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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215화 (215/250)

215

바깥이 잠시 소란스럽더니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어느 고인이 장사를 방문하셨소? 조 모가 뵙기를 청하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객잔 앞에 수많은 무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무인들은 횃불을 들고 있는데 골목 바깥까지도 횃불 행렬이 이어져 대낮처럼 밝았다.

조양문주 조왕천은 강소군을 보자 얼굴이 굳었다.

‘…!’

조왕천은 흑천맹이 의천맹을 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기에 강소군의 얼굴을 알았다.

조왕천은 잠시 아찔하였다.

강소군은 절대고수다. 조양문 정도는 하룻밤 안에 멸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조왕천은 조양문이 최대 위기를 맞았음을 깨달았다.

‘호사다마라더니.’

의천맹으로 몰려갔던 흑천맹 흑도가 절반이 넘게 죽으며 판세가 바뀌었다.

문주가 살아 돌아온 조양문은 승승장구하여 장사의 패자가 되었고, 주변까지 영역을 넓혔다.

문파가 커지며 흑천맹 장로 자리까지 꿰찼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강적을 만났다.

조왕천은 차라리 자신이 오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아들만 희생하는 걸로 끝났을 텐데 이제는 조양문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검신 강 대협이셨군.”

검신이라는 말이 조왕천의 입에서 나오자 정적이 흘렀다.

당금 강호를 진동시키는 정파의 절대고수.

천외천이라는 천황성 고수들을 도륙한 고수 중의 고수.

객잔 안에 있던 조고와 붉은 망사의 여인도 놀라 강소군의 뒷모습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무공을 익힌 흔적도 없는 대갓집 공자 같은데 검신이라니.

조고는 자신의 눈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눈이 있어도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화를 자초한 것이다.

“강 대협이 오신 줄 알았더라면 진작 마중 나왔을 것인데 결례가 많았소.”

조왕천이 깍듯하게 예우하였다.

소걸아가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이름이 나고 봐야 돼. 조 문주가 저렇듯 수그리는 건 처음 보네.”

강소군이 조왕천에게 말했다.

“우리는 길이 다른데 어찌 마중을 기대했겠소. 들어오시오.”

강소군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왕천이 잠시 망설이다 이를 악물었다.

그 역시 흑도 일문의 수장이다.

수하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너희는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라.”

조왕천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큰아들 조고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평상시라면 당장 칼을 뽑았을 상황이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왕천이 잠시 생각하다 자신도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조고가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 건 처음 본 것이다.

강소군이 물끄러미 조왕천을 바라보았다.

일문의 문주가 무릎을 꿇다니 흔치 않은 결정이다.

정도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힘이 지배하는 흑도에서는 있을 수 있었다.

그래도 조양문 정도의 문파 수장이자 흑천맹 장로가 무릎을 꿇은 건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아들이 잘못했으니 아비로서 응당 책임을 지겠소. 다만 작은 놈이 독에 당해 목숨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큰놈까지 죽는다면 평생 살아온 이유가 없어지고 마오.”

“남의 목숨을 노렸으면 목숨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강호의 법도 아니오?”

조왕천이 칼을 뽑아 앞에 놓았다.

“목숨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눈물겨운 부정이었다. 정도의 인물들도 쉽게 이런 말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강소군이 조왕천을 유심히 보았다. 으레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강소군이 한숨을 쉬고는 조고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를 잘 두었군.”

조고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절대고수라고 하더라도 피와 살로 이뤄진 인간이다. 칼을 맞으면 죽는다. 차라리….’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강소군이 어디를 어떻게 짚었는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정은 내가 내릴 수 없지. 소문주가 노린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강소군이 붉은 망사 여인을 보며 말했다.

붉은 망사 여인은 대답 없이 강소군을 빤히 바라만 보았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소걸아가 붉은 망사 여인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미인은 영웅을 따르는 건가? 소걸아, 너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강소군이 자신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자 붉은 망사의 여인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저도 굳이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무고한 사람까지 죽이려 한 건 용서할 수 없군요.”

붉은 망사 여인이 일어나더니 품에서 약병을 꺼냈다.

모두가 붉은 망사 여인을 주시하였다.

붉은 망사 여인이 환약을 하나 꺼내 조고에게 먹였다.

“독하구나. 패배를 인정했는데 끝내 죽이려 하다니!”

조고가 이를 갈았다.

소걸아가 끼어들었다.

“그건 소문주가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이 객잔을 불태우려 했다며? 따지자면 그게 더 악독한 짓이지.”

조고는 대꾸하지 못했다.

붉은 망사 여인이 말했다.

“이건 당장 죽는 독약이 아니에요. 하지만 일 년 안에 반드시 해약을 복용해야 하죠.”

“뭘 원하는 건가?”

“일 년 안에 칠독문으로 찾아와 해약을 받아 가세요.”

“….”

조고는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칠독문의 본거지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당가는 식솔이 해를 입으면 열 배를 갚는다죠? 칠독문은 그렇게까지 독하지는 않죠. 하지만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아요.”

“….”

“이번 일은 조양문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지요. 전후 사정은 조양문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해요. 이게 제가 베풀 수 있는 최선이에요.”

붉은 망사 여인의 말에 소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칠독문에 선녀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자신을 죽이려 한 자를 용서하다니. 내가 다 부끄러워지네.”

조고는 이죽거리는 소걸아를 쳐 죽이고 싶었다.

말은 못 하고 원한 어린 눈으로 붉은 망사 여인과 소걸아를 번갈아 보았다.

