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중랑은 서 있을 때는 몰랐으나 움직이자 상세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관중이 나섰다.
“일각주, 이제 그만하면 됐소.”
중랑이 나서서 일대일로 결전을 벌여 도제에게 적잖은 타격을 입혔다.
세 명 중 한 사람의 전력이 약화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다.
관중이 염려하여 나섰으나 중랑은 고개를 저었다.
중랑이 대정무각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 하나하나를 훑은 중랑이 관중에게 말했다.
“대정무각 각주들은 언제나 선봉에 섰습니다.”
핏물을 뱉어 가며 담담하게 말을 하는데 울림이 컸다.
“…!”
중랑이 몸을 돌려 도제를 향해 말했다.
“나는 낭인이었고 호위 무사였으며 지금은 대정무각의 일각주 중랑이다.”
이제까지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중랑이 도제를 응시하며 핏물을 퇘, 뱉고 말했다.
“너는 누군가?”
지켜보던 사람들의 등골에 전율이 일었다. 심지어 창제와 편제마저 움찔, 하였다.
‘너는 누군가?’
중랑의 한마디가 자신에게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고 묻는 듯했다.
관중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는 대정무각의 일각주이자 백정무의 후인이다!”
관중의 말에 대정무각 무인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대정무각 무인의 대부분은 군과 금의위 출신이다. 그러기에 자부심이 남달랐다.
일각주 백정무의 후인으로 아직 새파란 나이의 중랑이 들어오자 승복을 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선 중랑의 한마디에 모두가 승복하였다.
“….”
도제의 얼굴은 그야말로 흙빛이었다.
‘너는 누군가?’
도제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어지러웠다.
몰락한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살았다.
동분서주하며 도법을 완성하고자 천령대법이라는 사도(邪道)까지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금제에 걸려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이 금제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지금 싸우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자신의 의지가 아님을 안다.
의식이 둘로 갈렸기에 도제는 자신이 지닌 온전한 실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 결과 가슴이 베이는 부상을 입었다.
중랑이 다시 검을 찔렀다.
허허로운 검.
그저 앞으로 향한다는 뜻만 담고 검이 나아갔다.
도제는 주춤, 하였다.
도법이나 공력이나 도제가 분명 한 수위였다. 하지만 싸움은 중랑이 지배하였다.
“어림없다!”
도제가 크게 소리를 외치고는 발작하듯 도를 내리쳤다.
찔러 오는 검을 잘라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샤사삭!
중랑의 검이 순간 사라졌다.
그럼에도 찔러 왔던 의지는 무형의 기운으로 밀고 들어왔다.
도제가 도를 내려쳤으나 걸리는 게 없었다. 그러자 황급히 좌장을 세워 자신의 가슴을 보호하며 오른발을 내밀어 옆으로 돌았다.
-부웅!
커다란 도가 횡으로 공간을 갈랐다.
-푹!
도제는 옆구리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다가왔는지 중랑이 그의 옆에 붙어 있었다.
중랑은 도제의 커다란 팔에 매달리듯 기대어 있었다.
오른손의 검은 도제의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이, 이게….”
보고 있던 모든 이가 놀랐다.
“이건 무슨 초식이냐?”
도제가 자신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보며 뇌까렸다.
“낭인들은 임기응변에 능하오.”
중랑이 속삭이듯 말했다. 도제의 팔을 붙잡고 있는 중랑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크크… 그랬군.”
도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어이없이 주도권을 내주고 임기응변에 당했다.
도제가 뭔가 다시 입을 열려는데 중랑이 결국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검은 꼭 쥐고 있었기에 도제는 복부를 휘젓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으윽!”
자기도 모르게 신음성을 내뱉은 도제가 주저앉은 중랑을 향해 도를 내리쳤다.
-땅!
어디선가 주판알 하나가 날아와 도제의 칼을 튕겨냈다.
손아귀에 힘이 풀린 도제는 칼을 놓치고 말았다.
