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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이었다.
어느새 아침은 선선한 바람이 분다.
의천맹 총단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대파와 세가를 비롯해 수많은 무림인들이 몰려들었다.
의천맹으로 향하는 길은 병장기를 든 무림인들로 북적였다.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무림인 중에 강소군도 있었다.
워낙 사람이 많은 데다 평범해 보이는 강소군의 기도에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검신이라 추앙받는 인물이 자신들처럼 걸어서 의천맹으로 갈 거라는 생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불철주야 공사를 한 끝에 의천맹 총단은 거대한 성으로 거듭났다.
“아, 여기가 삼도문 장원이었던 곳이 맞아?”
“상전벽해라더니 정말 몰라보게 바뀌었군.”
사람들이 높다란 성채와 정문을 보고 감탄하였다.
삼도문에서 의천맹이 처음 결성된 지 몇 달 만에 몇 배나 확장이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눈으로 보는 게 중요했다. 총단이 위용을 갖추자 자연 의천맹에 대한 경외감도 올라갔다.
원래 두세 사람만 모여도 시비가 이는 무림인들이다. 그러나 정문 양옆으로 도열한 의천맹 무인들의 기세에 대부분이 순한 양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대단하군요. 과연 무림맹입니다.”
강소군 옆에서 걷던 청년이 혼잣말하듯 말을 걸었다.
옆에 검을 찬 청년은 남빛 무복을 잘 차려 입고 있었다.
강소군이 무심코 바라보자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파가 이렇게 단합하다니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청년의 얼굴은 의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무림을 위협하는 천외천 천황성은 반드시 궤멸되고 말겁니다.”
청년은 말을 하면서 자신의 검을 툭툭, 쳤다.
강소군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맞는 말이요.”
강소군과 청년이 돌아보니 잘 단련된 체구의 젊은 무인이 웃고 있었다.
청년의 눈빛은 맑고 빛났다.
“형장의 기개에 감복하여 갑자기 끼어들었소. 나는 천양 하가 하조형이라고 하오.”
“아, 천양 하가에서 오셨군요.”
남빛 무복의 청년이 재빨리 포권을 하며 말했다.
“고현 소가의 소연호라고 하오.”
하조형도 마주 예를 취했다.
“소 형의 의기에 감탄하여 끼어드는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두 사람은 풍운의 뜻을 품고 강호행에 나선 이들이었다.
천양 하가나 고현 소가 모두 지역에서는 제법 이름난 무가들이다.
명가에서 자란 그들은 구김살이 없었다.
보고 듣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새로운 그들은 순식간에 의기투합하였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강소군에게도 말을 걸었다.
말없이 걷기만 하는 강소군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형장께서도 천황성 토벌에 참여하시는지요?”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강소군은 하조형과 소연호를 보니 문득 장선백이 떠올랐다. 그들 두 사람도 이렇듯 구김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선백이 올 때가 됐다.
“천황성 악도들은 하나같이 고수라고 하오. 조심하셔야 할 것이오.”
소연호는 강소군의 무위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으니 나름 염려한다고 한마디 하였다.
“고맙소.”
강소군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도 참전할 것이오. 괜찮다면 내 뒤에 서시오.”
하조형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푸른 하늘 맑은 햇볕 아래 한창 혈기왕성한 두 청년의 미소는 무척이나 당당하고 싱그러웠다.
강소군은 낯선 느낌을 받았다.
그가 살아온 무림은 피가 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혈옥(血獄)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사는 무림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이 두 사람은 천황성 고수를 만나면 일검에 목이 날아갈 것이다.
정문 안쪽은 널따란 광장이었다. 만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광장 전면에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글귀가 걸린 거대한 깃발이 꽂혀 있었다.
철권호는 제갈선에게 대파와 세가, 재야 무림의 자리를 가르지 말라고 하였다.
의천맹 무인들은 무림인들이 오는 대로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다.
천황성을 상대하는데 모두가 하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철권호의 조치는 의외로 재야 무림인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알게 모르게 대파와 세가의 위세에 눌려 있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의천맹은 정면에 낮은 단을 설치하고 백 개의 의자를 놓았다. 하지만 그 자리는 모두 비어 있었다.
의천맹주 철권호의 자리도 단 아래 다른 명숙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정오가 되자 그 너른 광장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철권호가 단상에 올랐다.
“정파가 합심하여 무림맹을 결성하고 무림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려는 이때 천황성이라는 사악한 무리가 나타나 수많은 정파 인사를 해쳤습니다….”
철권호가 천황성 토벌의 취지를 설파하자 모든 무림인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다.
철권호가 단상에 놓인 의자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천황성은 사이한 대법을 통해 상궤를 벗어난 고수들을 길러냈소.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고수들이 솔선하여 나서야 할 것이오.”
단상에 놓인 백 개의 의자는 천황성 고수들과 결전을 벌일 고수들을 위한 자리였다.
철권호가 우렁차게 외쳤다.
“누가 나와 함께 천황성을 격파하겠소?”
철권호의 외침이 사람들의 마음을 진동시켰다.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백대고수를 위한 자리다!”
누군가 외쳤다.
“오! 백대고수!”
저 자리에 오르면 무림 백대고수로 회자될 것이다.
“내가 선봉에 서겠소!”
한 사람이 단상으로 뛰어 올랐다.
“오! 자청신검이다!”
“그라면 자격이 있지!”
사람들이 흥분하였다.
화산파 속가고수 자청신검 추일엽은 지난 무림맹주 선출대회에서 천황성 검황이었던 천산신검에게 패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자청신검이 단상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검황이 인외의 무공을 펼쳤을 뿐 추일엽 역시 신검으로 불리는 고수였다.
