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212화 (212/250)

212

“강 공자의 말은 공손 노야가 영인고의 약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란 뜻이군.”

철권호가 말했다.

“천황성 고수들은 공손 노야의 명도 따랐습니다. 어미고는 천주에게 있는데 공손 노야가 어떻게 그들을 부릴 수가 있었을까요?”

강소군의 말에 제갈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를 부릴 수 있었다면 고의 약점도 알고 있을 수 있겠지요. 천주가 무리를 해서 공손 노야를 죽이려던 이유가 영인고의 비밀이 노출될까 우려한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게 있다면 알아내야지.”

당종이 눈빛을 번뜩이며 강소군을 보았다.

‘천주가 저 녀석을 죽이는 건 실로 간단한 일이지. 고에게 명만 내리면 되니까. 그런데도 살아 있다는 건?’

어미고와 새끼고의 감응을 강소군이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종은 그 비밀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강소군은 그런 당종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제갈선이 방법을 찾았다는 듯 기대에 차서 당종에게 말했다.

“중양절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영인고의 비밀을 푸는 게 급선무일 듯합니다.”

“그러니까… 실험을 해 보자고. 실험을!”

당종이 다시 철권호를 보았다. 어떻게든 저 머리에 고를 심고 싶은 모양이다.

“어림없는 말씀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어느 누구에게도 안 됩니다. 이건 의천맹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흥! 그렇다면 내가 이 자리에 더 있을 이유도 없겠군.”

당종이 코웃음을 치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휙, 나가 버렸다.

철권호가 무안하여 변명하듯 말했다.

“성격도 참 괴팍하시지.”

제갈선이 화제를 돌렸다.

“의천맹을 습격한 검황 등이 천황성의 고수라는 사실이 퍼지고 있네. 거기에 흑천맹을 접수하고 의천맹을 쳤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며 무림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지.”

“….”

“대파와 세가는 집안 단속에 들어갔지. 의천맹에 힘을 내어줄 상황이 아니라는 건 강 공자도 알고 계실 것이네.”

천황성 인명첩이 공개되며 대파와 세가는 충격을 받았다.

인명첩에 오른 이들은 문파의 원로나 장로들로,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을 따르는 문파 내 세력도 많았기에 몇몇 문파는 내분까지 벌어졌다는 소문이다.

게다가 천황성의 무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 드러나며 대파와 세가는 자파의 생존을 우선으로 무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중이다.

의천맹에 파견한 무력을 복귀시켜 달라는 문파까지 있었다.

“게다가 고장추가 다시 등장한 모양이네. 흑도를 다시 결집하고 있지.”

“꽤 빠르군요. 저번 일로 꽤 손실이 컸을 텐데.”

강소군은 흑도의 저력에 놀랐다.

그때, 철권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흑도는 자생력이 강하고 특성도 다양하네. 그들을 모두 뿌리 뽑는다는 건 불가능하네.”

대협으로 알려진 철권호가 그리 말하니 강소군으로서는 의외였다.

“사실 살인이나 인신매매를 밥 먹듯 저지르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네. 대부분은 기루나 도박장, 소금 밀매 등과 같이 음지 상권에 기생하여 살아가지. 겉으로 볼 때 백도가 상단을 보호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네.”

강소군은 가만 듣기만 했다.

명문가 귀공자로 자란 그는 민초들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백성들의 생업이나 욕망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니 흑도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보네.”

철권호는 놀랍게도 흑도에 대해 제갈선을 비롯한 대파나 세가와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강호를 독행하며 의협을 실행하였으나 그는 흑도를 필요악이라고 보고 있었다.

철권호는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의 손에 죽은 흑도의 인물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흑도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명성은 높았다.

철권호가 손을 쓸 때 경우를 철저히 따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철권호의 손에 죽은 악인들은 정도를 표방한 위선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죽은 고선이 흑천맹을 창설하는 과정에서 인신매매 등 패륜을 저지르는 문파들을 제거했다고 들었네. 나는 고장추가 그 뜻을 이어받는다면 차라리 흑천맹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지.”

“하지만 흑천맹이 패권을 차지하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흑도가 세력을 결집하는 건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흑천맹에 관해서 철권호와 제갈선은 입장이 달랐다.

“물론 의천맹이 흑천맹을 충분히 견제할 힘을 지녀야 하지. 그렇다고 해서 흑도를 소탕하겠다고 의천맹 무인들을 희생시키는 건 어리석은 짓이네.”

철권호가 단호하게 말하니 제갈선도 한발 물러섰다.

“어찌 됐든 고장추가 흑천맹을 재결집하고 있다는 건 우리 의천맹으로서는 부담이 됩니다. 천황성과의 결전을 앞두고 배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될 겁니다.”

“그래서….”

철권호가 강소군을 부른 목적을 드디어 꺼냈다.

“자네가 고장추를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네.”

“…?”

“고장추가 어떤 뜻을 지녔는지 모르는데 아무나 보낼 수가 없지 않은가?”

강소군 정도 되는 무위라면 흑천맹 무인이 아무리 많더라도 능히 빠져나올 수 있으니 부탁한다는 뜻이다.

강소군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강화를 맺자는 말씀이로군요.”

“천황성은 흑백 양도의 적일세. 함께 싸울 수 있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적어도 지난번처럼 느닷없이 배후를 노리는 경우는 없어야 하지 않겠나?”

