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249화 (2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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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성은 사라졌으나 무림이 입은 피해는 컸다.

세월은 무심하여 일 년여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천황성 중양대전은 점차 잊혀 갔다.

그리고 새로운 전운이 감돌았다.

***

객잔 낡은 문 처마에 달린 거미줄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먼 길을 온 듯 낡고 헤진 옷차림의 사내가 거미줄을 보다 허리에 찬 도를 들어 걷어냈다.

열린 문에 드리워진 주렴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저녁거리로 만든 음식 냄새가 주린 배를 자극했다.

하지만 사내는 차마 들어서지 못했다.

그때, 객잔 작은 반점 구석에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 노대, 손자 왔어.”

화양객잔의 늙은 주인 장 노대가 황급히 달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장웅이 재빨리 몸을 돌려 가려는 순간,

“웅아! 이놈아!”

장 노대는 자신이 평생 모은 은자를 가지고 도주하였던 손자를 애타게 불렀다.

장웅이 돌아섰다.

“할아버지!”

“잘 왔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해.”

장 노대가 장웅을 끌어당기며 몸을 살폈다. 어디 상한 곳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본 것이다.

다행이 장웅은 멀쩡했다.

하지만 노이칠은 장 노대와 들어서는 장웅을 보며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장웅의 눈빛.

그건 죽어 가는 마음처럼 휑했다.

“애송이, 용케도 살아왔구나.”

노이칠은 강소군과 장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걸 떠올리며 한마디 하였다.

초저녁부터 마신 노이칠의 얼굴이 벌겋다.

장웅이 노이칠 앞에 서서 포권을 하였다.

“비룡방 철경대 조장 장웅이 정무문 노 봉공을 뵙습니다.”

“…!”

노이칠이 흠칫, 놀랐다.

장웅이 자신을 알아본 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비룡방은 요즘 장강 일대에서 잘나가는 흑도문파였다.

“결국 죽고 죽이는 드잡이의 길로 들어섰구나.”

장 노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손자에게 물었다.

“저녁 아직 안 먹었지?”

“할아버지의 볶음면이 먹고 싶군요.”

장웅이 말했다.

장 노대는 어딘가 모르게 의젓해진 손자가 낯설었다. 그리고 뿌듯했다.

“암. 해 주지. 손자가 해 달라는데….”

장웅이 노이칠 앞에 앉았다.

“내 앞에 앉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내 손자에게 강짜부리지 말게.”

장 노대는 들어가다 말고 선반에서 술병을 가져다 장웅 앞에 놓았다.

“술 한잔하고 있거라.”

장웅은 도를 의자 옆에 기대어 놓았다. 언제든 뽑을 수 있는 위치다.

“제법 강호인답군.”

장웅은 집에 돌아와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어쩌면 예전에 노이칠에게 당한 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대담하게 노이칠과 마주한 것은 적이든 친구든 눈앞에 있어야 한다는 강호의 철칙을 따른 것이다.

노이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룡방의 조장이라고?”

“운이 좋았습니다.”

평민은 자신이 사는 곳을 함부로 떠날 수 없다.

사는 곳을 떠나 다른 일을 하기가 무척 어렵다.

상인이 되지 않으면 장웅처럼 흑도의 무리에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다.

비룡방 조장이면 꽤 성공한 축에 든다.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그래, 만족하나?”

“…후회는 없습니다.”

장웅이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 집 떠난 이후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의 당혹감. 그러나 어느 순간 살상이 무감각해지고.

최근 그는 지기를 죽여야 했다. 몸담을 곳을 찾아 떠돌다 수적을 만나 죽을 뻔한 그를 구해 주고 비룡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한 친구였다.

방의 물자를 빼돌렸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추살령이 내려졌다.

장웅은 우정을 내세워 그를 유인하고 심장을 찔러 죽였다.

그 대가로 조장이 되었다.

이후로 한동안 밤마다 꿈에서 지기의 원혼을 만나야 했다.

장웅은 지금 자신이 사는 삶이 진정 원했던 것인지 회의가 일었다.

중원을 종횡하는 무림의 영웅을 꿈궜던 젊은이는 불과 몇 년 만에 길을 잃은 살인자가 되었을 뿐이다.

노이칠은 장웅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처음 강호에 출도한 많은 무림인들이 겪는 일이다.

그러나 해 줄 말이 없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스스로 책임을 지는 수밖에.

설령 그게 목숨을 내놓는 일이 되더라도 말이다.

