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218화 (218/250)

218

두 사람이 설왕설래하자 강소군이 끼어들어 말했다.

“십년지약이든 뭐든 의천맹에서 결정할 사안인 것 같소. 나는 의천맹의 뜻을 전하러 온 것이니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오.”

홍의발이 재빨리 강소군의 말을 낚아챘다.

“그럼 협정문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홍의발은 미리 협정문까지 써 둔 모양이었다.

‘제갈 장로가 앞으로 골머리 좀 앓겠군.’

강소군은 홍의발이 제갈선의 상대로 만만치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홍의발이 뒤에 있는 서탁으로 가더니 두루마리로 된 문서를 가져왔다.

“맹주님, 읽어 보시죠. 맹주님만 승인하시면 바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아직 협정 같은 걸 맺을 생각이 없다니까. 괜한 짓을 하는군.”

고장추가 인상을 찌푸렸다.

강소군도 고개를 저었다.

“흑천맹에서 뜻이 결정되면 따로 사람을 보내시오. 내가 미리 기별을 넣어 두겠소.”

강소군은 두 맹사이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검신 같은 분이 중재를 해 주시면 협정의 신뢰가 한층 높아질 것 같습니다만.”

홍의발이 강소군을 끌고 들어가려 했다.

강소군이 담담히 말했다.

“그랬다가 어느 한 쪽이 지키지 않으면 내 손으로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소.”

강소군의 말에 홍의발이 머쓱해져서 물러났다.

과거 조개량의 심복으로 있으면서 강소군의 손속을 경험해 본 홍의발이다.

혈마로서의 강소군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으니 입 닫고 물러났다.

“흥! 엄청난 자신감이군.”

고장추가 코웃음을 쳤다.

홍의발이 화들짝 놀랐다. 행여 고장추와 강소군이 부딪치는 일이 벌어질까 염려되어 재빨리 말했다.

“그건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맹주님께서 승인하시면 제가 직접 화친조약서를 들고 가도록 하지요.”

“그건 안 된다.”

고장추가 딱 잘라 말했다.

“홍 군사가 가는 건 좋지 않아. 여기 조 장로도 충분히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야.”

고장추는 홍의발이 의천맹에 갔다가 혹 화를 당할까 염려하였다.

강소군은 고장추가 홍의발을 무척 신임하고 아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됐든 화친은 이뤄지겠군.’

그때 바깥에서 황급히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뭐냐? 맹주님께서 계시는데!”

이제까지 한마디도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조왕천이 나서서 소리쳤다.

“강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수십 명이 나룻배 하나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 어디 패거리라더냐?”

조왕천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바깥에 있던 이가 주저하며 말했다.

“그걸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이 한심한 놈들! 우리 강에서 남들이 싸우고 있는데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냐?”

조왕천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흑천맹주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여긴 것이다.

장사로 들어오는 상강은 조양문의 영역이다.

조양문은 상강 일대 상선들로부터 들어오는 수입으로 먹고산다.

조왕천이 고장추를 향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가 봐야겠습니다. 어떤 놈들이 감히 조양문 영역에서 난동을 부리는지 혼쭐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장추가 심드렁하게 손을 젓는데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움이 벌어진 장소가 어디라고 하오?”

조왕천이 바깥에 있는 이에게 묻자 이십 리 하류 쪽이라고 했다.

강소군이 고장추에게 말했다.

“의천맹 뜻은 전달했으니 이만 가 봐야겠소.”

“연회를 준비했는데 드시고 가시오.”

고장추가 말했으나 강소군은 이미 대청 문을 열고 나가는 중이었다.

-휙!

강소군의 신형이 대청문을 나서자마자 사라졌다.

마치 사람이 그 자리에서 꺼져 버린 듯했다.

“헉!”

조왕천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홍의발의 눈빛이 반짝였다.

“조 장로님, 싸움이 벌어진 곳까지 같이 가시죠.”

고장추가 미간을 찌푸리며 홍의발을 바라보았다.

“남의 싸움에 왜 끼어들려고 그러는 거냐?”

