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213화 (213/250)

213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연화심의 눈썹이 가늘게 흔들렸다.

강소군은 새삼 연화심의 눈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소.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한다는 걸. 그때만 해도 내 안에는 알 수 없는 독기가 폭주할 때였소. 그러나 점차….”

강소군은 자신이 미망에 사로잡혀 떠돌다 삼도문의 일을 계기로 점차 이성이 돌아왔다고 여겼다.

“깨어나서 보니 내 주위에 사람들이 있었소.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던 이도 있었고, 새로운 인연도 다가왔으며 내가 해결해야 할 은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소.”

“거기에 저도 있던가요?”

연화심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강소군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심 덕분에 나는 다시 사람이 되었던 거요. 그래서 천황성을 상대하는 것이고. 그들은 세상이 발전하며 나아가는 걸 부정하고 과거의 틀 그대로 답습하기를 원하오. 그 욕망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소.”

“….”

연화심은 그걸 왜 굳이 당신이 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욕심을 깨달았다. 그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자신을 본 것이다.

강소군이 고를 받아들이고 흑천맹으로 홀로 간다고 말할 때 화가 난 이유가 그가 잘못될까 두려워서였다.

그런 연화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소군이 말했다.

“내게는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일이오. 원하지 않았지만 주어진 운명이니 받아들일 거요. 그 끝이 어디일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화심이 있기를 바라오.”

“…!”

연화심은 가슴이 뭉클, 하였다.

평소 말수가 없던 강소군이었기에 더욱더 울림이 있었다.

“나는 반드시 거기에 있을 거예요.”

연화심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방금 전까지 복잡하고 화까지 났던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강소군이 연화심의 손을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쥐고 말했다.

“나를 믿소?”

연화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빗속에서 무작정 당신을 찾아갔던 이유가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인가 봐요.’

하지만 차마 말로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눈물을 훔치고 웃으며 말했다.

“고장추는 패도적인 사람이에요. 하지만 당신보다 그나 흑도들이 걱정이군요.”

“하하.”

“진지하게 들어 주세요. 나는 당신이 혈마라고 불리는 걸 듣고 싶지 않거든요?”

“….”

“사람을 많이 죽이면 지옥불에 떨어진다잖아요?”

연화심이 진지하게 말하니 강소군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렇다고 내가 스님이나 도사처럼 그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도력이 없지 않소? 그저 한시라도 빨리 염왕에게 보내서 죄과를 치르고 다음 생은 착하게 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예?”

눈을 동그랗게 뜬 연화심은 강소군이 농담을 한 것을 알자 어이가 없었다.

“흥! 이제 보니 말솜씨도 번지르르하고 사람을 희롱할 줄도 아는군요. 몰랐네요.”

“이렇게 된 것도 화심 덕분이오.”

“으… 이제 보니 화화공자였군요.”

연화심도 우울했던 마음을 털어버리고 맞장구쳤다.

그러다 자신의 손이 아직 강소군에게 잡혀 있다는 걸 깨닫고 쑥, 뺐다.

마침 심마백이 들어오다 그 순간을 보았다.

“좋은 시절이구나. 누구는 총각으로 늙어 가는데. 고향으로 가도 기다리는 처자도 없고. 서럽구나 서러워.”

연화심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벌떡 일어나 뒷문으로 나가 버렸다.

“어? 연 문주. 보고할 게 있어서 왔는데 그냥 가면 어떡해?”

심마백이 강소군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연화심을 쫓아갔다.

***

강소군이 탄 배는 상강을 거슬러 장사로 향했다.

배는 꽤 커서 여러 사람이 타고 있었다. 대부분 상인들이었는데 유독 눈에 띄는 여인들이 있었다.

종아리가 드러난 치마를 입었는데 남쪽 변방에서 온 듯했다. 그중 한 여인의 쭉 뻗은 종아리가 단연 돋보였다.

붉은 망사가 달린 모자를 써서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미루어 짐작건대 보기 드문 미인일 듯했다.

