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211화 (211/250)

211

여름으로 들어서자 천지가 후끈 달아올랐다.

강소군이 다시 세워진 의천맹 정문을 지났다.

마주친 무인들이 강소군을 알아보고 묵례를 취했다.

의천맹은 규모가 과거 삼도문 장원의 몇 배나 커졌다. 그렇기에 아직 공사중인 곳도 많았다.

-스윽! 탕! 탕!

곳곳에서 나무 다듬는 소리와 망치질 소리가 요란하였다.

땡볕에서 웃통을 벗은 인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상반신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봐, 한잔하고 하세. 이러다 쓰러지겠구만.”

두어 사람이 술통을 지고 와서 인부들에게 소리쳤다.

“좋지!”

“카하하. 이 맛이야.”

인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술잔을 나누다 강소군을 보았다.

대번에 술판이 잠잠해졌다.

평범한 인부들에게 의천맹 무인들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강소군과 같은 귀공자 차림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걸 잘 안다.

강소군이 다가가더니 손을 내밀었다.

“나도 한잔 주시겠소?”

“공자님께서 이런 싸구려 술을….”

인부 하나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술통을 열어 커다란 대접으로 펐다.

강소군이 대접을 받아 쭉, 들이켰다.

설마 대접에 있는 술을 단번에 다 마실 줄은 몰랐는지 인부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술맛이 참 좋소.”

강소군이 씨익, 웃으며 빈잔을 돌려주었다.

“잘 마셨소.”

강소군이 몸을 돌려 맹주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인부들이 강소군의 뒷모습을 보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검신 대협과 참 비슷하군.”

“…?”

“내가 본 적이 있다고. 아주 비슷해.”

“검신이면 검신이지 비슷하다는 건 뭐야?”

“하도 멀리서 봐서….”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때? 오늘 홍화로 갈 거야, 말 거야?”

인부들이 다시 왁자지껄 자기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강소군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죽고 죽이는 무림인들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은 일상을 즐겼다. 일하고 먹고 마셨다.

‘황제가 아주 못하지는 않는 모양이구나.’

젊은 황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모든 게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토호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몇몇 토호가 횡포를 부리다 금의위에 끌려가 처단을 당했다는 소문이 들려 왔다.

강소군이 대로를 따라 걸어가니 멀리 내성 대문이 보였다.

제갈선은 검황의 침입 이후 본단을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고 토목공사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규모가 커진 만큼 변화도 많았다. 외성에는 찻집과 반점, 주루까지 들어섰다.

천하의 무림인들이 모여드니 자연 장사꾼도 들어온 것이다.

강소군이 맹주전 쪽 길로 들어서는데 옆에 있는 찻집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돌아갈 거야?”

강소군이 보니 남궁령과 팽일소가 앉아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어.”

팽일소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소군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궁령이 돌아보다 반색하고 튀어나왔다.

“오라버니, 차 한잔하고 가세요.”

남궁령이 강소군을 끌다시피하여 찻집 안으로 들어갔다.

“일소가 돌아간대요.”

팽일소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하였다.

“팽가의 복수를 해 주신 점 뒤늦게 감사드립니다.”

팽일호를 습격했던 도제 등을 강소군이 죽였으니 복수를 대신 해 준 셈이긴 했다.

강소군이 물끄러미 팽일소를 바라보았다.

팽일소는 형의 원한을 갚겠다고 무리하게 수련하다 주화입마에 걸릴 뻔했다.

다행히 남궁령이 동약사에게 처방받은 약으로 지극 정성 돌봤기에 회복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한 건가?”

강소군의 말에 남궁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소가 속에 없는 말을 할 사람이 아닌데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다.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하지 못한 게 원망스럽지 않느냐는 뜻이다.”

강소군의 말에 팽일소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은… 그렇습니다.”

팽일소는 아직도 자괴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팽가가 천하제일이라는 자만 속에서 살다 세상에 나오니 고수가 수두룩했다.

눈앞에 있는 강소군이나 대정무각 일각주 중랑, 화룡도 조운룡 등등 자신과 연배가 비슷한데 무공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팽가가 달라지겠군.”

강소군의 말에 팽일소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마도 아니, 반드시 그럴 겁니다.”

강소군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무공은 연무장에서 익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강소군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그나 중랑이나 조운룡이나 숱한 싸움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성장했다.

팽일소는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그래, 여기서 함께 수련하자고.”

남궁령이 은근히 설득하려 들었다.

남궁천은 기어이 불취에게 창천검을 건네고 남궁악과 함께 세가로 돌아갔다.

남궁령은 남궁우와 함께 남아 제갈선 밑에서 일하기로 했다.

“다시 올 거야. 반드시. 그러니까….”

팽일소가 말하려다 말고 강소군을 봤다.

강소군이 내심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를 보기로 했는데 늦었군.”

강소군이 찻집을 나왔다.

“기다려 줘. 내가 남궁세가로 찾아갈 테니.”

“왜? 왜 우리 집에 가? 나는 여기 있는데.”

남궁령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내숭을 떠는 소리를 들으며 강소군은 내성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게.”

맹주전 객청으로 드니 철권호가 맞아 주었다.

어딘가 모르게 맹주로서의 위엄이 흘러나왔다.

한가운데 다탁이 놓였고 제갈선과 당종이 앉아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우리도 이제 막 모였네.”

네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하인이 차와 다식을 놓고 갔다.

강소군이 철권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내가 불렀다.”

당종이 차를 홀짝거리고는 말했다.

“영인고에 대해서 대충 파악을 했지.”

모두 당종을 보았다.

