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37화
37화. 삭천혁과의 비무.
적호단.
구양천과의 대결을 앞둔 적호단주 삭천혁은 적당한 긴장감을 즐겼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무릎 위에 검을 올려놓았는데, 살짝이라도 닿으면 베일 것 같은 시퍼런 검날이 번뜩이는 검이었다.
명상에 잠겼던 그는 이번에 부단주로 올라온 나형린을 호출했다.
적호단에는 여러 명의 부단주가 있었는데, 나형린은 실권보다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삭천혁은 정치적으로 임명된 이런 부단주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나형린을 부른 이유는 그가 정주현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구양천의 무위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최근에 그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습니다만.”
“계속해봐.”
“적어도 1년 전에 어떤 수준인지는 정확히 압니다.”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신진고수였나?”
“천만에요. 세가를 좀먹는 망나니였죠. 무공은 파락호수준이었고요. 중간에 어떤 기연이 있어서 무공수위가 크게 올라갔는지는 몰라도 삭 단주님에게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급작스럽게 이룬 무공이 오죽하겠습니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무림최고의 천재라고 하더라도 1년만에 절정의 무인에 올라설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구양천은 천재가 아닙니다. 그저 괜찮은 자질을 가졌을 뿐이죠.”
“흐음.”
삭천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미 추혼검대주 여중명, 호표대주 철무의를 통해 구양천의 높은 무위를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나형린의 다른 의견을 듣고 나니 오히려 머릿속이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사실인가?”
“소인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정주현에 가서 웬만한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구양천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다 압니다. 한때 구양세가는 검제를 배출할 만큼 뛰어난 가문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럼 1년만에 그리 강해졌다는 말인데···.”
삭천혁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차라리 나형린의 조언을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확실한 건 그의 무공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운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불완전한 그의 무공이라면 삭 단주께서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알겠네. 돌아가게.”
나형린이 포권하고 물러나자, 삭천혁은 혀를 찼다.
‘괜히 불러서 물어봤군. 도움이 되기는커녕 머릿속만 헝클어졌어. 이젠 정말이지 지면 망신이고 이겨야 본전인 싸움이 되었군. 이렇게 된 거 전력을 다해 네놈을 쓰러트려주마. 찝찝한 싸움이야.’
삭천혁은 독하게 마음을 굳혔다.
정치적인 행보와는 거리가 먼 그였기에 오랜만에 나온 신진고수가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주변의 태도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는 이번 비무에서 단숨에 구양천을 기선제압하여 끝내겠다고 다짐했다.
**
내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에는 조진량, 황성원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신진고수였기에 이곳을 방문한 이들의 대부분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나를 지켜봤다.
난 그들과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호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비무 하루 전.
난 모든 무인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온종일 명상에 잠겼다.
명상을 통해 삭천혁과의 가상대결을 실시했는데, 그동안 매일 가상대결을 진행하면서 처음보다는 비무내용이 훨씬 좋아졌다.
처음에는 그가 펼치는 현철강기를 무조건 뚫으려고 했었고, 그 부분에서 당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 비무를 길게 이끌었다.
어차피 현철강기도 내공이 있어야만 강력한 방어력이 유지되었다.
길게 비무를 유지하다가 기습하여 역공을 펼치자, 현철강기를 비로소 깨뜨릴 수 있었다.
‘구경하는 이들은 좀 지루하겠지만, 그래도 방법은 찾았군. 뭐, 나니까 가능한 방법이지.’
난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는 자만심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인식이었다.
삭천혁과 오랫동안 함께 사마외도를 척결했었기에, 그의 무공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전법을 펼칠 수 있었다.
그를 모르는 이가 이런 전법을 펼친다면 오히려 크게 당할 가능성이 컸다.
삭천혁은 저돌적인 성격이라 처음부터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그렇기에 그를 상대로 지연전을 펼치는 건 절정이상의 고수도 쉽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아침에 다시 한 번 명상을 하고 식사를 했다.
“오늘 몸상태는 어떻습니까?”
“괜찮다. 좋은 비무가 될 것이다. 꽤 길어질 테니, 눈을 떼지 말고 집중해서 보고 느끼거라. 도움이 될 것이다.”
“예. 그런데 적호단주는 무공도 무공이지만, 매우 저돌적인 성격이고 일격필살의 난폭한 검법을 지녔다고 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쥐가 고양이 걱정해주고 있었다.
난 싱긋 웃었다.
“고맙다. 밥 먹자.”
난 천천히 밥을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의무복을 입고는 귀혼검을 만지작거리며 비무대로 걸어갔다.
성휘는 바짝 긴장하여 내 뒤를 따랐다.
-다정님.
청이었다.
-응.
-힘내세요. 적호단주가 강하다지만, 다정님의 적수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부 아니지?
-제가 다정님과 동행하면서 무위를 직접 확인했으니, 가장 정확한 의견이 아닐까요?
-고마워.
-그럼 조용히 응원하겠습니다.
-지켜봐. 도움이 될 거야.
-알겠습니다.
청의 기척이 사라졌다.
난 속도를 내어 비무대 앞에 마련된 자리로 걸어갔다.
무림맹주를 비롯한 무림맹의 원로, 주요 실권자들이 빠짐없이 자리했다.
난 그들에게 포권하여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비무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인사만 받았을 뿐,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양천린은 힐끔 나를 쳐다보았고, 기감을 끌어올려 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양천린은 제갈문현과 전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내 예상보다 수준이 높구려.
-무림의 장래가 밝습니다.
-저 정도라면 승패의 결과에 상관없이 새로 타격대를 신설하여 맡겨도 되겠소.
-마음에 드십니까?
