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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이 총관 모상을 피해 중문으로 황급히 빠져나가던 그 시각.
해천장원 연화심의 집무실에 위응환이 찾아왔다.
연화심은 아버지 연성결의 장원을 삼도상단의 총단으로 두고 자신은 해천장원에 머물고 있었다.
삼도상단 총단은 장무강 등 세 봉공과 초지항과 화천대 등이 지키고 있다.
삼도문이 세상에 알려지며 삼도상단도 나날이 커가고 있어 모두가 분주하다.
특히 삼도표국이 생기며 장무강과 심마백, 위응환 등 세 봉공과 초지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위응환이 주저하다 말했다.
“연 문주,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네.”
위응환은 의외로 상재에 뛰어났다.
위응환은 삼도상단의 봉공으로 부단주 역할을 맡고 있다.
연화심이 아, 하고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연화심은 천황성 중양대전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군웅각 고수가 던진 비도를 가슴에 맞고 죽을 뻔한 위응환이 깨어나자 서신의 당종이 길길이 날뛰었다.
“이놈! 그렇다고 말없이 가출을 해!”
위응환이 사실은 당종의 막내아들로 아픈 손가락이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부자지간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나 보다.
당종이 버럭, 화를 내는데도 위응환은 묵묵히 대꾸하지 않았다.
연화심은 그제야 당종이 나타날 때마다 위응환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중양대전에도 가면을 쓰고 참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당가로 끌고 가서 가법을 집행하겠다는 당종.
“애비 말을 거역하는 자식은 필요 없다. 그냥 죽어라!”
당종은 심지어 중상을 입은 위응환을 치료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환생단은 꼬박꼬박 챙겨 먹였다.
영문을 모르는 장무강과 심마백이 나서서 손이 발이 되도록 사정을 했다.
강소군까지 나서자 당종이 한발 물러섰다.
그제야 치료를 해주면서 약속을 받아냈다.
“좋다. 일 년 안으로 당가타로 돌아와라. 이번에도 애비의 말을 무시한다면 그때는 정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위응환, 아니 당응환은 당종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당가타로 가려는 것이다.
“아니, 꼭 그 약속 때문만은 아니네.”
당응환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조카딸이 아들을 낳았다는데 숙부가 되어 한 번도 보지 못해서….”
“아, 그렇지요. 우화 언니와 불취 형부 소식이 궁금하기는 하네요.”
일전에 불취와 당우화의 득남 소식을 듣고 선물을 보내기는 했다.
당응환이 말을 이었다.
“당가타를 들렀다가 운남 칠독문을 다녀올 생각이네.”
“칠독문이요?”
“강 공자가 장 장군에게 서신을 전해 달라더군.”
“서신을요?”
장선백은 우완청과 함께 운남으로 돌아갔다.
젊은 황제는 장 대장군가의 누명을 벗겨 주고 다시 호국대장군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장선백에게 변방 대장군의 자리를 맡아 달라 했으나 장선백이 고사하였다.
‘자식의 도리부터 먼저 하고자 합니다. 조부와 부친의 유해를 선산에 모시고 난 뒤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선백은 우완청과 함께 아버지 장 대장군의 유해가 있는 운남으로 돌아갔는데 이후로 소식이 없었다.
언젠가 지난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연화심이 장선백의 소식이 없음을 거론하자 강소군이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올 것이오. 그 집안은 타고난 무골이요. 그 핏줄이 어디 가겠소?’
‘내 앞에서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궁금했나 보구나. 굳이 당 봉공을 통해 서신까지 보내는 걸 보면.’
연화심이 미루어 짐작하였다.
그동안 지켜본 연화심이 보기에 강소군은 세상에 초연한 듯 무심하고 심지어 냉랭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알고 보면 무척 세심하고 자상한 인간이었다.
당응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침 상단에서도 구해야 할 약재가 있어 이참에 칠독문과 정식으로 교류를 할 생각이네. 겸사겸사 다녀올 곳이 많으니 꽤 시간이 걸릴 걸세.”
“화천대원 몇 명을 추려 함께 가시지요.”