장웅이 미련을 떨치려는 듯 술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볶음면을 가져오던 장 노대가 불안한 눈빛으로 손자를 보았다.

장웅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볶음면은 다음에 와서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일을 하러 왔다가 잠시 짬을 내어 들른 것인데 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장웅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더니 품에서 전낭을 꺼내 쥐여 주었다.

“그간 모은 겁니다. 이제 객잔 그만두시고 좀 편히 지내세요.”

전낭에는 장웅이 훔쳐갔던 돈의 몇 배나 되는 은자가 담겨 있었다.

장 노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전낭의 무게에서 장웅이 흘렸을 피와 땀이 느낄 수 있었다.

장 노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받아 넣었다.

“이제 할애비 걱정은 마라. 할애비는 늘 여기에 있을 터이니 언제든 오거라.”

장웅이 나가자 장 노대는 빈 의자에 털석, 주저앉았다.

탁자에 놓인 복음면이 덩그러니 놓여 식어 갔다.

“나나 주시오.”

“안 돼! 이건 손자가 먹을 것이네.”

장 노대는 장웅이 반드시 돌아와 볶음면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 주방으로 가서 남은 볶음면을 가져다 노이칠에게 주었다.

‘장웅이 볶음면을 먹으러 올 수 있을까?’

노이칠은 비룡방이 왜 신양에 나타났는지 안다.

비룡방은 흑천맹 산하.

흑천맹주 고장추는 의천맹과 무한이남 장강의 패권을 두고 한판 벌일 참이다.

장웅은 비룡방 철경대의 조장으로 일선에 투입된 모양이다.

노이칠은 승패를 떠나 장웅이 돌아와 볶음면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꿈을 이룬다에 이 잔을 걸겠습니다.’

장웅이 객잔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강소군이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 험악한 세상이지 않나. 검신?’

노이칠은 속으로 대답하고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천하사패의 시절이나 오대천왕의 세상이나 싸움이 끊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니까.’

천황성 중양대전 혈전 이후 오대천왕이 등장하였다.

의천맹주 검왕 남궁악

흑천맹주 묵왕 고장추

천무방주 지왕 구양수

화룡문주 도왕 조운룡

그리고 정무문 무왕 중랑

비천신검 상관무영이 무당산에 은거한 뒤 더 이상 십대고수를 칭하는 이가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오대천왕의 명성만 귀따갑게 들린다.

한 팔을 잃은 철권호는 의천맹주에서 물러나 부인과 함께 은거하였다.

“한 팔을 잃은 권사는 제 구실하기 어렵지만 검객은 그렇지 않지. 자네가 맡아 주게.”

철권호는 검왕 남궁악에게 의천맹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의천맹주 남궁악과 흑천맹주 고장추의 담판이 결렬되고 전운이 감돌고 있다.

정무문의 봉공 노이칠은 여전히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세상을 떠돌고 있다.

-촤르륵!

주렴이 걷히며 가녀린 신형이 들어섰다.

검은 면사로 눈 아래를 가린 여인이 들어오더니 노이칠 앞에 앉았다.

장 노대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

“식사를 하실 겁니까?”

여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간단한 안주와 술을 주세요.”

“너는 술도 못하면서 번번이 나를 취하게 만들 셈이냐?”

노이칠이 좋으면서도 투덜거렸다.

여인은 하오문의 초연이었다.

노이칠은 대정무각이 정무문으로 탈바꿈한 뒤 관과 결탁한 정보망도 해체하였다.

그러다 보니 하오문의 도움을 자주 받는 편이다.

“낙서생은 아직 골골대고 있나?”

“여전히 번잡한 세상을 헤매시는 누구와 달리 속세를 떠나 청빈한 삶에 만족하고 계시죠.”

노이칠과 초연은 몇 차례 만나며 흉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노이칠은 정보를 얻고 초연은 정무문이라는 뒷배가 생겨서 좋았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니 이리 한적한 객잔에서 은밀히 만나곤 했다.

“놀라운 정보가 있어요.”

“뭐가?”

초연이 손을 내밀었다. 말을 들으려면 돈을 치르라는 것이다.

“들어 보고.”

“안 돼요. 저번에도 떼먹었잖아요. 은 백 냥입니다.”

“그런 거금을 들일 정보가 있단 말인가?”

“아쉬운 쪽에게는 천금도 아깝지 않을 정보일 텐데요?”

“으흠. 어째 너는 갈수록 전귀(錢鬼)가 되어 가는 것 같으냐? 그러다 시집 못 간다.”

