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도제가 중랑의 기도를 지켜보다 툭, 내뱉었다.
“괜찮군.”
하지만 내심은 놀라는 중이다.
검을 늘어뜨린 중랑은 허허로웠다. 마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고수를 보는 듯했다. 나이를 감안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제 역시 무의 극의를 추구하는 인물. 그럼에도 늘 도황과 비교하여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도제는 도로 명성을 떨쳤던 감숙 하가 출신이다.
지금 위세를 떨치는 오대세가에 비견될 만한 명문이었으나 그의 대에 몰락하고 말았다.
도제는 도법을 완성하여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천황성에 들어왔다가 영인의 금제에 걸려 평생을 허비해 왔다.
간신히 영인을 지워 도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다른 삼황오제가 그렇듯 자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공손 노야와 불취의 대화를 통해 영인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영인고의 존재를 알자마자 바로 공손 노야의 장원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선정에 들어갔다.
며칠간 선정 끝에 그는 영인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역시 생사경의 고수로서 실체를 알고 나니 영인고를 추적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영인고를 제거할 수가 없었다.
강소군과 달리 도제는 영인고의 존재를 느꼈을 뿐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부름을 받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데 의지가 발동하여 창제, 편제와 함께 팽가를 쳤다.
도제는 그러면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자신이 이 자리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영인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을 누구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대정무각을 궤멸시켜야 한다는 생각과 단신으로 자신에게 도전한 젊은 무인의 도전을 받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하였다.
영인고를 통해 받은 명령과 자신의 생각이 서로 대치되지 않을 때는 그의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
“도전을 받아주지.”
도제가 도를 들었다.
“그래, 그럼 견식을 좀 넓혀 볼까?”
창제와 편제가 뒤로 물러났다.
중랑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검이 허공을 휘젓는데 검끝에 별무리가 따라다녔다.
“그 나이에 내공까지 심후하구나.”
도제가 다시 한 번 칭찬하였다.
동약사가 뿌듯한 표정으로 중랑을 지켜보았다.
중랑의 내공이 두터워진 건 순전히 동약사의 공이다.
중랑의 천성육십사식은 관중과 유문광의 지도로 이미 전혀 다른 검법이 되었다.
천성육십사식은 원래 현치자가 초식의 완성을 위해 창안한 검법이다.
그러나 관중과 유문광의 지도와 중랑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또 다른 검의 극의를 추구하였다.
검과 사람의 일체.
이른바 신검합일의 경지를 구현하는 검법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파파팟!
검끝에서 쏟아진 별무리가 중랑의 의지를 쫓아 도제에게 떨어졌다.
-휙!
도제의 칼이 사선으로 별무리를 베었다.
-콰쾅!
역시나 별무리는 강기의 일종이었다.
도제는 단 한 번의 부딪침이었으나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알았다.
“제법이기는 하나 아직 멀었다.”
도제는 자신을 휘감아 도는 별무리를 연신 끊어내며 소리쳤다.
명문의 도법답게 도세는 유장하였다.
중랑이 검법으로 공격하니 도제 역시 내공보다는 초식 위주로 대응하였다.
도제의 싸움을 창제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역시 무공광.
사실 삼황오제는 무에 미친 자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천령대법을 받아들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창제는 얼마 전 초화평에서 심득을 얻은 뒤 자신의 단계를 한층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도제와 중랑의 움직임을 보면서 또 느끼는 바가 있었다.
창제가 두 사람의 싸움에 심취한 반면 편제는 유희를 보듯 한가한 시선으로 볼 뿐이다.
편제의 시선은 가끔 남궁령에게 향했다.
권태에 빠진 그가 유일하게 즐기는 게 있다면 여인과 노닥거리는 일이다.
“어이, 거기 풋풋한 처자!”
편제가 자신을 부르자 남궁령이 의아해하였다.
“싸움이 제법 길어질 것 같은데 이리 와서 나랑 같이 보는 게 어떤가?”
남궁령의 안색이 울그락불그락하였다.
하지만 함부로 맞대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외면하고 중랑과 도제의 싸움을 지켜보는데 노이칠이 가만 속삭였다.
“이 틈에 어서 빠져나가게.”
