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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아버지!’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흠칫, 놀랐다.
구양수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검을 깨뜨리는 건 대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위기의 순간 펼치는 구명절초.
그런데 구연강이 처음부터 검을 깨고 나왔다.
-파아악!
깨진 검날이 천주를 향해 쏘아져 갔다.
-파아앙!
뒤이어 천수무흔 구연강의 신형이 사라지고 하늘에 무수한 손 그림자와 함께 강기의 비가 내렸다.
실로 놀라운 무위였다.
‘천수무흔의 경지가 저 정도였다니!’
‘과연 십대고수! 상관무영과 수위를 다툴 만하구나!’
지켜보는 이들은 구연강의 절초에 가슴이 진탕함을 느꼈다.
하지만 구양수는 불길함을 이기지 못하고 벽력탄에 불을 붙였다.
구연강이 스스로 깬 검의 파편이 천주를 향해 날아갔다.
하늘을 뒤덮은 손 그림자에서 쏟아져 나온 강기의 비가 파편 하나하나를 쳤다.
그러면서 깨진 파편이 무리를 지어 천주의 앞에 당도하였다.
파편 하나가 실체를 지닌 강기의 검이고 그 검들이 모여 더욱 큰 검의 형태를 이뤘다.
“오!”
보는 이들이 감탄성을 흘렸다. 역발상으로 파괴력을 극대화한 한 수였다.
천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검결지를 연달아 세 번 꼬았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서 무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검에 입문할 때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손가락 두 개를 뻗어 검결지를 맺는다.
어떤 문파에서는 검결지에 기를 불어넣어 공격을 하기도 한다.
고수는 검결지로 검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천주와 같은 경지는 구연강도 처음 보았다.
“제법이구나!”
천주가 검결지를 뻗자 기운이 쭉 뻗어 나왔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허공을 갈랐다.
-번쩍
섬광이 터졌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했다.
천주의 무형검이 무수한 강기의 검과 격돌한 것이다.
놀랍게도 천주의 거대한 무형검이 무수한 강기의 검을 튕겨냈다.
‘…!’
구연강은 자신이 모든 걸 쏟아부은 파검이 깨지자 곧바로 진각을 밟았다.
-쿵!
땅이 흔들렸다.
구연강은 곧바로 천주처럼 검결을 맺고 쭉 찔렀다.
-파앗
구연강의 손가락 끝에서도 기운이 쏘아져 나왔다.
-쉭!
일생 동안 쌓아온 심득의 결과가 담긴 비장의 한 수가 깨졌으니 동귀어진을 각오해야 했다.
순간, 그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
몰락한 문파의 살아남은 후계자.
간신히 얻은 당가의 비술.
이를 응용하여 터득한 검법으로 천수무흔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복수를 하고 문파를 일으켜 천하사패로 군림하기까지 거침없이 살아왔다.
영역을 넓히고 무공에 매진하여 천하제일이라는 명성을 얻고자 했다.
그런데 하늘이 그에게 허락한 것은 거기까지였나 보다. 아니면 그의 역량이 한계에 이르렀던가.
마음에 두었던 셋째 아들의 황당한 죽음.
‘정점을 지나 쇠락의 시작이었던가?’
너무나 어이없게 셋째 아들을 보낸 뒤 천무방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강소군과 겨뤄 패한 뒤 책사 조개량에게 배신당하고, 심지어 믿었던 호위에게 배반을 했다.
아내가 죽고 둘째 아들 구양수에게 금제를 당하는 일까지 겪었다.
시원찮게 여겼던 아들에게 금제를 당해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 때 그는 자신의 벽을 보았다.
평생 염원했던 벽이 가장 비참했던 순간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벽은 뚫을 수가 없었다. 방주의 자리를 구양조에게 물려주고 구양수에 대한 화를 내려놓았다.
모든 걸 버리고 수련에 매진했지만 벽은 굳건했다.
그러다 구양조가 죽었다.
처참한 아들의 유해 앞에서 그는 허허로웠다.
무엇을 위해 천무방을 일으켜 세웠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천무방을 떠났다.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천황성을 깬다.’
그는 천황성을 깨는 검이 되고자 했다.