“싸움은 끝났잖아?”
혈적산판 염가가 끼어들어 민망한지 주위를 보며 변명하듯 말했다.
“허허!”
도제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땅에 떨어진 도를 주우려고 허리를 숙이다 그대로 쓰러졌다.
중랑은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각주님!”
대정무각의 무인들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무인들은 중랑의 혈전에 크게 고무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창제와 편제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파리 떼 같은 놈들이?”
편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채찍을 휘두르는데 반여월의 찢긴 채대가 날아왔다.
이어서 유문광의 검이 빗발치듯 쏘아져 왔다.
“다 죽여 버리겠다!”
편제는 자신의 채찍이 가로막히자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악을 썼다.
창제가 달려드는 무인들을 향해 창을 그었다.
“크윽!”
무인들의 사기는 높았으나 실력의 차가 너무 컸다.
단 한 번 창을 휘둘렀는데 서너 명이 나가떨어졌다.
그때 커다란 고함이 터지며 허공에서 한 사람이 뚝 떨어져 창제를 가로막았다.
“너는 내가 맡겠다.”
창제가 말없이 창을 찔렀다.
-쉬쉭!
창끝이 현란하게 흔들리며 고대웅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뭔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슈슉!
염가의 주판알이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창제가 염가를 보는데 마치 암습을 비난하는 듯했다.
염가가 머쓱해하면서 중얼거렸다.
“네놈들이 너무 강하잖아. 나도 이러기는 싫다고.”
창제는 가타부타 말없이 다시 창을 휘둘렀다. 마치 벙어리라도 되는 듯했다.
장내는 다시 격전이 벌어졌다.
창제와 편제는 도제와 달리 영인고로 인한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그랬기에 자신이 가진 실력 그대로 발휘하였다.
-파아앙!
연달아 기음을 터뜨리며 사방을 휩쓰는 편제의 채찍에 유문광과 반여월은 피하기 급급했다.
창제의 창 또한 거침없이 고대웅을 몰아붙였다.
염가에 이어 노이칠이 가세하지 않았다면 고대웅은 벌써 싸늘한 시신이 되었을 것이다.
대정무각 무인들이 주위에 포진하고 있으나 감히 끼어들 수가 없었다.
관중이 검을 잡았다.
“아직 무리하면 안 되잖소.”
관중이 나서려 하자 동약사가 침중한 얼굴로 말렸다.
“아우들이 죽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다.”
그때,
“강 오라버니!”
남궁령의 반가운 외침이 터졌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이는 강소군이었다.
-쾅!
강소군은 내려서자마자 발로 땅을 찍었다.
기파가 사방으로 터지자 이에 놀란 사람들이 주춤하였다.
“또 너냐?”
편제가 채찍을 늘어뜨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살았다는 말은 들었지. 그런데 이렇게 멀쩡할 줄은 몰랐군.”
편제가 채찍을 한 번 후려치며 발을 내디뎠다.
“이번에는 정말 죽여 주마.”
편제는 번번이 상대가 바뀌자 약이 올랐다.
“조심해라!”
이제까지 말이 없던 창제가 입을 열어 주의를 주었다.
“그때 그놈이 아니다.”
“흥!”
편제가 코웃음을 치더니 채찍을 든 손을 맹렬히 휘감았다.
채찍이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원안에 뇌전의 기운이 번뜩였다.
“그놈이든 아니든 죽는 건 마찬가지다!”
편제가 채찍을 떨쳐냈다. 그러자 원이 형성한 뇌전의 기운이 강소군을 향해 쏘아져 갔다.
강소군은 다가오는 뇌전의 기운을 바라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위험해요!”
남궁령이 놀라 소리쳤다.
-팟!
“엇!”
순간적으로 강소군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치 존재가 꺼져 버린 듯했다.
편제가 놀라 주춤하는데 뒤에서 강소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지 마라!”