“아이고, 무서워라. 아무래도 후환이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소걸아가 강소군을 보며 죽이는 게 어떠냐, 고 말하려 하자 조왕천이 끼어들었다.

“칠독문에서 아량을 베풀어 주신 점 감사하오. 내가 반드시 소문주를 칠독문으로 보내겠소.”

조왕천은 일단 목숨을 붙여 살아 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자신이든 아들이든 누구 하나 죽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살 구멍이 생기자 냉큼 받아들였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오늘 일은 이렇게 마무리합시다. 조 문주는 일어나서 이리 앉으시오.”

조왕천이 일어나 강소군이 있는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조고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강소군이 조왕천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조 문주가 흑천맹 장로라고 들었소만.”

조왕천이 술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아무리 절대고수라지만 아들뻘 되는 자에게 무릎을 꿇은 게 치욕스러웠던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차라리 죽을 때까지 싸웠을 텐데.’

그 역시 한때 낭인이었다. 여기저기 숱한 싸움판을 떠돌다 장사 한 귀퉁이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그저 뜻 맞는 몇몇이 모인 패거리였으나 점차 세가 커지며 조양문이라는 문파를 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장사 일대에서는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조양문이 커질수록 그가 고개 숙여야 할 곳이 점점 더 늘어간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관리들에게 머리 숙여 뇌물을 바쳐야 하고 자신보다 더 큰 문파에 상납도 해야 한다.

자식이 생기고 문파가 안정되며 젊은 날 가졌던 웅지는 사라지고 사업과 영역 다툼에 몰두하였다.

‘칼 한 자루로 천하를 호령하는 무인의 길을 걷고자 했건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자괴감이 들었다.

“조 문주?”

강소군은 조왕천이 자신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자 재차 물었다.

조왕천이 퍼뜩, 정신 차렸다. 아직 상황이 끝난 게 아니다.

사신이 그 자리에 여전히 앉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 그건 흑천맹주께서 서열상 내려준 것일 뿐이오. 별 관계가 없소.”

조왕천이 애써 흑천맹과의 관계를 부인하려 들었다.

“그렇소?”

강소군이 미간을 찌푸렸다.

‘헉? 잘못 대답했나?’

조왕천이 강소군을 보며 별생각을 다 했다.

“그건 왜 묻는 것인지….”

“고장추를 만나야겠는데 다리를 놓아줄 수 있나 물어보는 거요.”

조왕천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살아난 진정한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연락을, 아니 제가 직접 가서 말씀드리지요.”

강소군이 그제야 얼굴을 풀며 말했다.

“수고해 주시면 고맙겠소.”

“그런데 왜, 맹주님을 만나려는 건지….”

“싸울 생각은 아니니까 염려 마시오.”

그제야 조왕천이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문으로 모시겠습니다. 이삼 일만 기다리시면….”

“아니오. 나는 여기 있을 것이오. 누가 또 이 객잔을 불태우려 들지 모르잖소.”

강소군이 슬쩍 조고를 보며 말했다.

조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조왕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신의 면전에서 한시라도 빨리 물러나고 싶었다.

“그럼 바로 연락 드리겠소.”

조왕천이 조고의 가슴 요혈을 쳤다.

-퍽! 퍼퍽!

그런데 혈도가 풀리지 않았다.

강소군이 손가락을 튕겼다.

-퍽!

조고는 혈도가 풀리자 곧바로 일어나 포권을 하였다.

“가자!”

조왕천이 조고에게 이르고는 밖으로 나갔다.

소걸아가 그 뒷모습을 보다 강소군에게 말했다.

“많이 변하셨군요.”

“…?”

“혈마에서 검신으로 별호가 바뀌어서 그런 걸까요? 피 냄새가 옅어졌는데요?”

소걸아가 코를 킁킁, 거리며 냄새 맡는 척을 하였다.

강소군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람 많이 죽이면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단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붉은 망사의 여인이 먼저 일어나 포권을 하였다.

“잠깐 말씀을 나눌 수 있을는지요?”

“…?”

“자리를 옮기실 수 있나요?”

붉은 망사의 여인이 말하자 소걸아가 일어났다.

“그럴 것 없어요. 제가 피해 드리죠. 가서 마저 자야 내일 또 일하죠.”

소걸아가 가고 나자 춘삼 등 객잔 사람들도 들어갔다.

강소군이 자리에 앉아 담담한 시선으로 붉은 망사 여인을 보았다.

“제 이름은 우완청이라고 합니다.”

붉은 망사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혹시 남경부 강휘 공자님 맞습니까?”

강소군이 흠칫, 놀랐다.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렇소만….”

강소군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우완청이 말을 잇는데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지기 중에 장선백, 장 장군이 있는 분 맞습니까?”

강소군의 눈에 섬광이 스쳤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처음 보는 이에게 장선백의 이름을 들은 것이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선백과는 어떤 관계요?”

우완청은 격동을 금치 못하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칠독문 사람입니다. 장 장군께서 운남으로 피신 왔을 때 잠시 인연이 있었지요.”

“…!”

장선백은 집안에 역모죄가 드리워지자 아버지 장홍과 함께 운남으로 피신하였다.

운남과 월국 변방에 머물며 역적의 누명을 벗고자 권토중래하던 차에 칠독문 우완청을 만났다.

“칠독문은 독뿐 아니라 약도 유명하지요. 아버지 장홍 장군의 약을 구하러 찾아왔었답니다.”

강소군은 우완청의 말을 들으니 장선백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랜 세월이 흘러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소식을 들으니 어제 헤어진 듯 뚜렷하게 기억났다.

“선백은 지금 어디 있소?”

우완청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도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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