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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권호의 상태는 위중했다. 명문혈로 침투한 암경이 단전을 뒤틀어버렸다.
“회복하려면 몇 년은 걸릴 걸세. 본인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을 걸세.”
당종이 냉정하게 말했다.
제갈선은 침중한 얼굴로 듣기만 하였다.
의천맹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맹주가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말았으니 보좌하는 장로로써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설마 추 대협마저 보령호신환을 복용하였을 줄이야. 이제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겠군요.”
제갈선이 탄식을 하였다.
강소군이 고를 탐지해내는 능력이 있다지만, 천지에 퍼진 영인고를 모두 알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듣고 있던 강소군이 말했다.
“한번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있습니다.”
“뭐? 내가 모르는 방법이 있다고?”
당종이 뜨악해하는 시선으로 강소군을 보았다.
“영인고는 두뇌를 각성하게 하여 신체와 기를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능력이 있지요.”
“…….”
“그건 너무 위험하네.”
당종은 눈빛을 반짝거리며 흥미롭게 들었지만, 제갈선이 반대했다.
“그러다 맹주가 천주에게 조종이라도 당한다면…….”
“제가 직접 통제를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치유가 끝나면 바로 고를 제거하는 거죠.”
“내가 마비환, 아니 환생단을 먹이면 되지 않을까?”
당종은 마침내 자신의 비약 환생단을 복원해낸 상태다.
환생단을 먹이면 꼼짝 못 하니 천주가 조종하려든다해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확실하겠군요.”
“당장 해보자고! 내가 가서 영인고를 가져오지.”
당종이 벌떡 일어났다.
제갈선은 못 미더웠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당종은 추일엽 등에게서 빼낸 고를 옥합에 보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철권호가 누워있는 맹주의 침실로 모였다.
창백한 낯빛을 한 철권호는 잠이 들어 있었고 그 옆을 부인 봉연청이 지켰다.
“부인, 잠시 나가 있으시지요.”
제갈선이 봉연청을 내보냈다.
당종이 환생단부터 꺼내 철권호의 입에 넣었다.
잠시 후, 철권호의 몸이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당종이 철권호의 콧속으로 구멍을 뚫고는 옥합에서 영인고를 꺼내 집어넣었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집중해야 하니 두 분도 잠시 나가 계시지요.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대신 일어난 상황을 나중에 꼭 알려줘야 하네.”
당종이 아쉬운 표정으로 제갈선과 함께 방을 나갔다.
강소군이 철권호 옆에 앉아 정좌를 하고는 금룡기를 운용하였다.
퍼엉!
금빛 구체가 부드럽게 퍼져나가며 철권호와 강소군을 감쌌다. 혹시나 모를 천주의 침입을 막으려는 것이다.
강소군은 이중삼중으로 대비한 후 봉인된 영인고의 의식을 풀었다.
“!”
영인고가 철권호의 머릿속에 있는 고와 감응을 하는 게 느껴졌다.
단지 그뿐이었다. 존재를 인식하는 수준이었다.
강소군은 자신의 고에 의지를 실어 철권호의 머릿속에 있는 고와의 감응력을 높였다.
철권호는 의식이 잃은 상태였기에 강소군이 자신의 의지를 고에 실어 보내야 제대로 치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소군의 의식이 천천히 고에 몰입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강소군은 자신이 온통 하얀 빛에 휩싸여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 사방이 온통 흰 빛이었다.
강소군은 그게 고의 의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드디어 고의 의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흰빛에 침잠하고 지켜보는데 갑자기 하얀 빛이 은은히 일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하얀 빛이 퍼지며 빛과 빛이 중첩되는 느낌이 들었다.
철권호의 머릿속에 있는 고의 의식까지 들어간 것이다.
뒤이어 무수한 빛이 명멸하였다. 빛의 세상임에도 또 다른 빛이 명멸하는 게 기이하였다.
강소군은 빛의 향연을 지켜보았다.
***
“아니, 어찌된 거지? 대체 얼마나 더 저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당종이 참다못해 방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았다.
강소군이 정좌하여 선정에 든 지 벌써 삼 일째. 먹지도 자지도 않고 저러고 있다.
“뭐가 잘못된 게 아닐까?”
당종은 이제 영인고의 섬모 같은 작은 발까지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외부 형태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영인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가 없었다. 호기심을 못 참는 그로서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응?”
문 앞에서 오락가락하던 당종은 안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재빨리 돌아봤다.
방문이 열리며 강소군이 나왔다.
“어찌 됐나?”
“한번 확인해보시지요.”
당종이 부리나케 들어가 철권호의 단전을 살폈다.
“오! 이거야 말로 기적이잖아!”
놀랍게도 단전이 복구되어 있었다.
이제 단순한 내상을 입은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이거 영인고가 아니라 만병통치고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냐?”
“일단 고를 제거하고 다시 확인해보시죠.”
당종이 철권호의 고를 뽑아 옥합에 담았다. 정말 만병통치약을 대하듯 조심스레 다뤘다.
그러고 다시 철권호를 검진하였다. 기의 파장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이제 탕약과 침으로 치료하면 두어 달이면 완치될 걸세.”
소식을 듣고 제갈선이 달려왔다.
“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제갈선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회복기간이 몇 년에서 두어 달로 줄어든 것 다행이지만, 중양절이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천황성 삼황전 고수와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을 잃었으니 누군가 더 희생을 해야 한다.
“저는 잠시 쉬어야겠습니다.”
강소군이 삼도상단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그로서도 정리해야 할 게 많았다.
