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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호법을 서라!”
천주가 땅으로 내려오더니 선 채로 운기조식에 들었다.
수많은 영력을 취했으니 정화해야 할 시간이 필요했다.
현가가 천주의 앞에 섰다.
***
-쾅!
수라팔황검과 고장추의 도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고장추의 전신은 피투성이였고 옷은 넝마조각처럼 너덜너덜하였다.
그러나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고장추가 다시 도를 베어 갔다.
두 사람은 묵묵히 싸웠다.
강기와 같은 필살기도 쓰지 않았다. 검으로 찌르면 도로 막고, 도로 베려 들면 검으로 걷어냈다.
마치 신들린 듯 찌르고 베었다.
허공에 날아올라 겨루다 땅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서로 회전하면 연타를 날리기도 했다.
그 사이 십이호법은 절반이 죽고 여섯이 남았다.
두 사람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호법들은 이제 끼어들 수조차 없었다.
그저 주위를 빙빙 돌며 검제의 빈틈을 노릴 뿐이다.
고장추는 검제와 싸우며 자신이 묵영신공을 대성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절대지경에 든 이후는 깨달음이 더욱 중요한데 고장추는 그게 부족했다.
아버지와 사매 조비연의 원한을 갚는다는 집념이 오히려 장애물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검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주의 뒤를 이어 천황성을 차지하겠다는 욕망이 생사경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치열하게 격전을 벌이다 황당하게도 무아지경에 들었다.
절대지경의 고수들이 성취가 더딘 것은 그들이 절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까지 몰아붙였을 때 비로소 얻는 바가 있는데 그럴 상대가 없으니 여간해서는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다.
그렇기에 비천신검 상관무영이 현치자를 찾아 초식을 겨뤘던 것이다.
-쾅!
고장추와 검제가 다시 격돌하였다.
‘…!’
지켜보던 호법들의 눈이 빛났다.
고장추의 도가 처음으로 검제의 옷자락을 갈랐던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어느 순간, 검제가 먼저 무아지경에서 깨어났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었다.
고장추는 여전히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을 돌보지 않고 싸웠다.
반면 검제는 전황을 살피고, 천주가 군웅각 고수들의 영력을 뽑는 걸 봤다.
생령의 영력을 뽑아 취하는 끔찍한 광경에 검제의 심력이 흔들렸다.
늘 두려워했던 일이기에 누구보다도 충격이 컸다.
천주가 군웅각 고수들에게 취한 영력을 정화하기 위해 운기조식에 들어갔기에 검제는 온전히 그 자신의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적을 제거하라는 천주의 명을 따르기는 했지만.
그러다 보니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끄떡 않는 고장추에게 질리고 말았다.
묵영신공으로 인해 온몸이 단단해진 고장추다.
여느 고수 같으면 관통하고도 남았을 검제의 일검에도 생채기 같은 흔적만 남았다.
‘지독한 놈!’
검제는 삼황오제도 아닌 자와 싸우며 이렇게 고전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아니, 고장추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았다.
막강한 내공을 지닌 고장추였다.
거기에 검제의 수라팔황검과 겨루며 묵영신공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맹주께서 득의를 얻으신 것 같구나!’
호법들은 자신들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에 진심으로 고장추를 응원하였다.
팽팽했던 균형이 깨지고 한 번 추가 기우니 고장추의 도세가 더욱 거칠어졌다.
‘이러다 정말 패할지도 모르겠다! 끝을 봐야겠구나!’
검제의 등 뒤에서 다시 여섯 개의 팔이 나왔다.
무형의 강기로 이뤄진 필살기.
-쿠오오오오.
여섯 개의 팔이 회전하자 검제의 주위로 돌풍이 일었다.
고장추가 한 발 물러나더니 무심한 눈빛으로 검제와 돌풍을 바라봤다.
그는 아직도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상대가 상승절학으로 나오자 그 역시 본능적으로 묵영신공을 십성까지 끌어올렸다.