연화심이 화천대원 네 사람을 붙여 당응환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해천장원이 바닷가 외진 언덕에 있으나 제법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당응환이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손님이 찾아왔다.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남궁세가에서?”
연화심이 객청으로 나가서 맞았다.
“올 시월 중순에 아가씨께서 혼인을 하십니다. 검신 대협과 연 문주님을 모시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남궁세가에서 온 자가 청첩장을 꺼내 공손하게 전했다.
남궁령이 청첩장을 열어 보려는데 이번에는 팽가에서 사람이 왔다고 했다.
팽가에서 온 무인 역시 청첩장을 지니고 왔다.
‘하긴 팽일소와 남궁령의 혼인이니 양쪽에서 보내오는 게 맞지.’
강호 대파는 서서히 우열이 드러나며 구대문파로 굳어져 가고 있다.
여러 세가 또한 성쇠가 갈리며 오대세가가 명성을 떨치고 있다.
오대세가 가운데 팽가와 남궁세가의 혼인이니 강호가 떠들썩할 것이다.
‘힝….’
연화심은 두 세가에서 보낸 청첩장을 보니 심사가 꼬였다.
‘바닷가 언덕에 있어 풍광이 좋소.’
강소군의 권유에 따라 해천장원에 들어와 산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런데 강소군은 혼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다.
장무강 등도 궁금해하는 중이다.
“…?”
연화심은 집무실 탁자 서랍에 청첩장을 넣으려다가 아직 봉인하지 않은 서신이 있는 걸 보았다.
「장선백 전.」
강소군의 필체였다.
‘이게 당 봉공이 말한 서신인가? 이게 왜 여기 있지?’
연화심은 무심코 봉투를 열어 서신을 펼쳐 보았다.
서신을 읽는 연화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렇게 깜찍한….’
서신은 장선백을 해천장원으로 초대할 터이니 연화심과 자신의 중매를 서라는 내용이었다.
강소군은 확실히 권문세가의 일족이었다.
권문세가의 혼인은 중간에 중신을 서는 사람이 오가며 양쪽을 조율한다.
‘이걸 나 보라고 둔 거야, 뭐야.’
처음으로 강소군이 능구렁이라는 생각이 든 연화심이었다.
***
-땡그랑.
산사의 처마에 달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냈다.
조운룡은 법당 한쪽에 세워둔 스승 우문극과 사형 염기창의 위패에 분향을 하고 절을 하였다.
“스승님, 이제 화룡문은 산동의 패자입니다. 스승님의 염원이 이뤄졌습니다.”
조운룡이 우문극의 위패를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천황성 중양대전에서 화룡문은 맹활약을 했다.
화룡문주 조운룡은 이제 도왕으로 칭해지고 십이도객과 백대고수 역시 강호 최고의 무력으로 꼽힌다.
조운룡은 산동으로 돌아와 화룡문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있는 중이다.
화룡문에 입문하고자 하는 문도들이 줄을 서고 있다.
-땡그랑!
당시 풍경의 맑은 음이 퍼질 때 한쪽에서 가사를 입은 여승이 나타났다.
‘신녀….’
조운룡이 속으로 신녀라 부른 여승. 이제는 묘연이라 불리는 장영영이었다.
“많은 공물을 가져오셨더군요. 매번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여승 묘연은 올 때마다 크게 시주를 하는 조운룡에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사형, 신녀의 도가 한층 높아진 것 같군요.’
조운룡은 묘연의 맑은 눈빛과 고요한 거동을 보며 사형 염기창을 떠올렸다.
묘연은 출가를 하였으나 혈육의 정마저 잊지는 못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장선백이 돌아와 가문의 누명을 벗기고 자신을 찾아왔다.
비록 속세를 떠났으나 오라비가 다녀간 뒤 묘연은 확연히 밝아졌다.
불모의 제자로 도룡회의 신녀였던 묘연은 조운룡 등으로부터 받은 시주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 주었기에 산동 근방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조운룡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당분간 오지 못할 것 같아 이참에 많이 가져왔습니다.”
“…?”
“강호의 일입니다. 아무래도 큰 싸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묘연이 탄식하듯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손을 쓰실 때 부디 중생의 목숨을 한 번 더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죽을 놈은 죽어야 합니다. 그게 중생을 위하는 길이지요.”