-그렇소. 구양천을 보고 나니 내가 괜한 고집을 피웠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과연 삭천혁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 궁금하군.
-패배하리라 생각하시는군요.
-삭천혁을 넘기는 어렵지. 그는 경험이 너무 많고, 일단 비무를 하면 죽기 살기로 덤벼드니까. 오늘 구양천은 굉장히 당혹스러울 거야.
양천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젊은 나이에 높은 무위를 가졌다는 제갈문현의 보고가 믿어지지 않아 적호단주를 비무상대로 골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러지 않았어도 됐는데.
후회되는 양천린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삭천혁을 바라보았다.
‘저, 저. 아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만. 저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쯧쯧.’
양천린은 엄청난 살기를 뿜어내며 비무를 준비 중인 삭천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혼자 속앓이를 해야 했다.
“오늘 비무를 보기 위해 참석한 여러 무인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비무는 하남성의 떠오르는 신진고수 구양천과 적호단주 삭천혁의 비무입니다.”
무인들은 사회자로 나선 참마각주 조진량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적호단주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하겠습니다. 구양천은 검제를 배출했었던 구양세가 출신으로 구양검법을 대성했으며 내공도 이갑자에 이를 만큼 출중한 기량을 보유했습니다. 뛰어난 신진고수가 출현했으니 무림으로서는 큰 홍복입니다.”
검제란 말에 여러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검제가 죽은 후, 구양세가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불모지나 다름없는 구양세가에서 뛰어난 신진고수가 배출되자,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양천을 바라보았다.
“두 분은 비무대 위로 올라오십시오.”
조진량의 요구에 삭천혁이 몸을 날려 왼쪽에 내려섰고, 난 천천히 걸어 올라가 오른쪽에 섰다.
조진량은 이후에도 삭천혁과 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관람석에서는 빨리 비무를 진행해달라며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서 진행하게.”
보다 못해 양천린이 나서자, 조진량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급히 마무리했다.
그가 비무개시를 선언하고는 단을 내려가자, 삭천혁은 검을 뽑은 후 검집을 던졌다.
“위험할 거 같으면 알아서 피하도록. 내 검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다.”
“충고 고맙습니다.”
난 신중한 표정으로 귀혼검을 뽑은 후, 역시 검집을 벗어 성휘에게 던져주었다.
내가 초반부터 내공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자, 주변에서는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 대부분은 내 무위를 보통의 신진고수로 생각했었기에, 놀람과 감탄을 동시에 쏟아냈다.
“간다!”
삭천혁은 패도적인 내공을 검에 실어 내 머리를 쪼갤 듯한 기세로 검을 내리쳤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무시무시한 살초였다.
난 여유 있게 피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공력소모를 최소화했다.
그의 성격, 무공 등을 잘 알고, 극의에 다다른 무공감각을 지녔는데도 불구하고 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삭천혁의 무위는 독보적이었다.
팡. 팡.
캉.
그의 검이 허공을 지를 때마다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바닥을 내리찍자 돌가루가 비산하며 깊게 패였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강력한 살초를 펼쳤지만, 내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하자 삭천혁은 불같이 분노했다.
무조건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기에 반격에 나섰다.
귀혼검은 순식간에 세 개로 늘어나며 그의 가슴과 배를 동시에 노렸다.
변검인데 쾌초였기에 삭천혁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설마 젊은 내가 이런 초식을 펼칠지는 예상치 못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피하지 않고 오히려 검을 뻗어 내 목을 노렸다.
동귀어진의 수법이었다.
“이런. 적호단주! 뭐하는 짓인가?”
양천린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갈문현 역시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난 그의 성정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었다.
이게 동귀어진의 수법으로 보이지만, 절대 아니었다.
현철강기로 내가 펼친 초식을 막으면서 동시에 나의 급소를 공격하는 삭천혁 특유의 저돌적인 공격방식이었다.
난 오른손으로 계속 초식을 펼치면서 왼손을 들어 검지를 그에게로 향했다.
퉁.
퉁.
강력한 지공이 발출되자, 삭천혁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어찌할 틈도 없이 지공은 매우 빠르게 그의 검을 쳐냈고,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카카캉.
쿠쿠쿵.
삭천혁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낭패한 기색이 가득했다.
옷이 찢겨졌는데, 가슴과 배에는 빨갛게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역시 현철강기를 뚫지 못했다.
“다시 해보자.”
“그만.”
어느새 양천린이 나와 삭천혁 사이에 섰다.
“맹주님.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생사비무가 아니잖은가?”
양천린은 엄한 표정으로 삭천혁을 나무라고는 그에게 부드럽게 전음을 날렸다.
-미안하네. 자네에게 부탁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 생각이 짧았어. 이대로 격렬하게 비무가 진행되면 구양천은 중상을 입을 가능성이 커. 경험이 일천한데 어찌 자네의 독한 공격을 계속 버텨내겠는가? 이쯤에서 멈춰주시게. 굳이 신진고수와 싸워 이긴들 무엇을 얻겠는가?
“맹주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삭천혁은 곧장 칼을 거꾸로 쥐고 포권했다.
일단 비무에 들어서면 매우 저돌적인 그였지만, 양천린이 이렇게까지 조언하는데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맹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역시 적호단주님의 현철강기는 명불허전이군요. 도저히 뚫을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검을 거꾸로 쥐고 포권하며 양천린에게 감사를 표했고, 삭천혁의 무위를 칭찬했다.
구경하던 무인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양천린의 언행을 인정한다는 듯 반발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오랜만에 나타난 신진고수가 노회한 적호단주에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번 비무는 무승부로 마감되었고, 세인들에게 구양천이란 이름석자를 확실하게 인식시켜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