“아무래도 강소군이 서둘러 간 이유가 그 싸움 때문인 듯합니다. 검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둬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그래? 나도 가 볼까?”

“아닙니다. 맹주님까지 나설 일은 아닐 겁니다. 제가 가서 보고 오겠습니다.”

***

장선백은 밤새 산을 가로질러 내려왔다. 눈앞에 작은 강마을이 나왔다.

마을 외딴집.

강 바로 옆에 있는 외딴집 앞에 나룻배가 매여 있는 게 보였다.

장선백이 주위를 살피며 나룻배로 다가가다 멈췄다.

집 마당에 어린 여자아이가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장선백이다.

“놀라지 마라.”

장선백이 황급히 말했다.

“어른 안 계시니?”

여자아이는 말없이 장선백을 바라보았다. 놀라서 입이 굳은 것 같았다.

눈이 무척 큰 아이였다.

“배를 빌려 줄 수 있겠니? 뱃값은 치를 터이니.”

장선백이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그가 다가가자 여자아이가 한 발 물러났다.

“괜찮아, 나쁜 사람 아니다.”

여자아이의 겁먹은 눈을 보며 장선백이 다시 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건장한 장년 사내가 나타났다.

“…!”

장선백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찬 검으로 다가갔다.

“안 돼! 아버지! 들어가! 들어가요!”

여자아이가 비명 지르듯 달려가 장년 사내를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쌍아, 놀라지 마라. 쌍아야. 아빠가 있잖아. 쌍아.”

장년 사내가 반무릎을 한 자세로 여자아이, 쌍아를 안으며 말했다.

장선백은 그의 말투가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딘가 모르게 어눌하였다.

그러고 보니 행동도 약간 굼떴다.

그러나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보시오. 급해서 그러니 배를 파시오. 돈은 넉넉히 쳐 드리겠소.”

그러나 장년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딸의 등만 두드렸다.

그제야 장선백은 사내가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장선백이 쌍아에게 말했다.

“쌍아, 해치지 않을 거야. 배만 빌려다오. 아저씨가 급히 가야 할 곳이 있단다.”

“가져가요! 그리고 오지 말아요.”

쌍아가 외쳤다.

장선백은 주저하다 전낭에서 은자를 한 움큼 꺼내 그 자리에 놓았다.

“어, 은자다. 은자!”

장년 사내가 은자를 보고 관심을 보였다.

장선백이 나룻배로 내려갔는데 노가 보이지 않았다.

“노, 노를 저어야지. 내가 태워 주지.”

은자를 챙긴 장년 사내가 노를 들고 다가왔다.

그 뒤를 쌍아가 울상을 지으며 따라왔다.

“장사까지만 태워 주시오.”

“장사 멀지 않아. 은자, 좋아. 태워주지.”

장년 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배를 띄우자 쌍아도 함께 탔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아버지만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룻배는 고기 잡는 배였다. 투망과 낚싯대가 뱃머리 아래 있었다.

배가 강가를 따라 올라갔다.

쌍아는 아버지 옆에 붙어서 작은 노를 저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니?”

쌍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선백도 더 묻지 않았다.

실은 더 이상 대화를 할 상태가 아니었다.

연이은 격전으로 내력이 바닥났다. 크고 작은 부상이 여럿이다. 여기까지 쓰러지지 않고 온 것만도 다행이었다.

장선백은 뱃머리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였다.

온몸이 쓰리고 아팠다. 호흡을 하며 운공을 하였지만 모이는 내력은 미미하였다.

배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장선백은 운기조식을 하다 말고 눈을 떴다.

장년 사내가 노를 저을 때마다 배가 쑥쑥 앞으로 나간다.

‘힘이 장사군.’

어느덧 해가 한복판에 떴다.

-쉭!

허공을 가르고 갈고리가 날아왔다.

-챙!

장선백이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갈고리를 후려쳤다.

-투툭!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갈고리는 배를 끌어당기는 데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강가에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그들 손에 갈고리가 들려 있었다.

