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세가 역대급 천재 망나니 2화
2화. 구양천.
눈을 떴다.
여전히 낯선 천장이었다.
정말 꿈일까?
아니면 환상을 겪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중년남성에게 맞은 뒤통수가 얼얼하고 이불의 촉감이 이렇게 선명하다.
그럼 도대체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일단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출렁.
응? 추울렁?
난 불안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냈다.
정말 이게 내 몸이 맞는 걸까?
두툼하게 살이 오른 배가 한눈에 들어왔다.
급히 동경을 찾아 들여다보자, 두툼하게 살이 오른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기겁을 했지만, 애써 의연하게 참았다.
내 몸이 아니다.
다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일단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낡았지만, 운치 있는 장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장원인데?’
정말 장원의 모습이 낯익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하인들이 시큰둥한 정확히 말하면 혐오스러운 물체를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지나갔다.
“일어나셨습니까?”
젊은 무인이 냉정한 표정으로 깍듯하게 예를 올렸다.
처음 보는 이자는 누굴까?
납치한 놈들이 나를 감시하려고 붙여둔 호위인가?
이내 나는 고개를 흔들어 납치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림맹의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6갑자에 이른 나의 내공을 폐쇄하여 납치한 자들이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넨 누군가?”
일단 이 자의 신상부터 파악하기로 마음먹었다.
“성휘(成輝)입니다.”
“성휘?”
“정말 기억을 잃으신 겁니까? 아니면 연기를 하시는 겁니까? 공자께서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가주께 달려가 사죄하십시오. 그런 사고를 쳐놓고 이렇게 책임을 회피하시면 안 됩니다.”
미치고 팔짝 뛴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란 걸 깨달았다.
비정한 무림맹주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책임감 하나로 버텨왔다.
그렇지 않았다면 81살에 무림맹 정예를 이끌고 혈궁과 6개월 동안 지긋지긋한 싸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책임지지 않을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단호한 표정으로 분명하게 말하자, 성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이내 모진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술이 안 깨셨습니까?”
어이없어하는 성휘를 바라보며 나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달라진 얼굴과 몸, 그리고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거처까지.
정말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나?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인가? 그럼 난? 설마 죽었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그럴수록 난 더욱 냉정해졌다.
“내가 누군가?”
난 떨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성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구양세가(歐陽勢家)의 둘째 공자 구양천(歐陽天), 나이는 23살. 더 말할까요?”
“자세히. 알고 있는 대로 말하라.”
“듣기 거북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지금 이 몸을 보는 것보다 더 거북할까? 말하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끝까지 참고 들으마.”
비장한 표정으로 요구하자, 성휘는 내 눈빛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내가 아직도 술이 깨지 않았거나 단순히 연기를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길게 이어지는 성휘의 말을 나는 묵묵히 들었다. 아주 길었는데, 요약하면 간단했다.
구양세가를 좀 먹는 개망나니.
그동안 숱하게 사고를 쳐서 가문의 재산을 탕진했고, 어제는 성월방(盛鉞幇)의 강승주(姜承珠)와 주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그를 두드려 패서 중태에 빠트렸다.
강승주 역시 개차반 같은 놈이었지만, 문제는 그를 반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팼고, 뼈를 부러뜨렸다는 데 있었다.
“왜 팼는지 아는가?”
“그가 검제를 비난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위대한 검제를 배출한 구양세가에 어찌 너 같은···.”
“말하라. 괜찮다. 솔직하게 말해다오.”
“개새끼가 태어났냐고 말했습니다. 아마도 술기운에 나온 말이었겠지요. 강승주는 스스로를 성월방의 개새끼라고 하는 놈이니까요. 하지만 그때 공자께서 발끈하며 무지막지하게 두드려 팼습니다. 가주께서 분노하신 이유도 공자께서 친 사고를 수습하다 지쳤기 때문입니다. 더 할까요?”
“됐다. 듣기 힘들군. 82년의 내 생이 이렇게 부정당하다니.”
난 치욕스러움과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휘는 내가 마지막에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머리가 어떻게···.”
“정상이다. 아주 맑고, 냉정한 판단력 또한 그대로다. 그럼 성월방주는 어찌 했는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성휘는 마치 남 일을 말하는 듯한 나의 냉정한 표정과 말투를 접하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려주었다.
“어제 밤늦게 성월방주 강호충(姜虎忠)이 찾아왔습니다. 가주와 성월방주는 오랜 친분이 있었기에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았고, 가주께서 정중하게 사과하고 치료비를 지불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습니다. 강승주 역시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어서 쉽게 마무리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답답했다.
정말 어떡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책임감으로 평생을 살았고, 타고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 천운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며 무림맹주에 올랐다.
그동안 한 번도 남에게 책잡힐 일을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렇기에 나를 시기하던 자들도 나를 어쩌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이자, 정말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상황이 매우 낯설긴 하지만, 이보다 더 어렵고 힘든 상황도 헤쳐 온 나였다.
“내 검은?”
“잠시 기다리십시오.”
성휘는 사라졌다가 검을 들고 나타났다.
스르릉.
검을 뽑았다.
명검은 아니었지만, 싸구려 검도 아니었다.
그저 괜찮은 검.
다시 그것을 검집에 넣었다.
“나는 어디서 수련했는가?”