고장추의 전신이 점차 묵빛으로 물들어 갔다.
“오! 드디어 대성하셨구나!”
새까맣게 물드는 고장추의 전신.
검제의 주위를 맴도는 돌풍도 더욱 빨라졌다.
여섯 개의 팔이 휘두르는 강기의 검이 돌풍 속에서 번득였다.
“죽어랏!”
돌풍 속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쉬이이이익!
돌풍이 마치 불길처럼 쭉 뻗어 고장추를 덮쳤다.
“크아아아아아!”
고장추가 고함을 지르며 돌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앗! 맹주님!”
“위험해!”
호법들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
고장추가 묵영신공을 대성한 건 알았지만 검제가 펼친 돌풍이 그냥 바람이 아니라 강기로 형성된 것임을 알기에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
놀랍게도 고장추가 도를 앞세우고 돌풍을 가르며 돌진하였다.
마치 멧돼지가 돌진하듯 거침없는 기세였다.
-까가가강!
고장추가 앞세운 도에서 묵빛 강기가 퍼져 나와 검제의 검들을 튕겨 냈다.
연달아 부딪치는 검제의 검에 고장추의 도 역시 쉼 없이 흔들리고 이가 빠져나가기도 했다.
“크아아아아아!”
고장추가 다시 고함을 지르며 검제에게 다가가 거침없이 도를 그었다.
-울렁!
단순히 도를 내려쳤을 뿐인데 허공이 울렁거린 듯했다.
강기의 폭풍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윽!”
검제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졌다.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수라팔황검으로 형성한 강기의 폭풍을 뚫고 나와서 도를 그어 내리다니.
피하고자 했으나 마치 고장추와 일체가 된 듯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검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쩍!
검제의 머리가 사선으로 그어지더니 잘린 쪽이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오! 맹주님이 검제를 해치웠다!”
“흑천맹 삼천맹도의 원한을 갚았다!”
호법들이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멀리서 이쪽을 지켜만 보던 홍의발과 흑천맹도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뿜었다.
“맹주님 만세!”
“흑천맹 만세!”
***
제갈선은 우뚝 서서 선정에 든 천주를 노려보았다.
그의 앞에는 촌로처럼 보이는 늙은이가 서 있었고, 그 앞에 군웅각 고수 셋이 버티고 있었다.
군웅각 고수들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공허했으나 여전히 엄청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인데!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인데!’
무슨 짓인지 몰라도 천주가 군웅각 고수들의 기운을 취하고 선정에 들었다.
깨어나면 더욱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것이다.
제갈선이 의천맹을 돌아봤다.
군웅각과 보령호신환을 복용한 고수들과 격전을 치른 의천맹은 멀쩡한 자가 많지 않았다.
대정무각의 각주들, 그러니까 정무문의 봉공들도 부상을 입은 듯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제갈선이 남궁악과 중랑, 조운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 천주를 해치워야 하는데 가능하겠소?
중랑과 조운룡은 내공이 바닥났으나 그나마 자신들 외에 성한 자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서서히 다가가자 연화심과 산동삼호도 뒤를 따랐다.
철권호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맹주님은 부상이 심하시니 조식을 하는 편이….”
철권호는 팔을 잃고 피를 많이 흘려 낯빛이 창백하다.
당종이 제조한 요상환을 먹었으나 거동조차 불편할 것인데 싸우겠다고 나섰다.
철권호가 고개를 저으며 들판을 보았다.
재야무림인들이 있던 곳은 제대로 서 있는 자가 몇 안 되었다.
의천맹이나 흑천맹 역시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남은 이들 대부분도 부상을 입고 비틀거리고 있다.
“천황성을 상대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죽었네. 나 하나 더 죽는 건 대수가 아니네. 저자를 이 자리에서 죽이지 못하면 어떻게 하늘을 보고 살 수 있겠나?”
수많은 맹도들의 죽음에 철권호는 마음이 더없이 무거웠다.