-쉬익!

다시 갈고리들이 날아왔다. 나룻배를 강가로 끌어당기려는 것이다.

“강 복판으로!”

장선백이 날아오는 갈고리를 쳐내며 노를 젓는 장년 사내에게 외쳤다.

장년 사내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였다.

“아버지, 저기로!”

쌍아가 열심히 노를 저으며 장년 사내에게 강 한복판을 가리켰다.

장년 사내가 노를 젓자 배가 강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쇠뇌에서 발사된 짧은 화살이 날아왔다.

“아악!”

쌍아가 놀라 소리쳤다.

장선백이 침착하게 검을 휘둘렀다.

-타악! 따닥!

화살들이 빗겨 나갔다.

그사이 배는 강 한복판에 이르렀다.

장선백이 주위를 살펴봤다.

어선과 상선들이 흩어지는데 위에서 세 척의 배가 내려오고 있었다.

적어도 이삼십 명은 타는 중급 상선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이쪽을 향해 직진하는 걸 보면 결코 상선이 아니었다.

“이런!”

장선백이 검을 쥐고 뱃전에 섰다.

역시 금의위였다.

금의위의 추적은 지옥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끈질기다는 뜻이다.

장선백이 하류 쪽을 보니 그쪽에서도 세 척의 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강 한복판이다.

게다가 고기잡이 어부와 어린 딸이 함께 있다.

장선백이 장년 사내에게 말했다.

“강가로! 강가에 배를 대시오.”

“아버지, 어서 가요!”

쌍아가 열심히 노를 저었다.

장년 사내는 무슨 상황인지 잘 몰랐지만 어린 딸이 허둥지둥 노를 젓자 덩달아 힘껏, 노를 저었다.

배는 쏜살같이 강가로 갔다.

배가 강가에 닿을 무렵 장선백이 쌍아에게 말했다.

“아버지를 모시고 돌아가렴.”

장선백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피이잉!

짧은 쇠화살이 날아왔다.

장선백이 황급히 검을 저어 화살을 튕겨냈다.

그사이 배는 미끄러지듯 강가에 닿았다.

장선백이 배를 발로 힘차게 밀며 쌍아에게 소리쳤다.

“어서 가라!”

장선백은 부녀가 이 싸움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았다.

배는 강으로 쭉 밀려 나갔다.

그 틈을 이용해 강가에 선 장선백이 검을 늘어뜨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강가를 따라 작은 길이 있었다. 위아래 쪽에서 수십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경갑을 입은 이들은 누가 봐도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금의위 위사들은 어림잡아 수십 명이었다. 저들 뒤에는 다시 수백 명이 있을 것이다.

“….”

장선백은 절망감을 느꼈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쫓아온다.

장선백이 검을 늘어뜨린 채 그들을 기다리며 뒤를 돌아봤다.

강 한복판으로 밀려나는 배 위에서 쌍아가 장선백을 보고 있었다.

쌍아의 큰 눈에 왠지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파아앙!

강기슭 양쪽에서 쇠갈고리가 쏘아져 가는 게 보였다.

“…!”

장선백이 몸을 솟구치며 쌍아의 배를 향한 쇠갈고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팍!

한쪽 쇠갈고리를 끊어냈으나 다른 한쪽이 나룻배를 끌어당겼다.

장선백이 다른 쪽 쇠갈고리를 끊으러 가는데 어느새 다가온 금의위들이 덮쳐 왔다.

-채챙!

-파파팍!

장선백이 덮쳐든 금의위를 상대로 검을 휘둘렀다.

“크윽!”

검으로 찍어 누르듯 달려들던 금의위가 가슴이 베여 쓰러졌다.

그 틈으로 십여 검이 찌르고 들어왔다.

장선백이 뒤로 몸을 굴렸다. 그가 굴러간 방향이 공교롭게도 강 쪽이었고 쌍아의 부녀가 탄 배가 닿은 곳이었다.

“아저씨!”

쌍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선백이 검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그 사이 금의위들이 도열하여 진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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