강소군을 보내자는 건 철권호의 뜻인 모양이었다.

제갈선은 한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제갈 장로께서는 흑도와 의천맹이 연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회의적이네. 흑도는 믿을 수 없지. 하지만 맹주님의 뜻이 확고하니 강 공자를 청한 것일세.”

강소군은 제갈선의 태도를 보고 철권호가 맹주가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선은 꽤나 유연한 인물이나 흑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

제갈선마저도 그러니 대파나 세가는 흑도와 화의를 맺는다는 생각 자체를 못할 것이다.

강소군 입장에서는 백도나 흑도 모두가 백성이다.

사실상 흑백 양도를 구분한다는 것 자체에 그리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맹주님의 뜻이 그러하니 고장추를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강소군이 철권호의 청을 수락하였다.

***

한동안 연화심을 보지 못했다.

강소군은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는 한창 바쁜 시기이니까.’

새로이 상단을 열었으니 그럴 것이다. 그래도 이상하리만치 뜸하다.

이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아침에 차를 마시러 왔다.

강소군은 아침을 먹고 홀로 차를 마신 뒤 자신의 거처를 나와 연화심의 집무실로 갔다.

연화심은 책상에 팔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강소군이 들어왔는데도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창 너머 하늘만 보고 있을 뿐이다.

“연 문주?”

강소군이 부르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으며 강소군을 마주 보았다.

“무슨 일로?”

연화심이 정색을 하고 물으니 오히려 강소군이 무안해졌다.

“….”

둘러댈 말도 없고 그런 성격도 아니니 침묵이 흘렀다.

“중랑 오라버니는 많이 회복되었대요.”

침묵이 길어지자 연화심이 중랑의 이야기를 꺼냈다.

중랑은 도제와의 결전에서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 자리에 동약사가 없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그 싸움으로 그는 한층 더 성장했을 거요. 이제 무림에서 그를 상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

연화심은 어쩐지 갈수록 강소군이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말하는 투도 너무나 깍듯하니 오히려 서먹하게 느껴졌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나 함께 싸울 때처럼 차라리 말이 없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흑천맹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소.”

“…?”

“고장추가 다시 흑천맹을 결집하고 있는 모양이오.”

연화심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강소군이 가만 바라보다 물었다.

“무슨 일이 있소?”

“….”

잠시 입술을 깨물며 말이 없던 연화심이 결심을 한 듯 말했다.

“고를 몸에 넣으셨다면서요?”

“…?”

“서신의 어르신이 와서 이야기해 주셨어요. 천황성 천주가 부리는 고를 넣었으니 유심히 지켜보라고요.”

“아,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요.”

“왜요?”

연화심의 눈꼬리가 도발적으로 살짝 올라갔다.

“검황이니 뭐니 하는 절대고수들도 고의 지배를 받는다면서요? 그런데 어찌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죠?”

강소군은 연화심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연화심은 일전에 강소군과 미묘한 감정을 교류한 뒤 오히려 자기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연화심 스스로도 몰랐지만 이제 강소군에 대한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다.

자신은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소군이 상의 한마디 없이 몸에다 위험한 고를 집어넣었다니 화가 났다.

연화심이 아는 강소군은 아주 냉정하고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무림을 위해 천황성과 싸우며 스스로 고까지 집어넣는 위험을 감수하니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럼에도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강소군을 무림으로 끌어들인 건 연화심 자신이다.

모순된 감정 때문에 강소군을 며칠 찾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강소군이 찾아와 흑천맹 소굴로 들어간다니 또다시 화가 났다.

그가 왜 이리 무림의 일에 나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더 이상 피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까지 어우러져 더욱 화가 났다.

“흑천맹 사람들을 다 죽일 건가요?”

강소군이 연화심을 가만 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화친을 청하러 가는 거요.”

“화친? 상대가 들어주지 않으면 싸움 나는 거고 그러면 당신이 죽든 고장추와 흑도인들이 떼죽음 당하든 둘 중 하나가 되겠네요.”

연화심은 여전히 화가 나서 마구 말했다.

강소군이 흥분한 연화심을 차분한 눈으로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손을 내밀었다.

“…!”

강소군이 연화심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연화심은 석상처럼 굳어 강소군을 바라만 볼 뿐이다.

“화심….”

강소군이 나직하게 말하는데 연화심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릿속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강소군이 연화심의 손을 쥐고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사람 속으로 끌어와 함께 살아가게 만들어 주었소.”

“…?”

뜬금없는 강소군의 말에 연화심은 듣기만 하였다. 아니,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이 백륭사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미망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거요.”

강소군의 눈빛이 지난날을 돌아보듯 아득해졌다.

“나는 황실 인척 집안의 외아들로 홀로 자라다시피 하였소. 권력암투가 끊이지 않는 조정 가까이 사는 삶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요.”

“….”

“그곳은 권력을 쥐기 위해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무너뜨려야만 하는 세상이었소. 대의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칼이었고 그걸 쥐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였지.”

강소군은 그런 조정이 싫어 군문에 투신했다. 그리고 무총에 들어가 끔찍한 경험을 하고 살아나왔다.

“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몰랐소. 사람들이 어떤 희망을 품고 고난과 슬픔을 이겨 가며 사는지 알지 못했소.”

“….”

“그런 내가 화심과 중랑이 서로를 위해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고, 삼도문 세 분 의형제들이 식솔들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걸 봤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