“정말 기억을 잃으신 게 맞군요. 아니 마치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습니다.”
“수련한 장소를 물었네.”
“공자께서는 제대로 수련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수련하라고 하면 도망쳤지요.”
빌어먹을.
그래 정말 빌어먹을 이었다.
“그럼 내가 수련할만한 장소를 안내해주게. 계속 이런 몸으로 살 수는 없잖은가? 검제를 배출한 위대한 구양세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따라오십시오.”
성휘는 포권하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가며 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쨍하고 깨질 것 같은 파란 하늘이었다.
‘검제. 자네와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는군. 지금이 상황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자네의 못 다한 꿈을 내가 이뤄주지. 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꿈에 한 번이라도 나타날 것이지.’
성휘가 안내한 곳은 의외로 검제가 수련하던 석실이었다.
“이곳은 검제···할아버지의 석실이 아닌가?”
일단 구양세가의 구양천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기에, 급히 검제에서 할아버지로 정정했다.
“그동안 수련하지 않았기에 달리 공자만의 수련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여 이곳으로 안내했습니다. 가주와 첫째공자의 석실은 따로 있으니까요. 일단 여기서 수련하십시오. 가주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다.”
고맙다는 말에 성휘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포권하고는 물러났다.
‘이 자식은 수하에게 고맙다는 말도 안했단 말인가? 휴우, 당분간은 엄청나게 욕을 먹겠군.’
나는 고개를 흔들고 석실로 들어가 기관을 작동해 문을 닫았다.
일단 불순한 10년의 내공을 정순한 내공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미 무공의 극의를 깨달은 내게 이틀이면 충분했다.
**
내전.
성휘는 곧바로 가주 구양현(歐陽賢)을 찾았다.
“지금 천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구양현은 큰 기대를 하고 물은 게 아니었다.
성휘가 구양천을 전담하고 있으니, 의례 형식상 물은 것이다.
“수련하고 싶다고 하셔서 검제께서 사용하던 석실로 안내했습니다. 허락 받지 않고 그리고 안내해서 죄송합니다.”
“뭐라? 수련하고 싶다고?”
구양현은 검제의 석실이란 말은 듣지도 않고, 구양천이 수련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잘못들은 게 아닌가?”
“공자께서 직접 석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했고, 기관을 작동해 석실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오늘 마치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꼬치꼬치 캐물으시기도 했습니다.”
“연기야. 속지 말게.”
“그러기엔 표정이나 눈빛이 너무 냉정했습니다. 말 한 마디에 힘이 실렸고, 명령할 때는 대종사의 기운 같은···죄송합니다. 말도 안 되는 실언을 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성휘가 곧장 머리를 숙였지만, 구양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검제가 죽고 무림맹의 견제로 구양세가가 몰락하면서 인재가 떠나갔다.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충신 중 한 명이 바로 성휘였다.
아니 구양세가의 제검대를 이끄는 성제(成齊)가 성휘의 부친이었으니, 그를 따라 남은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휘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망나니 구양천의 호위를 맡아달라는 구양현의 부탁에도 성휘는 군말 없이 따랐다.
그런 그가 실언할 리가 없었다.
대종사의 기운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양천이 달라졌다는 뜻이었다.
“지켜보세.”
“알겠습니다.”
성휘가 물러나자, 구양현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시간이 없다. 이놈아. 아버지께서 무림맹주에게 비무에 패해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었지만, 난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자질이 범용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강한 무인이 되지 못함에 분할 뿐이었다. 천아, 네가 이 집안의 희망이다. 왜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났으면서 그리 살았단 말이냐? 제발 정신을 차려라. 제발.”
구양현은 자신의 바람이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시 한 번 구양세가를 일으켜 세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죽어서 부친을 뵐 때, 면목이 설 것이다.
그와 첫째아들 구양수(歐陽修)는 재능이 범용했다.
그렇기에 재능을 타고난 구양천이라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란 희망을 갖고 살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홧병으로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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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제 석실.
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나를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준 독문심법 건곤여의신공을 운용하며, 단전에 있는 10년의 불순한 내공을 조금씩 자극했다.
여러 개의 영약기운이 섞인 내공은 쉽게 섞이지 않고 겉돌았지만, 계속 노력하자 조금씩 융합하기 시작했다.
일주천을 시작했다.
소주천이 아니라 대주천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임독양맥을 타동하고 싶었지만, 10년의 내공과 이런 몸으로는 불가능했다.
대주천을 하자 혈맥이 처음에는 따끔거리더니, 이내 욱신거리는 고통으로 바뀌었다.
완전한 대주천은 불가능했기에 백회혈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했다.
아무리 극의를 깨달았다지만, 이런 내공으로 완전한 대주천은 불가능했다.
그렇더라도 소주천보다는 나았기에 대주천을 운용했다.
‘휴우, 운기조식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군.’
이 구양천은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내 냉정하게 마음을 먹고 고통을 참으며 대주천을 돌렸다.
무려 두 시진이 지났을 무렵에 겨우 대주천을 할 수 있었고, 그제서야 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만약 대주천이 실패했다면 불순한 내공을 정순한 내공으로 바꾸는 일도 실패할 테니까.
대주천의 속도는 점차 빨라졌고, 대주천을 진행할수록 불순한 여러 갈래의 내공은 점차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몰아지경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운기조식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