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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걸아가 객잔 반점으로 들어서다 흠칫, 놀랐다.
반점에 사람이 가득하다. 자리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데 빈의자가 없다.
‘뭐지? 왜 이리 조용해?’
소걸아는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이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 무척이나 조용하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목소리를 죽여 이야기를 하니 더욱 괴기스러웠다.
마침 춘삼이 지나갔다.
소걸아가 춘심을 잡아끌고 뒷마당으로 나가 물었다.
“저 안에 있는 놈들 다 뭐냐? 왜 이리 조용한 거야?”
춘삼 역시 소리죽여 말했다.
“우리 객잔에 검신께서 머물고 있잖아.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온 거지.”
강소군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은 장사는 물론 일대에 쫙 퍼졌다. 하오문에서 작정하고 퍼뜨린 것이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이들이 강소군을 보고자 찾아왔다.
“그래? 이거 다 내 덕이잖아? 한턱내라고.”
강소군을 이 객잔으로 데려온 공로를 알아주라는 듯 소걸아가 어깨를 으쓱하였다.
춘삼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였다.
“그게… 돈이 안 돼.”
“엥? 왜?”
“아침부터 와서 죽치고 있어서 다른 손님이 와도 받을 수가 없잖아. 오히려 손해 보는 거 같아.”
“그, 그게 그리 되나?”
소걸아가 머쓱해하였다.
“무림인들이 저렇게 다소곳한 건 처음 봐. 그래도 무림인들이잖아? 쫓아낼 수도 없고.”
춘삼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인 이들이 이렇듯 조심스럽게 구는 건 강소군이 검신 이전에 혈마로 불렸던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여 찾아왔으나 횡액은 당하고 싶지 않으니 조심하는 것이다.
소걸아는 강소군이 머무는 후원 객실로 갔다.
“형님, 찾으셨습니까?”
넉살 좋게 강소군에게 형님이라 부른다.
강소군은 피식, 웃었으나 뭐라 하지 않았다. 지금 아쉬운 처지는 강소군이다.
“나를 형님이라 했으니 앞으로 동생으로 대해도 괜찮겠나?”
“당연하지요. 우리는 혈전으로 맺어진 사이 아닙니까?”
“혈전?”
“남경에서의 일전을 잊으셨습니까?”
“아, 그렇군.”
남경에서 노산사흉과 싸운 걸 혈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소걸아 덕분에 진연을 구했으니 은인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 부탁 좀 해야겠다.”
“예?”
“개방이 사람도 잘 찾는다고 들었다. 장선백이라는 자로 과거 장홍 대장군가의 후예다.”
“장선백?”
소걸아가 되물으며 주저하였다.
“왜 그러는가?”
“개방은 조정의 일에는 간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소걸아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번천맹이라고 들어 봤는가?”
“네. 언제부터인가 간간이 들리긴 하는데 실체가 불분명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번천맹의 맹주를 찾아달라면 되겠나?”
“아….”
소걸아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
강소군이 전낭에서 전표를 꺼냈다.
소걸아가 손사래를 쳤다.
“개방은 의와 협으로 일하지 돈 받고 하는 하오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눈길은 이미 강소군 손에 들린 전표에 꽂혀 있었다.
“그런가? 이건 의뢰비가 아니라 형제들하고 식사나 하라는 뜻인데?”
“그럼, 받아야죠.”
소걸아가 넙죽 받았다.
“이 일은 하오문에게도 의뢰를 했네.”
“예? 그놈들은 질이 안 좋은데… 의뢰인을 등치는 놈들이라고요.”
“그럴 염려는 없는 사람이네.”
강소군은 초연이 자신의 뒤통수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마지막 행적을 알 수 있습니까?”
소걸아는 하오문과 경쟁을 한다니 호승심이 이는 모양이었다.
“경성을 나와 이쪽으로 오는 중이라는데 자세한 행적은 모르고 있다네.”
“알겠습니다. 당장 사발통문을 돌리겠습니다.”
소걸아가 나갔다.
강소군은 그 자리에서 곰곰 생각에 잠겼다.
조왕천 말이 장사 지부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했다. 금의위의 추적이 아직까지 미치지 않은 것이라 봐야 한다.
‘선백, 어디 있는가?’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장선백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급해졌다.
고장추와의 약조가 아니라면 직접 찾아 나섰을 것이다.
우완청은 장선백이 장사로 올 것이라 하였다.
번천맹이 운남을 나와 가장 먼저 안가를 마련한 곳이 장사라고 했다.
다만 우완청 역시 번천맹의 안가가 정확히 어디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무사하기만 해라.’
***
-채챙!
-콰악!
“크윽!”
마지막 추격자가 쓰러졌다.
장선백은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금의위는 끈질기게 쫓아왔다. 수천 리에 걸쳐 도주하는 동안 수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고 도주하던 지난날이 절로 떠올랐다.
“퉷!”
장선백이 입에 머금은 피를 뱉고는 산능선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 왼쪽으로 장사성이 보였다.
행적이 노출된 이상 가는 길이 모두 막혔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장선백이 우회로를 찾았다.
일단 장사성 안가까지 가야 한다. 흩어진 동지들의 행방과 그들이 필요한 도주 자금이 안가에 있을 것이다.
가면서 적을 떨치려면 아무래도 우회하여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장선백의 눈에 강가의 마을이 들어왔다. 그곳에서 배를 타면 될 것 같았다.
장선백은 행로를 결정하자마자 산을 넘었다.
***
“모시러 왔습니다.”
조양문의 무인들이 객잔 앞에 도열하였다.
강소군이 그들을 따라 조양문으로 갔다.
커다란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양편으로 무인들이 도열하여 제법 기세가 등등하였다.