그제야 편제는 자신의 어깨에 무애검이 드리워진 걸 알았다.
“이런 암수를!”
편제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튕겨내며 옆으로 쓰러지듯 굴렀다.
그런데 어깨에 놓인 검은 사라지지 않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다시금 들려 오는 싸늘한 목소리.
편제는 온몸이 굳었다. 어깨에 놓인 검을 당기기만 하면 그의 목이 떨어질 판이다.
편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려는데 강소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돌아보지도 마라!”
“어쩌자는….”
편제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데 뒤통수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편제는 눈알이 튀어나가는 것 같은 충격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파악!
강소군은 편제의 뒤통수를 좌장으로 친 다음 곧바로 주먹을 쥐어 정수리를 내리쳤다.
그러더니 편제의 몸을 휙 돌려세우고는 손가락을 세워 인당을 푹 찔렀다.
“컥!”
편제가 의식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창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두커니 강소군을 보았다.
강소군이 손짓을 하였다.
“…?”
사람들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방금 전까지 사신처럼 날뛰던 창제가 순순히 강소군에게 다가가는 게 아닌가.
그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어렸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강소군에게 다가가던 창제가 반장 거리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그의 얼굴 근육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조심해요.”
남궁령이 다시 불안해서 한마디 하자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창제가 우악, 하는 고함을 지르며 창을 찔렀다.
-휙!
강소군의 신형이 사라졌다.
-채챙!
창제는 눈이 뒤에도 있는 듯 보지도 않고 창을 휘감아 강소군을 노렸다.
-따다다당!
강소군은 연달아 창대를 두드리며 순식간에 창제의 뒤에 달라붙었다.
창제가 미련 없이 앞으로 굴렸다. 절대고수가 시정잡배처럼 땅을 굴러 피한 것이다.
그러나 강소군 또한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파팟!
무애검이 흔들리자 땅을 구르던 창제의 허벅지에서 피가 튀었다.
“윽!”
창제가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창을 내질렀다.
-콱!
강소군이 창을 밟아 부러뜨렸다.
사람들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편제나 지금 땅바닥을 구르며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창제가 자신들이 합공을 하고도 감당하지 못해 밀렸던 고수들이 맞는가 싶었다.
-쉭!
창제의 눈에 강소군의 왼발이 들어왔다.
그가 부러진 창대를 단봉처럼 휘둘러 강소군의 발목을 노렸다.
그러나 강소군의 발차기가 먼저였다. 강소군의 오른발이 창제의 뒤통수를 찍었다.
-퍼억!
창제는 혼절하고 말았다.
“….”
모두가 말을 잃었다.
강소군이 절대고수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걸 보니 가슴이 콱, 막혔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이를 보는 듯했다.
“으헤헤헤. 역시 강 오라버니야! 오라버니는 천하무적이라고!”
남궁령이 오랜만에 기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헤헤.”
“무공의 끝을 본 듯하군.”
노이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왔다.
그의 팔뚝이 피범벅이다. 고대웅, 염가와 함께 창제를 공격하다 당한 것이다.
“이 자들은 왜 살려 둔 건가?”
노이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가 아는 강소군이라면 제압이 아니라 그냥 목을 자르고 머리통을 터뜨렸을 것이다.
“알아볼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강소군이 쓰러진 편제를 뒤집었다.
“엇! 죽었잖아?”
노이칠이 놀랐다.
노이칠이 황급히 창제에게 다가가 살폈다.
“어? 이자도 죽었네?”
강소군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품에서 홍옥비도를 꺼내 편제의 미간을 갈랐다.
-쩍!
세로로 갈라진 이마 속으로 뇌가 보였다.
“….”
영인고가 있던 자리에 흔적만 남아있다.
강소군은 창제에게도 다가가 이마를 열어 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고 때문에 죽었군.”
노이칠이 뇌까렸다.
강소군이 다시 도제에게 다가갔다.
도제의 머릿속에는 죽은 고가 그대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