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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강이 부복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구양수는 구양조를 관에 담아 방으로 보내고 자신은 의천맹에 남아 있었다.
구연강이 방으로 복귀하라고 수차례 사람을 보냈는데 이제야 돌아온 구양수다.
“내가 죽는다고 해야 오다니. 장례라도 치를 생각으로 온 것이냐? 이제 애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냐?”
“강건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준비해야 할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구양수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천무방의 후계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더냐?”
“….”
구연강은 마지막 남은 아들을 달래듯 말했다.
“이제 너는 천무방의 유일한 후계자다. 방의 일을 돌봐야 할 게 아니냐?”
“방주님께서 건재하신데 제가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제 할 일 하겠습니다.”
구양수의 목표는 오로지 검황을 죽이고 천황성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천황성과 관련된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잡아 죽일 생각이다.
이를 위해 밤낮으로 수련하는 한편 천황성을 상대할 궁리를 하느라 몸이 둘이라도 모자랄 판이다.
지금은 천무방을 맡을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구연강이 길게 탄식을 하였다.
“나는 이제 늙었다. 방주의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다.”
구양수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구연강의 입에서 이렇게 나약한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한 것이다.
구연강은 몇 년 사이 아들 둘과 아내를 잃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 그와 함께 방을 키워 왔던 동지들도 대다수 죽었다.
아무도 믿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살았다. 그 끝이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아 늙어 갈 뿐이다.
한때 천하를 일통하고 십대고수의 수좌 비천신검 상관무영을 꺾고자 했던 불패의 무인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회한에 찬 중늙은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구연강은 이번에야말로 아들의 복수를 직접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구양수에게 방을 물려줘야 한다.
그런데 구양수 또한 아직은 받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양조의 복수는 내가 한다. 이번만큼은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너는 방을 돌보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구연강이 손을 저어 나가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구양수가 새벽 수련을 마치고 조반을 기다리는데 천무방의 고수들이 몰려왔다.
“무슨 일이오?”
응천대주 구화마검 조정평이 나서서 말했다.
“전임 구 방주께서 떠나셨습니다.”
“떠나다니? 어디로 가셨다는 말이지?”
“이공자께 방주의 위를 물려줄 것이니 절차를 밟으라 하고 가셨습니다.”
“뭐? 뭐라고?”
조정평이 서찰을 건네며 말했다.
“천하를 주유하며 여생을 보내실 것이니 찾을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구양수가 털썩 주저앉았다.
구연강이 선수를 칠 줄 몰랐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구양수는 자신이 아버지 구연강에 대해 뼛속까지 알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조개량의 암습을 기회로 뒤통수도 쳤다.
그런데 구연강이 이리 나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구연강은 구양수의 마비환에 당해 꼼짝 못 한 채 구양수의 하소연을 끊임없이 들었다.
이후 구양조를 다시 보며 자신의 안목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안목에 회의를 갖게 되자 미련 없이 천무방을 떠날 생각을 한 것이다.
“나보고 어쩌라고….”
구양수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자 조정평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신임 천무방주께 인사를 드립니다.”
조정평이 예를 갖추고 허리를 숙이자 몰려든 고수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제기랄.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겁니까?’
구양수가 하늘을 보았다. 그 어느 하늘 아래 구연강이 있을 것이다.
***
“왜 모두들 소식도 없는 거야! 나 정말 잘못 산 거야?”
남궁령이 투덜거리며 정원 연못에 돌을 던졌다.
“너는 재미로 돌을 던지지만 맞아 죽는 고기 입장은 생각 안 하냐?”
남궁우가 다가오며 면박을 주었다.
“이제 만든 연못에 무슨 물고기가 있다고.”
“중양절 결전을 앞두고 모두 수련에 매진하는데 너는 뭐 하는 거냐?”
“나야 들어오는 정보나 해석하는 게 일인데 수련할 이유가 뭐 있어.”
남궁령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제갈선은 사방에 정보망을 깔고 있다. 날마다 들어오는 각지의 보고가 점차 늘어 산더미 같다.
남궁령은 온종일 보고서를 읽고 분류하고 특이 사항을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가 원했던 강호 협행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하지만 더 이상 싸움이나 전투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남궁령에게는 알맞은 일이기도 했다.
다만,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네 덕분에 본가의 위신이 올라갔더구나.”
“내 덕에?”
“무인들 사이에 남궁가의 여식이 의천맹의 지봉이라더구나.”
“지봉? 으아….”
방금 전까지 짜증을 부렸던 남궁령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었다.
남궁우가 속으로 웃었다.
‘이렇게 단순한데, 정보 분석은 꽤 날카롭단 말이지?’
남궁우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웬일이야. 여기는?”
“나는 본가로 돌아가게 됐다.”
“왜?”
“아버지 명이다.”
“대신 형이 올 것이야.”
“아하! 중양절 결전에 큰 오라버니가 참전하는 거구나?”
천황성과의 결전에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질 것이다. 고수라고 해도 마찬가지.
아니, 천황성 고수와 직접 맞닥뜨려야 하니 오히려 더 피해가 클 것이다.
남궁천은 두 아들을 모두 잃을 수 없었다.
남궁악을 보내는 대신 남궁우를 본가로 들이려는 것이다.
“쳇! 딸은 죽어도 좋다는 거야 뭐야?”
남궁령이 투덜거렸다.