아들의 복수, 그리고 무인으로서 천외천의 존재와 겨루는 것!
그의 삶의 목표가 단순해진 순간, 놀랍게도 벽이 깨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현경을 넘어 생사경의 초입에 들어섰고, 무형검의 단초를 얻었다.
무형검.
그가 그렇게도 꿈꾸던 경지.
계속해서 나아가면 그는 완전한 무형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부여해 준 그의 기회는 거기까지였다.
구연강은 천황성 중양대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 갈등을 하였다.
‘이대로 수련을 하면 무의 극을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러나 첫째 아들의 복수, 출정한 둘째 아들의 안위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인연을 잘라내지 못한 그의 경지는 백수십 년을 살아온 세월의 무심함을 넘지 못했다.
천주는 이미 칠정오욕이라는 인성을 넘은 존재였다.
***
-콰아아앙!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구연강의 신형이 튕겨 나왔다.
‘아버지!’
구양수는 십여 장을 튕겨 나가 땅바닥을 구르는 아버지를 보면서 속으로 절규했다. 그러면서도 천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구연강이 자신을 바라볼 때 직감하였다.
죽음을 각오한 눈빛이었다.
그가 말린다고 말을 들은 아버지 구연강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를 구하는 대신 복수를 택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천주에게 달려들었다.
“…!”
천주는 말없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구양수를 보고 흠칫, 하였다.
한참 아래 하수인데 왠지 껄끄러운 놈이었다.
바로 죽여 후환을 없앨 요량으로 천주가 검결지를 맺어 허공을 그었다.
-쉭!
“…!”
천주가 검결지를 맺어 내려치는데 구양수가 허리를 숙여 등으로 받아치듯 하며 멈추지 않고 달려왔다.
-퍼억!
무형검이 구양수의 등판에 떨어졌다.
그런데,
당연히 갈라졌어야 할 구양수가 멀쩡하게 버티며 달려들었다.
‘이놈이?’
천주가 검결지에 공력을 더 쏟아부었다.
“크윽!”
구양수가 무형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엎어졌다. 그런데도 양 팔꿈치와 무릎으로 버티고 기어 천주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천주가 다시 한 번 놀라 구양수를 내려다봤다.
‘무형검을 막아내다니?’
무형검.
호흡을 통해 단전을 단련하면 기가 축적된다.
축적된 기를 전신경락을 통해 운용하여 증폭하고 이를 권장이나 병장기를 통해 분출하면 고수 소리를 듣는다.
체외로 분출시킨 기가 응축되어 무형의 힘을 이룰 때 비로소 절정의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그 무형의 힘을 다시 거듭 제련하여 유형화할 때 비로소 강기라고 하고 초절정에서 화경을 넘나든다고 한다.
강기에도 층위가 있다.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강기를 집약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준에 이른 것이 무형검이다.
너무나 얇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응축된 기운의 날.
엄청난 기가 응축된 무형검이 가르지 못할 것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구양수는 무형검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천주의 발치까지 다가왔다.
무형검이 짓누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고개조차 쳐들지 못했지만 악착같이 기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
머리통을 내리치면 끝인데.
천주가 어이가 없어 검결지를 뒤집으며 한마디 하였다.
“미친놈!”
거북이처럼 엎드린 구양수의 머리를 내리치려는데.
구양수가 퍼뜩 머리를 쳐들며 비웃었다.
“이 새끼야, 너는 끝났어. 같이 가자고!”
구양수의 손이 쑥 뻗는가 싶더니 천주의 누른 용포 밑으로 들어갔다.
화약 냄새가 풍겼다.
‘벽력탄!’
천주가 흠칫, 놀랐다.
구양수가 왜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었는지 깨달았다.
순간, 몸을 날리려는데 엎드린 구양수가 천주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정말 동귀어진할 참이었다.
가랑이 밑에서 벽력탄이 터지면 천주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다.
***
구양수는 형 구양조가 죽을 때 검황의 무형검을 봤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를 했다.
천하에 가를 수 없는 게 없다는 무형검.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하늘에 닿은 존재들뿐이다.
구양수는 수련을 하는 대신 천하를 뒤졌고 끝내 만년교룡의 비늘과 힘줄을 엮어 만든 호신갑을 구했다.