당종이 그간 자신이 얻어낸 결과를 이야기하였다.

제갈선이 침중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씀은 정신을 지배하는 것 이상의 작용이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천주의 머릿속에 아마 어미고가 있을 것이야. 어미고는 새끼고를 지배하는데 몇 번 탈피를 하여 성체가 되면 완전히 정신을 장악하게 되지.”

당종이 강소군을 보았다.

‘그런데 너는 왜 이상이 없는 거지?’

마치 그렇게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강소군은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 역시 머릿속에 있는 고와 감응을 시도하여 이제는 의지로 통제할 수 있었다.

검황 등이 습격했던 날.

강소군이 고를 통해 물었을 때 천주의 목소리가 들려왔었다.

-중양절에 천황성을 열겠다. 그때 오거라.

그 뒤로 강호에서 천황성 고수들의 종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끔찍한 일이군요. 그렇다면 그가 만일 황제에게 고를 심으면 천하를 장악한 것이나 마찬가지겠군요.”

“….”

모두가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당종이 긴 침묵이 부담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철 맹주 머릿속도 의심스러운데….”

철권호가 펄쩍, 뛰며 손을 저었다.

“행여 제 머리를 열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애초에 천황성의 의도를 의심하여 먹고 마시는 것 하나하나 검사를 했으니 고가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모르는 거지. 영인고의 알이 얼마나 작은지 아나?”

“아무튼 아닙니다!”

철권호가 단호하게 부인을 하자 제갈선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맹주님, 죄송합니다만 실은 서신의께서 이미 조사하셨답니다.”

“뭐요?”

“의천맹주가 고에 당했다면 무슨 일이 나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철권호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주무시고 계실 때 천일취를 약간 썼지요.”

그러고는 머릿속을 들여다봤다는 것이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지 말게. 다 무림의 안녕을 위하여….”

철권호가 씩씩, 거리자 당종이 화제를 돌렸다.

“다행스러운 것은 어미고만 잡으면 새끼고들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거지.”

“새끼고들 사이에도 감응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저 감응 수준이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네.”

“그렇다면 결국 천주를 잡아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근데 그게….”

당종이 말꼬리를 흐렸다. 확신이 없을 때 나오는 버릇이다.

“영인고를 다른 말로 천령고라고도 하잖나?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준 고라는 뜻이지.”

“그렇겠지요. 인세에 있어서는 안될 요물이잖습니까?”

“말 들어 봐. 그 말은 고를 지닌 자에게 특별한 공능이 생긴다는 거지.”

“….”

강소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그렇군요. 그러니 평범한 사람도 순식간에 화경의 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어미고의 공능은 가늠하기가 어렵네.”

당종의 말에 모두가 침묵하였다.

검황이나 도황 등의 무위를 직접 보았다.

인세에 보기 드문 절대고수들이다.

그런데 천주가 그보다 훨씬 뛰어나다면?

세 사람의 시선이 강소군에게 향했다.

당종이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그 나이에 이런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거지?”

강소군은 불현 듯 무총에서의 나날이 떠올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의식적으로 지우다 보니 이제 아득하다.

“기연이 있었습니다.”

강소군이 딱 잘라 말하니 더 묻지 못했다.

다른 이의 무공내력을 묻는 것 자체가 무림의 금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렇지만 자네의 무공으로도 천주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야. 게다가 검황과 검제 등 몇 놈이 더 살아 있지 않은가?”

“….”

강소군은 지금 미증유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당종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고가 하나 더 있는데….”

당종이 철권호를 보았다.

철권호가 대뜸 안색을 굳히고 손을 저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왜? 무림맹주가 솔선수범하여 희생을 해야지. 고를 넣으면 무공이 일취월장할 거라고.”

철권호가 마구 손을 저었다.

“안 됩니다. 저는 강 공자가 아닙니다. 고에 지배를 당할 겁니다.”

당종이 강소군을 흘깃 보며 말했다.

“강 공자가 고에 지배당하지 않는 비법을 일러주지 않을까?”

강소군이 내심 웃었다. 당종의 속셈을 이제 알 것 같았다.

탐구심이 유달리 강한 당종은 강소군이 고의 금제를 벗어나 오히려 고를 지배하고 있는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다.

강소군은 물론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영인고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마물이다. 그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도 모두 지워 버릴 생각이다.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영인고에도 약점이 있을 겁니다.”

“약점?”

“천주가 검황 등을 시켜 공손 노야를 척살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강소군의 말에 제갈선이 아, 하고 무릎을 쳤다.

“맞다!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제갈선도 내내 의문을 품고 있기는 했다.

천주는 도제 등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공손 노야를 죽였다.

제갈선은 공손 노야가 천황성 이인자였던 만큼 무척이나 아쉬워하였다.

그가 입을 열면 조정과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태상들의 정체는 물론이고 천황성의 편제나 무력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천황성 입구에 있는 진법도 해체할 수 있었는데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갈선은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쳤는데 강소군이 영인고의 약점을 이야기하니 그 이상의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천하만물은 상생상극의 이치로 흘러갑니다. 영인고에게도 상극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강소군이 말하자 당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거 참 어처구니 없네. 평생 독과 약을 다뤘다면서 그 이치를 생각지 못하다니.’

당종이 강소군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보면 볼수록 당우화에게 어울리는 짝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남궁천이 청혼첩을 들이밀고 간곡하게 부탁하니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불취와 당우화의 혼인을 승낙하고 말았다.

‘그깟 주정뱅이 놈이 뭐가 좋다고….’

당종은 불취의 얼굴이 떠오르자 입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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