그날 이후 절치부심했던 그는 검황에게 재도전하고자 앞장서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속속 고수들이 단상으로 날아들었다.
“아! 황산노검!”
“무쌍비도 이 대협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오를 때마다 연호하였다.
강소군은 단상을 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가장 먼저 단상에 올랐던 추일엽을 보는데 머릿속 영인고가 꿈틀거렸다.
강소군이 영인고와 결합된 의식의 봉인을 풀었다.
그러자 느낌이 확연해졌다.
강소군이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하였다. 추일엽 외에도 대략 열 사람 정도가 느껴졌다.
강소군의 옆에 있던 하조형이 말했다.
“추 대협이 왜 우리를 보는 거지?”
강소군이 눈을 뜨고 다시 단상을 보자 추일엽과 시선이 마주쳤다.
추일엽의 표정이 묘했다.
‘천주다!’
강소군이 벌떡 일어났다.
자청신검 추일엽은 천하비무대회에서 검황에게 내상을 입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 영약을 구하다 보령호신환을 입수하고 복용하였다.
영인고가 부화하여 뇌에 안착하면 이목이 영민해지고 전신 내공이 충만해진다.
추일엽은 자신이 벽을 넘어 진정한 절대고수가 되었다고 자신하였다.
방금 전까지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추일엽은 더 이상 추일엽이 아니다.
천주는 추일엽을 통해 의천맹 상황을 지켜보다 영인고의 반응을 느끼고 강소군이 있음을 알아챘다.
감응이란 쌍방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당연한 이치였다.
천주는 곧바로 강소군이 있는 자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강소군이 영인고를 봉인하는데서 한발 더 나가 감응을 하고 통제를 할 수 있음을 느꼈다.
‘정말 기이한 놈이구나.’
천주는 놀라움과 동시에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원래는 의천맹에 자연스럽게 잠입하고자 했으나 강소군에 의해 들통이 날 게 분명했다.
추일엽, 실제로는 천주가 자신을 등지고 서 있는 철권호에게 다가갔다.
“위험해!”
강소군이 몸을 날리며 청옥비도를 던졌다.
철권호 역시 등 뒤의 기척을 느끼고 황급히 돌아서려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퍼엉!
추일엽의 주먹이 철권호의 명문에 격중하였다.
“크억!”
철권호는 강소군의 경고에 황급히 호신강기를 끌어올렸으나 추일엽의 주먹에 맞고 일장이나 날아갔다.
추일엽이 재차 날아가며 끝장을 내려 했는데 강소군의 청옥비도가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추일엽이 양손을 휘저어 청옥비도를 튕겨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추 대협이 맹주님을 암습하다니!”
“검신이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휙!
그 사이 강소군이 추일엽 앞에 떨어졌다.
제갈선과 의천맹 장로들이 재빨리 달려와 철권호를 살폈다.
“쿨럭!”
철권호가 핏덩이를 쏟아냈다. 천주가 추일엽의 정신을 지배한 것이 처음이었던 게 철권호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천주가 제대로 지배를 했다면 추일엽의 본신무공을 모두 끌어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철권호는 일권에 절명하고 말았을 것이다.
제갈선이 호위들에게 외쳤다.
“어서 서 신의께 모셔라!”
호위와 의천맹 장로 몇이 철권호를 부축하고 사라졌다.
추일엽, 아니 천주가 사라지는 철권호를 보며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으흠. 아직은 이놈 몸이 익숙지 않군.”
그러더니 강소군을 노려보았다.
“너는 참 귀찮은 놈이구나. 진작 너를 제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 한 게 참 아쉽군.”
천주는 공손승에게 맡길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서서 강소군을 죽였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보령호신환으로 무림은 물론이고 세상을 지배하기 직전인데 강소군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으나 계획이 틀어질 판이다.
제 아무리 무병장수에 공력을 높여준다 해도 누군가에 의해 정신이 지배당하기를 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양의심공으로 고에 지배당하는 걸 피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고를 지배할 수 있게 됐지?”
천주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그는 지금도 강소군의 머릿속에 있는 새끼고에게 의식을 보내고 있다.
분명 살아 있음이 느껴지는데 의식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반응이 없다.
강소군이 허공에 떠있는 청옥비도를 회수하며 말했다.
“명색이 세상의 지배자라는 자가 이런 비열한 수를 쓰다니.”
“네가 나를 이해하려면 백 년은 더 살아야 할 것이다.”
천주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너야 말로 진정한 내 후계자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어떤가? 우리 함께 손을 잡고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해보지 않겠는가?”
“…….”
강소군은 말없이 천주를 노려보았다.
실제로는 강소군 역시 추일엽의 머릿속에 있는 고를 통제하고자 의식을 보내는 중이다.
“크크. 헛수고를 하는군.”
천주가 강소군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전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의 등 뒤에 매여 있던 쌍검이 저절로 뽑혀 하늘로 떠올랐다.
쉬이익!
허공을 선회한 자청쌍검이 강소군에게 내리꽂혔다.
강소군이 무애검을 뽑아 천주를 겨눴다.
파지직!
무애검에서 뇌전 같은 금빛 기운이 퍼져 나왔다.
“오!”
예기치 않게 두 절세고수의 대결을 보게 된 군웅들이 감탄성을 내질렀다.
“검신이 바로 옆에 있었다니…….”
하조형과 소연호는 반쯤 정신이 나갔다.
자신들과 함께 걸어온 이가 검신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눈에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자청쌍검과 허공을 긋는 무애검이 들어왔다.
콰콰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