그렇긴 해도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천주의 가랑이 사이에 벽력탄을 박아 놓고 두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며 구양수는 생각했다.
‘백만 냥을 주고 고작 동귀어진이냐?’
천주와 같이 죽기 위해 호신갑을 산 건 아닌데.
그때 아버지 구연강이 피를 토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이제 너 하나 남았다! 이 늙은 애비를 어찌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
순간 구양수는 벽력탄의 불꽃이 마지막에 이른 걸 봤다.
바로 터질 것이다.
천주가 검결지를 풀어 구양수의 머리통을 내려치려는 찰나이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퍼엉!
보다 못한 철권호가 하나 남은 오른팔에 얼마 남지도 않은 내공을 모두 담아 내질렀다.
철권호의 권강 또한 현경에 이르러 극강의 위력을 담고 있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사력을 다했다.
천주를 물리치기는 어렵지만 한순간 주의를 돌리기는 충분했다.
천주의 인상이 굳었다.
구양수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순간 철권호의 권강이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 낼 것이다.
“이놈들이?”
천주가 검결지의 방향을 돌려 철권호의 권강을 튕겨내고 오른 다리에 기운을 실어 구양수의 머리통을 차려 했다.
그런데,
구양수가 한 수 빨랐다.
천주의 발목을 잡고 있던 손으로 발등을 내리찍은 동시에 그 반탄력을 이용해 옆으로 떼굴떼굴 굴렀다.
그 순간,
-쾅!
벽력탄이 터졌다.
***
-콰콰콰콰쾅!
천성육십사식이 단숨에 펼쳐지며 피워낸 검강이 연달아 폭음과 함께 터졌다.
권제는 두 팔을 십자로 교차하여 막아냈다.
‘…!’
권제는 권의 위력도 상궤를 벗어났지만 방어력 또한 최강이었다.
우람한 두 팔에 형성된 강기는 철벽과도 같았다.
중랑의 검은 무쇠도 가를 수 있는데 권제의 권강이 친 벽을 뚫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에 이른 덩치를 지닌 권제다. 타고난 신력에 강기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철인 같았다.
중랑을 돕기 위해 대여섯 명의 백대고수가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곰 같은 권제의 신력에 질려 가까이 가지를 못했다.
한 사람이 권제에 잡혀 산 채로 찢겨 죽은 걸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백대고수들은 삼 장 거리에서 틈을 보다 검강이나 도기를 날려 권제의 주의를 흐트러뜨렸고 그것만으로도 중랑에게는 도움이 되었다.
“크흐흐. 고작 이 정도로 나를 상대하려고 했단 말이냐?”
싸움이 격해질수록 권제는 힘이 솟는 괴물이었다.
중랑은 승부수를 걸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낭인으로 살아왔던 중랑은 싸움의 흐름을 알았다.
지금 권제의 기를 꺾어 놓지 않으면 더욱 날뛸 것이고 옆에서 조력을 해 주는 백대고수들의 사기는 떨어질 것이다.
-촤아아악!
중랑이 검을 머리 위로 세웠다. 순간 검이 순식간에 열 개로 나뉘었다.
낙척서생 유문광의 검해가 중랑에게 와서 분검(分劍)으로 변화되었다.
검의 실체는 하나이나 나머지 역시 강기를 나누어 지니고 있으니 그 위력이 열 배로 늘어나는 셈이었다.
-촤라라락!
중랑이 천성육십사식의 절초를 단숨에 이어갔다.
열 개의 검이 일제히 움직이니 수많은 별무리가 피어났다.
마치 은하수를 보는 듯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이 어느 순간 유성처럼 떨어졌다.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니라 검의 기예를 보는 듯 황홀하기까지 하였다.
“…!”
권제의 미간이 잔뜩 우그러졌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별빛 하나하나가 사람을 가르는 무서운 빛이다.
옆에서 보는 백대고수들도 중랑이 펼치는 수법에 매료되어 탄성을 흘렸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검초가 아닐까.
그 아름다운 빛무리가 권제가 내민 쌍권의 벽과 부딪쳤다.
-콰콰콰콰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