그가 철권호의 치료를 시도한 건 영인고에 대한 통제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는 철권호를 치료하면서 영인고가 모두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어미고와 새끼고만 소통을 하는 게 아니라 새끼고들끼리도 원한다면 소통이 가능하다는 건 그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천황성의 고수들 머릿속에 심은 고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미고의 능력은 아직 알 수가 없으니 자신할 수 없었다.
‘확인하려면 천황성을 찾아야겠구나.’
직접 시험 대상을 찾아 시도해봐야 할 것이다.
***
의천맹에서의 싸움은 수많은 이들이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검신 앞에 다시 무적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강소군은 후기지수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흥! 무적검신이라고?”
고장추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 중양절에 맞춰 천황성에 당도하기 위해 가는 길이다.
그런데 가는 길 내내 무적검신을 칭송하는 말을 들으니 내심 불쾌했다.
직접 강소군을 만났을 때 자신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느끼긴 했다.
그래서 그 역시 더욱 수련에 매진해왔다. 커다란 마차를 타고 가는 것도 수련을 하며 가기 위함이었다.
고장추의 뒤로 흑천맹 삼천 무인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권황, 기다려라. 네놈의 머리는 반드시 잘라 비연의 영전에 올릴 것이다. 천황성의 풀 한 포기까지 다 짓밟아 주마.’
고장추는 새삼 이를 갈았다.
선두에 선 홍의발에게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의천맹도 출정했다는 소식이다.
그야말로 천하의 무림인들이 거의 다 천황성으로 향하는 중이다.
‘재야인사로 구성된 백대고수, 대파와 세가에서 선발한 고수 일백, 그리고 무인 오백 명? 생각보다 규모가 적군.’
홍의발이 보고를 받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보다도 천황성 고수의 무서움을 잘 아니 의천맹의 규모가 부족하게 느껴진 것이다.
홍의발은 제갈선과 협정을 맺었는데 흑천맹 삼천 명과 전력을 맞추겠다고 했다.
홍의발이 곰곰 생각하다 자신이 간과한 변수가 있음을 깨달았다.
‘아, 그렇군. 화룡문과 정무문, 천무방이 합류한다면 얼추 전력이 비슷하겠구나.’
흑도는 수가 많았으나 아무래도 정파의 정예에 비하면 고수들이 부족했다.
‘천황성을 궤멸시키고 나면 정파와 싸워야 한다.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이군.’
홍의발은 천황성 결전 다음 수까지 머리를 굴렸다.
***
“왜 이리 꾸물대는 거야!”
구양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역시 중양절에 맞춰 천황성에 당도하기 위해 떠날 준비 중이다.
구양수는 많은 인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정예 삼백 명만 데리고 갈 생각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무척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가 다섯 대나 되었다.
수레 한 대에 달린 말만 네 마리다.
“수레가 너무 무거워서 속도가 나지 않습니다.”
수하 하나가 보고를 하였다.
“뭐?”
구양수가 눈알을 부라렸다.
형의 원한을 갚으러 가는 길이니 마음이 급했다.
“그럼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구양수가 수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수레에 달라붙어! 수레 한 대에 열 명씩! 교대로 들고 간다.”
수레 한 대마다 좌우로 다섯 명씩 달라붙어 위로 들어주니 말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대신 수레를 들고 말의 보폭에 맞춰 경공을 펼쳐야 하는 무인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머리를 쓰는 거라고?’
맨몸으로 때우는 거지.
***
달빛 은은한 밤.
강소군은 만장절벽 아래 서 있었다.
낙서생은 자신이 침투했던 길도 기록에 남겼고 강소군은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정말 높기는 높군.’
강소군이 절벽을 쳐다보다 몸을 날렸다.
낙서생은 만장절벽을 기어올랐지만 강소군은 삼십여 장씩 툭툭, 치고 올랐다.
잠시 후 정상에 당도한 강소군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천황성은 부드러운 달빛 아래 잠들어 있었다.
‘저기가 천주가 주로 머문다는 천해각인가보군.’
강소군이 선 정상 맞은편에도 절벽이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 성벽과 함께 툭 튀어나온 천해각이 보였다.
성벽에서 이어진 다리가 길게 휘어져 내려 이쪽 중턱 부근에 닿아 있다.
이쪽 절벽 가장 위쪽에 전각군이 한 무리 있고 그 아래 좀 더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가장 아래 중턱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는 커다란 건물들이 몇 채 있었다.
차례대로 삼황궁과 제왕전 그리고 군웅각임을 알 수 있었다.
강소군은 새삼 낙서생에게 경의를 표했다.
절대고수들이 득실거리는 천황성에 잠입하여 내부를 이렇게 파악하는 건 무공이 높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은신을 하고 지켜보는 끈기와 생리적 욕구까지 참아내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그가 살수로 나섰다면 못 죽일 사람이 없었겠구나.’
강소군이 두 다리를 잃은 낙서생을 떠올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낙서생의 기록 덕분에 강소군은 헤맬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몸을 날려 군웅각으로 향했다.
고를 통제하는 시험을 하기에 가장 만만한 자들이 군웅각의 고수들이다.
터무니없게도 그들 또한 절대지경의 고수이기는 했지만.
잠시 후.
강소군은 군웅각 지붕에 내려섰다. 마치 깃털이 내려앉은 듯 아무런 기척도 일지 않았다.
강소군은 지붕에 정좌를 하고 앉아 봉인된 영인고의 의식을 풀었다.
‘…….’
이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고를 통제하는 건 익숙했다.
군웅각 내부의 이십여 곳에서 고가 반응하는 느낌이 전해왔다.
그때.
맞은편 절벽 꼭대기 천황성에서 커다란 고함이 터졌다.
“겁 없는 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천주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