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장선백은 지난날 수하 장수들과 따르는 무림인들을 모아 번천맹을 결성하고 중원으로 나왔다고 했다.
그를 사모했던 우완청은 장선백의 상대가 황제라는 사실을 알고 걱정이 되어 뒤따라 온 것이다.
“경성까지 갔는데 금의위에 쫓기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어요.”
“금의위에?”
강소군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를 암살하려다 발각된 듯해요. 자세한 경위는 몰라요.”
칠독문은 운남과 월국 경계에 있는 이민족의 문파다. 그러니 소식을 알아보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아니, 원래 황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부분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황제의 암살 같은 사건도 금의위가 나서서 비밀리에 관련자를 처단하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바깥으로 퍼지면 퍼질수록 정정이 불안해진다는 이유다.
무림이 천황성으로 인해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동안 황실과 조정도 변고를 치르는 모양이다.
강소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선백, 기어이 복수를 하려는 게냐?’
역적의 누명을 벗는 것과 황제를 암살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번천맹 사람들이 호남으로 피했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오는 길이에요.”
“선백이 이리로 왔다는 거요?”
“확실치는 않아요. 다만 거사가 실패했다면 다시 운남으로 가지 않을까요?”
“….”
“장 장군은 강 공자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답니다. 두 분이 죽마고우라고 들었어요.”
강소군이 눈을 감았다.
‘나 장선백이야. 네가 강소군이라며?’
눈이 유난히 많이 내렸던 어느 날.
장영영과 함께 강부를 찾았던 장선백의 모습이 떠올랐다.
‘선백, 어디 있는 거냐?’
강소군이 기억 속의 장선백에게 물었다.
장선백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
“조 장로가 무슨 일로 보자던가?”
연무장에서 나온 고장추가 홍의발에게 물었다.
묵영신공이 극에 달하며 검붉었던 그의 얼굴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온종일 수련에 매진했다.
흑천맹을 복원하는 일은 홍의발이 도맡아서 했다.
“강소군의 전갈을 가져왔답니다.”
“강소군? 그자가 왜?”
고장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소군은 지금 의천맹과 공동으로 천황성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화친이나 제휴를 하자고 온 걸 겁니다.”
“화친? 제휴?”
“적의 적은 우리 편이 될 수 있지요. 우리로서도 득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흥! 어림없다. 천황성은 내 손으로 깨야 한다. 다른 누구도 넘볼 수 없지.”
고장추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등 노사에 의해 아버지 고선이 죽고 사매 조비연은 자신을 구하려다 권황에게 당했다.
고장추는 천황성을 자신의 손으로 쓸어버리고자 한계를 넘어선 수련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주화입마에 빠져 마인이 되지 않은 건 순전히 홍의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의발은 온갖 영약을 구해 갖다 바치며 고장추의 성취를 높이는 중이다.
조비연이 죽은 뒤 고장추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홍의발만큼은 신임하였다.
“일단 조 장로부터 만나 보시죠.”
고장추가 대전 객청으로 가자 조왕천이 오락가락하다 재빨리 포권을 하였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앉읍시다.”
고장추가 자리를 내주었다.
“강소군의 전갈을 가져왔다고?”
“강소군이 장사에 왔습니다. 그리고 조양문을 찾아와 맹주님을 뵙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조왕천은 강소군과의 만남을 적당하게 둘러댔다.
“그래 뭐라던가?”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다고 해서….”
“아니, 흑천맹 장로께서 그놈의 심부름꾼 역할만 하러 오셨단 말이오? 무슨 의도인지는 알아보셨어야지.”
조왕천이 강소군에게 왜 만나려는지 물을 처지가 아니었던 걸 모르는 고장추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쁜 뜻으로 찾아온 것 같지 않은데 굳이 추궁하려다 서로 안면을 붉힐까 봐….”
“됐소.”
고장추가 손을 저었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흑도가 아니오. 정파에서 그동안 흑도를 괄시하였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못할 것이오. 흑천맹이 있는 한 흑도도 당당히 어깨를 펴고 살 거요.”
“하하… 그렇지요. 그래서 흑천맹으로 모인 게 아닙니까.”
조왕천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요즘 들어 왜 이리 젊은 고수가 많은 거야?’
강소군이나 고장추나 자신보다 한창 연배가 아래다.
‘내가 칼을 들고 피바다를 헤쳐나갈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들이….’
그저 모든 게 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조왕천은 입맛이 썼다.
흑도에 몸담은 숙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어디서 보자고 하오?”
“맹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답니다.”
“흠….”
고장추가 미간을 찌푸리자 홍의발이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맹주님이 나가서 만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본맹은 되도록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고장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군. 그러면 내가 장사로 갈 테니 기다리라고 하시오.”
“오, 직접 오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장사 흑도의 영광일 겁니다. 준비를 해 놓겠습니다.”
조왕천이 찾아온 바를 이루자 바로 일어났다.
***
기루는 오 층이나 되었다.
강소군은 기루 뒤편 별실에 앉아 있었다.
조촐한 술상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분 냄새와 함께 여인이 들어섰다.
강소군이 흠칫, 놀랐다.
“당신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군.”
“시끄러운 곳에 제가 있지요.”
배시시 웃는 이는 낙서생의 심복 초연이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강소군도 초연이 하오문에서 지위가 상당하다는 걸 안다. 그러니 장사에 와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아무튼 이야기가 잘 풀릴 것 같았다.
“천황성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하셨는데 본인께서 더 잘 아시니 소식을 따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문주를 두어 차례 봤소.”
초연이 흠칫,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여간해서 남 앞에 나서지 않으시는 분인데 의외로군요.”
초연이 화제를 돌렸다.
“무슨 일로 하오문을 찾으셨는지요?”