노이칠이 투덜대면서도 전표를 꺼내 건네주었다.

“흑천맹과 천무방이 동맹을 맺었습니다.”

“뭐? 고장추와 구양수가 앙숙인데 동맹을 맺다니? 뭐, 잘못된 정보 아냐?”

“두 사람이 은밀히 만나 직접 문서를 쓰고 수결까지 맺었답니다.”

“으흠.”

앙숙이었던 흑천맹과 천무방이 동맹을 맺었다면 의천맹으로서는 큰일이다.

흑천맹은 남쪽, 천무방은 북쪽이니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는다.

더욱이 의천맹은 천무방을 우호세력으로 여기고 있다.

비록 의천맹에서 탈퇴하기는 했지만 천무방이 한때 의천맹에 있었고 함께 천황성과 대적해 싸운 걸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흑천맹과 손을 잡고 의천맹의 뒤통수를 친다?

“구양수답군.”

노이칠이 혀를 찼다.

“아무튼 그게 은자 백 냥이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단순히 말만 믿고 어떻게….”

초연이 품에서 문서를 꺼냈다.

“이게 두 사람의 수결을 배접해서 뜬 것입니다.”

“….”

노이칠이 혀를 내둘렀다.

흑천맹주와 천무방주가 은밀히 체결한 문서를 배접해서 떠오다니.

겁도 없는 하오문이다.

“단, 출처는 저희가 아닙니다.”

“당연한 걸 왜 묻나.”

밤이 이슥해질 무렵 초연이 떠났다.

노이칠은 배접을 뜬 문서를 다시 읽어 보고는 잘 접어 봉인하였다.

“천승아!”

노이칠이 부르자 흑의를 입은 경천승이 들어왔다.

노이칠이 봉인한 문서를 건넸다.

“중 문주에게 지급으로 보내라.”

중랑은 남경 인근 정무문에서 머물며 무인을 양성하고 있는 중이다.

정무문은 중원 동남부 일대의 패자였다. 중랑은 복건까지 영역을 넓혀 암중으로 삼도상단을 비호하고 있다.

경천승이 사라지자 노이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객방으로 들어가려고 마당을 지나다 밤하늘을 보았다.

천황성 중양대전이 끝난 뒤 꼭 일 년이 지났다.

잠시 평온했던 세상이 다시 시끄러워진다.

그러니 자연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검신은 어찌 사나? 기어이 복건까지 가야 얼굴을 보여 줄 참인가?’

***

복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장원이 한 채 서 있다.

해천장원.

복건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들어선 장원의 주인을 궁금해하였다.

젊은 주인은 학자와 같이 보였고 안주인은 상인이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한참 후에야 주인이 남경부의 권문세가였는데 조정의 번잡함을 피해 낙향하였다는 게 알려진 후 관심이 끊어졌다.

하지만 무림의 몇몇 사람은 안다.

해천장원에 검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파팟.

장원 뒤쪽 아담한 연무장.

소년이 진검을 휘두르고 있는데 제법 기세가 날카롭다.

천성육십사식,

소년은 진연초의 아들 진연이었다.

진연이 수차례 되풀이하여 검법을 펼친 후 멈춰 서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내력이 끊길까?”

그때 뒤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며 말했다.

“아직 기혈이 완전히 열리지 않아서 그렇다. 대연의결의 성취가 검법을 받쳐 주지 못하고 있는 게지.”

“아, 사부님!”

진연이 반색하였다.

기다란 낚시대와 물고기 바구니를 들고 온 이는 강소군이었다.

강소군은 요즘 강과 바다가 만나는 어귀에서 낚시를 하는데 맛이 들렸는지 자주 나간다.

“조바심을 내지 마라. 대연의결은 조바심으로 얻을 수 있는 내공이 아니니까.”

진연은 한시바삐 무공을 익히고 싶어 했다.

아버지의 원수는 갚았으나 힘이 없으면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으니 그럴만했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지켜야 할 동생이 있었다.

“네. 명심한다고 하는데 잘 안 되네요.”

진연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마음대로 된다면 천하 모든 이가 절대고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저 과정이라 여겨라.”

저 멀리서 총관 모상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자 강소군이 황급히 말을 끊고 중문으로 나갔다.

총관 모상은 유일하게 강소군에게 잔소리할 수 있는 인물이다.

강소군이 낚시에 빠진 걸 두고 그렇지 않아도 자꾸 뭐라고 하니 재빨리 피한 것이다.

‘하하. 사부님도 피하는 사람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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