조양문의 힘을 보여 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강소군은 도열한 무인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갔다.
대청의 모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대청 중앙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이는 고장추였다.
조왕천은 고장추의 오른편에 앉았고 왼편에는 홍의발이 자리했다.
대청 앞에는 고장추가 데려온 흑천맹 직속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강소군이 대청에 오르자 고장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시오. 검신께서 흑천맹을 찾다니 영광이오.”
고장추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놀랍군. 그 사이 화경을 넘어서다니.’
강소군은 그가 천무방과 싸우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절정에서 화경을 오가던 경지였는데 지금 보니 현경을 넘보는 고수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흑천맹의 위세가 대단하오.”
고장추 역시 강소군을 살폈다. 그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강소군의 무위를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경지란 말인가?’
오죽하면 그 나이에 검신이라는 별호를 얻었을까?
고장추는 직접 보자 별호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장추는 그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는 사내였다.
“검신의 무공이야말로 내가 짐작도 못한 경지에 이르렀구려. 한 수 가르침을 부탁할 수 있겠소?”
강소군이 고장추를 보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고장추를 패도적이라고 하더니 정말 물불을 안 가리는 싸움꾼인 듯했다.
“맹주의 경지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소.”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성인도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검신의 가르침이라면 달게 받겠소.”
고장추가 뜻을 굽히지 않으려 하자 홍의발이 나섰다.
“맹주님, 두 분의 무공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분들입니다. 논검은 따로 조용히 나누시고 오늘은 검신께서 찾아오신 이유를 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홍의발에 말에 고장추가 한발 물러났다.
“군사의 말이 맞군. 손님이 오자마자 비무부터 청하다니. 내가 좀 이렇다오.”
“꾸밈이 없어 좋소.”
“그게 우리 흑도의 장점 아니오. 적어도 백도라는 탈을 쓰고 뒷구멍으로 온갖 패악을 부리는 위선자들은 아니오.”
“그럴 것 같소.”
고장추의 신랄한 말에 강소군이 덤덤하게 받아넘겼다.
강소군은 백도도 흑도도 아니다. 그에게는 모두 백성이다. 어려서부터 황실의 인척으로 살다 보니 자연스레 밴 사고방식이다.
“하하. 우리는 말이 통하는 것 같소.”
고장추가 자신의 말에 강소군이 수긍하자 기분이 좋아서 크게 웃었다.
고장추가 손을 들자 대청의 문이 닫혔다.
그러자 너른 실내에 고장추와 홍의발, 조왕천과 강소군만 남았다.
“자, 나를 부른 용건을 들어 봅시다.”
고장추는 역시 성질이 급했다. 강소군도 굳이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의천맹주의 뜻을 전하러 왔소. 흑백 동맹을 맺고 천황성을 치자고 하오.”
고장추가 미간을 찌푸렸다.
“흑백 동맹?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천황성은 나의 적이오. 내 손으로 갚아야 할 빚이 많소. 우리는 우리 식으로 천황성을 상대할 것이오.”
완곡한 거절이었다. 그나마 홍의발이 여지를 남겨 달라고 간곡하게 말해 이 정도였다.
그러나 강소군은 그런 사정까지는 몰랐다.
게다가 그가 아쉬울 건 없었다.
“그렇게 전하겠소.”
간단히 대답하니 홍의발이 조급해졌다.
“잠시만, 맹주님!”
홍의발이 자리에서 일어나 읍을 하며 말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천황성을 상대하는데 흑백 양도가 함께한다면 그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황성이 철천지원수인 것은 맞지. 하지만 백도도 우리 적 아닌가?”
“굳이 백도와 등지고 지낼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무림은 오래도록 흑백 양도가 공존해 왔습니다. 서로 싸울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강소군이 홍의발을 보았다.
제법 영민한 자였다. 홍의발의 말은 강소군 들으라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강소군에게 흑백 양도가 공존하는 무림이 흑천맹의 뜻이라는 걸 의천맹에 전하라는 의미였다.
홍의발이 강소군을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지난날 의천맹을 공격한 것은 맹주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 것입니다. 천황성이 수작을 부린 것이지요.”
“….”
“맹주님께서는 백도를 달가워하지 않으시지만 흑백 양도가 서로를 말살하고자 대립하는 것 또한 원치 않으십니다.”
고장추는 홍의발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홍의발이 사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용납해 달라고 간청했기에 듣기만 하였다.
“흑백 양도가 동맹을 맺기란 쉽지 않습니다. 의천맹주의 뜻이 그러하다 하더라도 소속 문파들이 모두 따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지요. 그러나 천황성은 무림의 적이니 흑백양도를 따지기 전에 협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
“협력을 하려면 서로 협정을 맺어야겠지요. 이를테면… 십 년간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조를 맺는다면 좋을 듯합니다만.”
강소군은 홍의발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대파와 세가들이 참여한 의천맹에 비해 흑천맹은 고수가 부족하다.
십 년 약조를 맺어 둠으로써 세를 다질 시간을 벌겠다는 뜻이다.
“십 년? 그건 너무 긴데?”
그런데 오히려 고장추가 인상을 찡그리고 반발하였다.
“맹주님, 흑천맹을 세우신 선대 맹주님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선대 맹주님이 원하신 것은 흑도가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 무림이었습니다. 흑백 양도가 혈전을 벌이는 걸 원하신 건 아니잖습니까?”
강소군이 홍의발을 유심히 보았다.
고장추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걸 보면 꽤나 신임을 얻는 자인 모양이다.
“나도 싸움을 원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백도가 흑도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십년불가침 약조에는 그런 조항도 들어가야 하겠지요.”
홍의발이 달래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