상인들은 힐끔거리며 그녀를 훔쳐보았으나 여인은 말없이 강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양옆으로 두 여인이 있었는데 무공을 익힌 듯 작은 도를 차고 있었다.

여인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청년 네 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검과 도를 찬 그들은 제법 잘 갖춰 입어 이름깨나 있는 문파나 집안 출신인 듯했다.

그들 역시 아까부터 여인을 힐끔거리며 술을 마셨다.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옷차림에 눈이 자꾸 가는 것이다.

결국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여인에게 다가갔다.

“실례하겠소. 무료하신 모양인데 같이 술 한잔하는 게 어떻겠소? 좋은 술과 안주로 미인을 모시고자 하오.”

청년이 호기롭게 말하는데도 여인은 돌아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여인이 청년을 가로막고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중원 말이 서투르답니다.”

“아! 그렇소? 그렇다면 더욱 잘됐구려. 중원이 처음이신 모양인데 내가 안내하겠소. 나는 조양문의 조원이라고 하오.”

조원이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자 여인이 뭐라 뭐라 말했다.

“무슨 말을 하신 게요?‘

조원이 여호위에게 물었다.

“뜻은 고맙지만 사양하신답니다.”

여호위가 단호하게 말하자 조원이 머쓱해서 물러났다.

배에 사람이 많으니 더 이상 수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조원이 돌아가자 동료들이 왁자지껄 웃으며 놀렸다.

조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조양문은 장사 일대에서 제법 이름이 난 방파로 조원은 방주의 둘째 아들이다.

조원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여인을 가끔 돌아보았다.

이윽고 배가 장사의 한 나루에 도착했다.

배 뒤편에 있던 강소군이 가장 늦게 내렸다.

대로 쪽으로 걸어가는데 다시 조원과 여인의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조금 험악했다.

강소군이 잠시 서서 보는데 조원이 눈알을 부라렸다.

“이봐,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갈 길 가라.”

강소군이 말없이 조원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돌아보니 소걸아였다. 그런데 옷차림이 거지가 아니었다. 나루에서 일하는 막노동꾼 차림이었다.

“천하가 넓다 하나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나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소걸아가 넉살 좋게 웃었다.

소걸아의 말에 붉은 망사의 여인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붉은 망사의 여인이 강소군과 소걸아를 보자 구원을 요청하는 걸로 착각한 조원이 다시 을러댔다.

“맞아야 정신 차릴 거냐?”

소걸아가 조원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소곤거렸다.

“조양문의 망나니가 먹잇감을 찾은 모양이군요. 그런데… 된통 당할 듯싶네요.”

“…?”

“저 여인들은 운남 칠독문 사람들입니다. 팔찌를 보세요. 일곱 가지 채색이 되어 있지요?”

“칠독문?”

“운남 일대에서는 당가 못지않은 독공으로 이름난 방파죠. 조원은 아마 뼈도 못 추릴 것 같습니다. 그냥 가시죠.”

소걸아의 말에 강소군이 붉은 망사의 여인을 한 번 보고는 몸을 돌렸다.

“잘 생각했다. 머저리 같은 놈!”

조원이 비아냥거리고는 붉은 망사의 여인에게 말했다.

“호의를 거절하면 그 또한 무례가 되는 게 중원의 법도지. 중원에 왔으면 중원의 법을 따르라고.”

붉은 망사의 여인이 뭐라뭐라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조원 일행과 여인들이 함께 거리 끝으로 갔다.

소걸아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차라리 사신을 부르지….”

두 사람이 대로에 들어서자 소걸아가 말했다.

“객잔을 찾으실 거죠? 깨끗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하고 조용한 곳이 있답니다.”

소걸아는 장사 구석구석을 꿰차고 있는 듯했다.

강소군이 소걸아를 따라가며 물었다.

“남경분타주가 장사에는 웬일인가?”

“흑천맹 때문이죠. 흑도 나부랭이들이 뭐 그리 두렵다고 감시를 하라니 어쩔 수 없죠.”