“사람을 하나 찾아봐야겠소. 장선백. 지난날 장연보 대장군가의 마지막 손이오.”
“….”
강소군은 흑천맹의 소식을 기다리는 중에 장선백을 수소문해 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하오문을 청한 것이다.
초연이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는 잔에 술을 따랐다. 이어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금의위가 쫓는 사람이군요.”
“그를 아오?”
초연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천장과 벽에서 누군가 사라지는 기척이 났다.
“괜찮소. 소리가 새어 나가지는 않을 거요.”
“역모와 관련된 자이니 조심해야죠. 금의위가 혈안이 되어 연루된 자는 모조리 죽이고 있답니다.”
강소군이 확인 차 다시 물었다.
“그가 황제를 암살하려던 게 맞소?”
“자세한 건 모릅니다. 다만 얼마 전 누군가 황제의 침궁에 몰래 잠입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으음….”
“그 뒤로 동창과 금의위에서 쫓고 있습니다.”
“동창까지? 그럼 이미 잡혔을 수도 있겠군.”
강소군이 미간을 찌푸렸다.
동창과 금의위가 천라지망을 펼치면 빠져나올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장선백이 잡혔다고 해도 그 사실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강소군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장선백의 무공을 믿었다.
하지만 숱한 고비와 기연을 겪어 절대지경에 이른 자신에 비할 바는 못될 것이다.
초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번천맹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선백, 아니 장 맹주라고 부르기로 하지요. 번천맹은 장 맹주가 지난날 장 대장군을 따르던 장졸들을 규합한 비밀결사죠.”
“그렇다고 들었소.”
“번천맹의 실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방에 헛소문을 퍼뜨려 동창과 금의위가 번번이 허탕을 쳤지요.”
강소군이 문득, 초연을 유심히 보았다.
아무리 하오문이지만 이런 사실까지 아는 게 이상했다.
강소군의 시선을 느꼈는지 초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가 번천맹의 의뢰 때문입니다.”
“…?”
“하오문 몇몇 지부가 금의위에게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본 일이 있었습니다.”
“금의위가 하오문을?”
“처음에는 몰랐지요. 지부의 일까지 세세하게 간여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동시에 그런 일이 벌어져 조사했더니….”
“….”
“피해 본 지부마다 누군가 찾아와 사람 하나를 피신시켜 달라고 했답니다.”
하오문은 단순히 정보만 수집하여 파는 문파는 아니다.
암살이나 방화 등의 청부까지 맡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건 지난 일이고요. 지금 문주님은 그런 일은 좋아하지 않으세요. 혹시 모르죠. 하오문이 워낙 널리 퍼져 있다 보니 그런 일을 하는 곳도 있을지.”
초연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지부들은 청부받은 사람을 호송하다 금의위 고수들에게 당했죠. 그래서 청부한 자들의 뒤를 파 봤는데 배후에 번천맹이 있더군요.”
강소군은 대충 짐작이 갔다.
장선백을 피신시키기 위해 번천맹은 몇 사람을 위장시켜 엉뚱한 곳으로 금의위를 유인한 것이리라.
하오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일을 맡았다가 뜻하지 않은 피해를 본 것이다.
“하오문이 번천맹에게 보복이라도 할 셈이오?”
초연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위험을 감수하고 의뢰받은 일이니 굳이 따질 건 아니지요. 하지만 계산이 좀 틀린 것 같아서요.”
하오문 지부가 세 곳이나 뒤집어졌다고 한다. 그 값을 제대로 받아내야겠다는 뜻이다.
“그대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장선백이 이리로 피신했다는 뜻이겠군.”
강소군이 대뜸 스친 생각을 말했다.
“그런데 종적이 묘연하답니다. 하오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강소군의 마음이 약간 놓였다.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장사에는 변복을 한 동창과 금의위 고수들이 쫙 깔려 있답니다.”
“장선백을 찾을 수는 있겠소?”
초연이 강소군을 빤히 보다 되물었다.
“그와는 어떤 사이이신지요?”
“죽마고우요.”
강소군이 사실대로 말했다. 이상하게 낙서생이나 초연은 믿을 수 있었다.
아니, 초연이 알려고 들면 바로 알아낼 수 있을 터이니 굳이 숨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시군요.”
초연이 빙긋 웃었다.
“그렇다면 잘됐군요.”
“….”
“엊그제 객잔에서 조양문과 한판 하셨으니 곧 강 공자님이 장사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천하를 울리는 검신 대협이 나타난 거니까요.”
“….”
“장 맹주도 강 공자님을 지기라고 여긴다면 찾아오지 않을까요?”
초연은 확실히 머리가 뛰어났다.
“오셔서 저희 일을 해결해 주시네요.”
초연이 다시 술을 따르며 웃었다.
***
강소군이 객잔으로 돌아오니 조왕천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만간 맹주님께서 직접 장사로 오시겠다고 했소.”
조왕천은 맡은 바 일을 무사히 해결해서 후련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강소군을 다시 만날 일이 없으니 마음이 놓인 것이다.
“수고하셨소.”
강소군이 치하하다 말고 말했다.
“조양문이 장사 제일의 문파라고 하셨소?”
“감히 검신의 명성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장사 부근에서는 제법 이름이 있지요.”
“근자에 새로이 나타난 무인들이 있을 거요. 동창이나 금의위 무인들일 터인데 변복을 하고 있으니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인데….”
“금의위가요?”
조왕천이 흠칫, 놀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금의위의 악명은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높다. 특히 흑도들은 무조건 피하고 본다.
“그들이 동태를 파악할 수 있겠소?”
조왕천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인연이 오래갈 것 같았다.
“장사에 있다면야… 알아낼 수 있지요.”
조왕천은 마지못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