묘연은 늘 그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라고 했으나 조운룡은 천하창생을 위해 나쁜 놈들은 다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묘연은 말없이 불호만 외웠다.
***
개봉.
개방 총타 뒤쪽에 있는 후개를 위한 연무장.
“아이고, 허리가 끊어지겠네.”
소걸아가 타구봉을 휘두르다 허리를 두드렸다.
소걸아는 당대 후개가 되었다.
후개로서 감당해야 할 수련은 혹독했다.
개방 제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대부분 무공이 약했다.
그랬기에 방주와 호법, 장로, 그리고 후개 등 요직에 있는 자들의 무공이라도 강해야 한다는 게 현 방주의 뜻이었다.
소걸아는 눈만 뜨면 수련을 해야했다.
“남경 개천이 그립구나.”
남경의 화려함에 익숙한 소걸아는 오래된 고도 개봉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연무장으로 젊은 거지 하나가 달려왔다.
“후개, 비상이에요.”
“비상?”
“의천맹과 흑천맹이 한판 붙는데요.”
“오오! 드디어? 크하하하. 영웅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 도래하는구나!”
“방주께서 어서 오시래요.”
“크하하하. 좋아, 좋아! 후개가 간다!”
소걸아가 신이 나서 뛰어갔다.
***
죽립을 쓴 강소군은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서 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걸 보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에 물비늘이 하얗게 번뜩이고 있었다.
뒤쪽 십여 장 떨어진 언덕 그늘에 초하경과 초하란 남매가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장 대장군가가 복권되며 자신들의 성을 되찾았다.
“강태공이 되시려고 저러는 걸까?”
초하경이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쉿, 오라버니는 주군께서 못 들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초하란이 전음을 보내 주의를 주었다.
“아니, 들으시라고 한 거다. 너무 심심하잖아?”
두 사람은 원래 장 장군부의 무장들이었다. 아직은 패기 넘치는 나이들이다.
은퇴한 고관처럼 바닷가에서 유유자적 지내려니 답답했다.
검이 녹슬고 있다.
‘황제가 그토록 애원하는데 한 번쯤 들어줄 만도 하지 않나?’
초하경은 황제가 몇 차례나 사신을 보내 조정에 들라는 명을 내린 걸로 안다.
강소군은 그때마다 묵묵부답이었다.
나중에 온 사신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였다.
“이대로 돌아가면 제가 죽습니다. 반드시 모시고 오라는 황명입니다.”
황제는 직접 쓴 서신까지 보냈다.
「나는 네 마음을 안다. 네가 소군이라는 가명을 쓴 것은 여전히 황실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
조정에 사람은 많으나 믿을 만한 자는……」
황제의 편지는 구구절절 길었으나 요지는 와서 자신의 곁을 보좌해 달라는 뜻이다.
소군.
소군이라면 황실의 방계, 왕의 딸들을 부르는 칭호다.
강소군은 자신이 핏빛 독무의 기운에 휩싸여 천하를 떠돌 때 무심코 소군이라는 칭호를 썼다.
‘휘아는 계집애처럼 예쁘구나. 그러니 소군이라고 부르자.’
‘싫어요.’
‘원래 귀한 손은 여자 이름을 붙이고 그러는 거란다. 강소군, 이 할미가 너를 위해 붙여준 이름이 왜 싫단 말이냐?’
그가 어려서 황궁에서 살 때 노태후는 놀리듯 그를 소군이라 불렀다.
그때 황제도 함께 자라다시피 했기에 그걸 안다.
그렇기에 굳이 이를 들춰 가며 강소군의 마음을 움직이려 든 것이다.
강소군이 옛 생각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많이 잡았어요?”
연화심은 강소군이 장선백에게 보낸 서신을 읽고는 앉아서 기다릴 수만 없었다.
연화심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가고 바다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새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아니, 못 잡았….”
강소군이 말하는데 연화심이 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
가벼운 입맞춤.
그리고 이어진 긴 입맞춤.
강소군이 당황했다.
초하경과 초하란 남매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붉은 노을에 바다가 불타듯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