소걸아가 투덜거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개방은 정말 대책이 없어요. 일을 시키려면 자금도 줘야죠. 구걸하면서 일을 하라니 말이 됩니까? 여기서 거지질하면 맞아 죽는다고요.”

소걸아는 부두에서 일하며 활동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소군은 자신에 제법 큰 돈을 주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 돈이면 십 년은 먹고살 수 있었을 텐데.”

“딸린 식구가 한둘이어야죠.”

소걸아가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로에서 꺾인 골목에 있는 객잔은 소걸아 말대로 깨끗하고 조용했다.

일 층이 반점이었는데 그리 넓지 않았다.

“헤헤. 이 집은 요리 솜씨도 좋다고요.”

소걸아가 먼저 들어가며 외쳤다.

“춘삼아! 손님 모시고 왔다!”

점소이가 주방 쪽에서 튀어나왔다.

“응, 너 왔구나?”

가만 보니 소걸아는 부두에서 일하며 호객행위도 하는 모양이었다.

춘삼이 강소군 앞에 와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쇼.”

“귀한 분이시니 한 상 잘 차려와라.”

소걸아는 반점 탁자로 가서 앉으며 자기가 내기라도 할 듯 호기롭게 외쳤다.

춘삼이 황당해하며 손짓을 했다.

“너, 뭔 짓이야? 어서 일어나지 못해?”

강소군이 피식, 웃으며 춘삼에게 말했다.

“여기 소형제가 좋아하는 걸로 가져오게.”

“저놈이 꽤 많이 먹는데요?”

강소군이 은자 한 냥을 건네자 춘삼의 눈이 바빠졌다.

“충분합니다. 저놈 배 터질 정도로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후 술과 음식이 나왔다.

소걸아는 연신 음식을 입에 넣으며 흑천맹 소식을 전했다.

강소군은 하오문을 찾아 정보를 얻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고장추 밑에 제법 똑똑한 놈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홍의발이라고 군사 역할을 하고 있지요.”

“….”

“고장추는 각 방파에서 열 명에서 서른 명가량 무인들을 차출하여 무력대를 꾸렸지요. 흑도 문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정도만 해도 간단히 일천이 넘더라고요.”

“일천? 의천맹에게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새 상당수 전력을 회복했군.”

“그게 흑도의 장점이죠. 머릿수 채우는 거 하나는 잘하죠.”

“….”

“하지만 그놈들은 걱정할 게 없습니다.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죠. 무서운 것은 흑천대입니다.”

“흑천대? 예전에는 십이지대라고 했다는데 천황성 고수들에게 꽤 많이 죽었죠. 이제 삼백 명 정도 남았는데 고장추의 직할 무력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소걸아가 말하다 말고 강소군의 뒤쪽을 보았다.

강소군도 소걸아를 따라 뒤를 돌아보다 흠칫, 놀랐다.

붉은 망사의 여인과 호위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우연일까?’

소걸아가 안내한 객잔은 골목에 있어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기 쉽지 않았다.

강소군이 내심 의아하였으나 다시 몸을 돌려 술잔을 기울였다.

소걸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곤거렸다.

“그놈들 벌써 죽은 모양입니다. 조양문이 장사에서는 그래도 제법 한가락 하는 문파인데 시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붉은 망사의 여인 일행도 음식을 주문하였다.

잠시 후 음식을 가져온 춘삼이 흘깃 붉은 망사의 여인을 보았다가 멍하니 굳었다.

망사 사이로 비친 여인의 얼굴이 선녀처럼 보였던 것이다.

여호위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제야 춘삼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고 주방 쪽으로 갔다.

“벌써 오는군요.”

소걸아가 예상했다는 듯 문 쪽을 보았다.

여러 사람이 몰려오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벌컥, 문이 열리며 건장한 흑의 장한들이 들어섰다.

“여기 있습니다!”

흑의 장한들이 붉은 망사의 여인 일행을 보고 소리치자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청색 장삼을 입은 청년이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조원을 연상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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