***
“자식을 둘이나 먼저 보냈는데… 이제 너 하나라도 지켰으니… 아비 노릇은 한 게 아니냐….”
구연강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한때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종횡무진했던 효웅 구연강이 죽어 가고 있었다.
“이런 죽음일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크흐흐흐!”
구양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도는 걸 느끼고 당황했다.
아버지와 부자지간의 정이란 게 있었던가? 오죽했으면 몇 달을 마비시켰을까.
그런데 아버지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죽어 가니 까마득한 어린 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던.
***
대여섯 살 즈음이었을까?
어려서는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했다. 한창 천무방이 뻗어 나가던 시절, 구연강은 밖에서 살다시피 했으니까.
돌아와도 집무실에서 사람들을 만나느라 분주했다.
근데 그날은 달랐다.
내전에서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침상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그를 불렀다.
아버지는 큰 부상을 입고 내전에서 치료 중이었을 것이다.
피 냄새와 약 냄새 때문에 주저하던 그에게 구연강이 손짓하였다.
“이리 와라! 구가의 후손이 피 냄새를 두려워하다니!”
그가 다가가자 구연강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양수야. 너는 천무방 구연강의 아들이다. 담대해야지! 천하의 주인이 되면 너희 형제들이 아버지를 도와주어야 한다.”
구양수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아주 희미한 기억이었다.
***
“이놈이… 그렇게 말해도… 사내놈이 눈물을 흘리다니….”
“누가 운다고 그럽니까? 벽력탄 화약이 눈에 들어가 눈물이 나는 것뿐입니다.”
구양수가 말했다. 구연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좋구나… 자식 품에서 죽을 수 있다니….”
그 말을 끝으로 구연강이 숨을 거뒀다.
“태상 방주님!”
천무방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빠드득.
구양수가 이를 갈며 아버지를 안고 일어났다.
“모셔라!”
신검대원 몇이 나와 구연강의 시신을 받아 들고는 뒤로 빠졌다.
“벽력탄, 가져와!”
“그, 그게… 다 썼습니다.”
“뭐라고?”
천주가 무형검을 내리쳐 구연강과 구양수를 노리자 천무방도들이 화승총탄과 벽력탄을 죄다 소모한 것이다.
“이, 이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나 탓할 수도 없었다.
“신무, 참룡. 대오를 갖춰라! 저놈과 결판낸다!”
“충!”
주항과 평해가 앞장섰다.
들판에서 유일하게 그나마 전력이 남아 있는 세력은 천무방뿐이었다.
***
싸움이 끝나자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의천맹뿐만 아니라 흑천맹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도 모여들었다.
흑백 양도가 이리 가까이 서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지옥의 혈전을 치른 이들의 눈은 분노로 타올랐다.
눈앞에서 사부나 제자, 동료를 잃었기에 천황성에 대한 원한은 극에 달했다.
대부분 부상을 입었으나 당장이라도 밀고 들어갈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버티고 있는 군웅각 고수들이 흘리는 기세는 여전히 강맹하였다.
그들은 절검처럼 군웅각 고수들의 상위에 있는 자들이었다. 격전을 치렀건만 그다지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제갈선은 고수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뭐 하는 건가! 빨리 해치우지 않고.”
고장추가 여섯 남은 호법들과 달려왔다.
넝마가 되다시피 한 상의를 아예 벗어 버렸기에 그의 우람한 근육질 상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홍의발이 재빨리 나가 흑의장포를 내밀었다.
고장추가 장포를 걸치며 말했다.
“저놈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건가? 내가 끝내주지.”
고장추도 천주의 무서움만은 인정했다.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 틈에 공격을 할 생각이었다.
고장추가 도를 들고 나서자 군웅각 고수들 뒤에 있던 현가가 피식, 웃었다.
“네깟 놈들이 아무리 모여 봐야 헛것이다. 조용히 기다렸다가 주군의 처분을 기다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때,
천황성이 있는 봉우리 쪽에서 굉음이 터졌다.
“저게 뭐지?”
천황성 성채 위로 빛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