팽일소가 떠나고 얼마 후 강소군도 무한을 떠났다.
남궁우마저 떠난다니 허전했다.
“너를 따라다니는 놈들이 한 무더기나 되는데 뭐가 허전해?”
“흥! 그놈들은 내가 아니라 남궁가라는 배경을 얻고 싶어 그러는 거라고.”
남궁우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참, 오다가 소식을 들었는데 팽가가 온다더라.”
“뭐?”
“천황성에 당한 복수를 하겠다고 백 명의 무력대를 보낸다더라고.”
“일소도 오나?”
남궁령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력대 대주가 팽일소라던데?”
“일소가 대주라고? 그럴 실력이 아닌데?”
“모르지. 팽가에서도 단단히 벼르고 있으니 공청석유라도 먹였을지.”
“오!”
남궁령이 뛸 듯이 좋아하였다.
그러더니 집무실로 향하며 말했다.
“오라버니야. 잘 가. 나 일하러 가야 돼.”
“으이구.”
남궁우가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
“왜 또 온 것이냐? 다시 오지 말라 했는데.”
현치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상관무영을 쳐다보았다.
상관무영이 등에 진 차 보따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논검을 위해 온 게 아니니 걱정 마시지요. 차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렇다면야 환영이지.”
현치자가 도관으로 들어가더니 다구를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은 절벽 끝 바위에 앉았다. 강소군이 늘 앉아 맞은편을 보던 자리다.
“그놈은 잘 있으려나?”
현치자가 차를 따르다 말고 중얼거렸다.
상관무영이 미소를 지었다.
“초식을 완성했더군요. 무형검으로도 깨지 못했습니다. 노사의 진정한 제자가 아닐까 싶군요.”
“으흠.”
현치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시답지 않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왜 왔나?”
“혹시 몰라서 인사나 드리려고 왔습니다.”
“왜? 죽을 때가 됐나?”
“더 미룰 수가 없지요.”
“….”
현치자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상관무영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멀리 무당산 아래 천하가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묘언적 그자가 아니었다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클클.”
현치자가 혀를 찼다.
“그만큼 살고도 아직 모르겠나? 자네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 나는 이런 사람이고.”
현치자가 맞은편 절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놈은 몇 달 동안 저 절벽만 보다가 내려갔지.”
“….”
“중양절이라고 했나? 아직 날이 좀 남았군. 저 벽이나 쳐다보다 가게.”
***
“역시 양의심공이었군.”
천주의 앞에 장포 노인 천곡과 촌로 현사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천황성의 좌우사자다.
“영인고를 봉인하고도 무형검을 받아낸 걸 보면 참으로 기이한 놈입니다.”
좌 사자 장포 노인 천곡이 말했다.
강소군을 상대할 때 무시하듯 말했지만 실제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영인고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나이에 그런 성취를 얻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고를 심고 나서 성취가 더 높아졌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우 사자 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투명했다. 마치 영혼의 저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양의심공 성취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모르지만 어미고의 영력이 강화되면 그 녀석도 더 못 버틸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현사와 합공을 한다면 그놈 하나는 충분히 죽일 수 있습니다.”
“죽이는 것보다 이용하는 게 훨씬 낫지. 그놈이야말로 젊고 능력 또한 출중하지 않는가? 게다가 신분도 아주 매력적이지.”
천주가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주 차지해 버리면 최선의 결과가 되겠지.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거둔 셈이야.”
“감축드립니다.”
천곡과 현사가 예를 취했다.
“이제 대업의 완성이 목전에 있네. 자네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천주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중양절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걸세. 더 이상 싸움이나 분쟁이 없는 세상이 될 걸세.”
천주가 천해각 아래 운해를 보며 말했다.
“나의 뜻을 이해할 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지.”
“새로운 세상이 열리면 모두가 천주님의 깊은 뜻에 절로 고개를 숙일 겁니다.”
천곡과 현사가 부복을 하며 외쳤다.
***
깊은 산중.
강소군이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낮이면 경공을 펼쳐 달리고 밤이면 깊은 산을 찾아 영인고와의 교류를 시도하였다.
‘이놈도 자아가 있을 것이다.’
강소군은 새끼고가 마냥 어미고의 통제만 받는 존재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강소군은 금단진공으로 봉인해 두었던 의식을 열었다.
“…!”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의식이 맑아지고 사물을 모두 분별할 수 있을 듯했다.
전신 내력이 흐르는 것 또한 느낄 수가 있었다.
강소군은 또 하나의 의식으로 새로이 연 의식을 지켜보았다.
분명 자신의 의식인데 우주와 연결된 듯 무한하였다.
모든 걸 알고 느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황홀한 감마저 들었다. 이대로 영원히 그 황홀감에 젖어 있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
강소군은 군웅각 고수들이 왜 그리 천령대법에 목을 매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소군이 의식을 추스르고 새끼고와 연결된 의식을 객체화하여 지켜보았다.
그 의식은 강소군의 것이자 새끼고의 것이다.
강소군은 새끼고와 연결된 의식으로 자신이 보았던 새끼고의 모습을 연상하였다.
그러자 새끼고가 꿈틀하였다. 마치 반발하는 듯했다. 자신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듯 저항하며 강소군 자신의 모습을 자기도 모르게 떠올렸다.
새끼고가 반응한 것이다.
‘이놈은 나를 자신으로 여기는 모양이구나.’
강소군은 마침내 실마리를 잡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