직이고 있었다.
암흑사련이 발호하면 척사검대가 중심이 되어 대처해야 하는데, 그 수장인 내가 떠난다고 하니 이런 반응이 당연할 것이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좀 더 강해지고 싶으니까요.”
“지금도 충분히 강하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암흑사련의 련주와 최상위에 포진한 자들의 무위를 생각하면 더 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화 전맹주가 죽자마자 이렇게 들고 일어났다는 건 자신감의 표현이겠죠. 그러니 저 또한 화 전맹주만큼 강해져야 저들의 발호를 억누를 수 있습니다.”
“오래 걸리겠군요.”
“빠르면 육개월. 늦으면 몇 년이 걸리겠죠.”
난 담담하게 말했다.
제갈문현은 말없이 내 눈을 응시했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흘렀고, 결국 제갈문현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알겠습니다. 이미 결심이 굳었는데 말리긴 어렵겠군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십시오.”
“만년화리 내단을 제가 복용했습니다. 혹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습니까?”
“전혀요. 전 구양 대주의 야망을 읽었거든요. 평범하게 척사검대주로 끝날 야망이 아닙니다. 아주 높은 곳을 바라보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보았을 때 더 강해져 무림맹에 돌아온다면 그 야망을 달성하기도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난 고개를 흔들었다.
전생에서도 느꼈지만, 말로는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그는 정확하게 내 심리상태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혹시 조금이라도 귀띔을 주실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루주님까지 곤혹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군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면 암흑사련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을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그리하지요.”
제갈문현은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였다.
“구양 대주는 무림맹의 희망입니다. 구양 대주 없이 암흑사련을 상대하는 건 상상하기도 싫으니, 꼭 돌아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이 사람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제갈문현에게 정중하게 포권했다.
전생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제갈문현.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믿음직스러웠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누굴 데려가실 생각입니까?”
“혼자 가겠습니다.”
“혼자요?”
“네. 아무래도 위험한 여정이다 보니 어쩔 수 없군요.”
제갈문현은 잠시 고민을 이어가더니 입을 열었다.
“천산 인근에 온숙현이란 제법 큰 현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청사루라는 중간 규모의 객잔이 있지요. 그곳은 정보루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분타입니다. 필요하면 그곳을 이용하십시오.”
제갈문현은 접선방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증명패를 내어주었다.
증명패를 받아든 나는 그에게 포권하며 감사를 표하고는 정보루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