“아니에요. 그보다 신호탄을 올려도 될까요?”
“신호탄?”
남궁천은 아직 의천맹 본단에 머무르고 있었다. 불취와의 인연을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최근 정파인들이 천황성 고수들에게 공격을 당하자 가솔들에게 신호탄을 나눠 주었다.
남궁령이 소지한 것은 가문의 직계만 쓰는 신호탄이다.
만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본다면 지체 없이 달려올 것이다.
“굳이 신호탄을 쓸 것은 없네. 이미 의천맹에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야.”
의천맹과 대정무각은 서로 동맹을 맺으며 위급시에 돕기로 약조한 바 있다.
도제 등이 쳐들어오자마자 전령이 달려갔다.
“아, 그렇군요.”
남궁령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면서 도제와 창제, 편제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삼황오제라고 했지 않아요? 권황은 강 오라버니 손에 죽었지만 검황과 검제, 도황과 권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노이칠이 흠칫, 놀라 생각해 봤다.
“의천맹도 위험한 게 아닐까요?”
남궁령이 불안한 듯 말했다. 나머지 고수들이 의천맹으로 간 게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를 비롯해 오라버니들이 있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이칠은 강호 경험이 남궁령보다 훨씬 깊었다.
‘이상하군. 저들이 절대고수라 하지만 불패의 존재들은 아니다. 만일 그들이 함께 왔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전멸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손쉽게 이길 수 있는데 굳이 위험부담을 안고 나눠서 공략한다?
노이칠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관중에게 다가갔다.
“형님, 아무래도 우리가 미끼가 된 것 같습니다.”
“미끼?”
“의천맹 고수들을 본단에서 끌어내려는 것 같습니다.”
“왜?”
“거기에 천황성 책사라는 공손 노야가 잡혀 있지 않습니까?”
“…!”
관중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어찌하면 좋지?”
상관청유가 자리를 비우면 노이칠이 대신 책사노릇을 해 왔다.
“전령을 다시 보내서 그쪽도 대비를 하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이칠이 착잡한 표정으로 도제와 중랑이 겨루는 걸 보며 말을 이었다.
“일각주와 무인들의 전력을 보존시키고 나머지 각주들이 사력을 다해 막는 게 좋겠습니다.”
관중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노이칠이 전령을 불러 밀지를 전했다.
이제 내심 기대했던 원군도 없을 것이다.
싸움이 한창 무르익었다.
-파라랏!
-쉬쉭!
생사경과 화경에 이른 고수의 싸움답지 않게 현란한 초식이 난무하였다.
-터엉!
경기가 부딪치고 두 사람이 각기 반장씩 물러났다.
일 장 거리에 마주 선 두 사람의 기도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예사롭지 않더니 도가의 검이로구나!”
도제가 감탄하며 말했다.
“당신의 도법 또한 내력이 깊은 것 같소만 어찌하여 남의 밑에서 수족 노릇을 하는 것이오?”
“사람에게는 각기 사정이 있는 법이다. 네가 그걸 알 만한 나이까지 살지 못한다는 게 안타깝구나. 끝내자!”
이번에는 도제가 먼저 도를 내리쳤다.
-퍼엉!
허공이 찢기는 굉음과 함께 무형의 도기가 번뜩였다.
내공이 가득 실린 공세는 이제까지와 사뭇 달랐다.
-파팟!
중랑의 검이 수십 갈래로 나뉘며 별무리를 쏟아냈다.
유문광의 절학 분광검법을 접목한 수법이다.
“좋구나! 내가 제자는 제대로 키웠어!”
유문광이 흡족해하였다.
도제의 칼질은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칼질이 이어졌다.
중랑의 별무리가 점차 스러졌다.
지켜보는 이들의 안색 또한 어두워졌다.
싸움이 극에 달해 고수조차 함부로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파파팟!
도제의 칼이 기어이 중랑의 가슴으로 짓쳐들었다.
중랑이 좌장으로 내기를 쏟아 도강을 쳐냈으나 완전히 해소할 수가 없었다.
-파아악!
가슴에 세 줄기 도흔이 나며 핏줄기가 튀었다.
“아앗!”
남궁령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크읍.”
중랑이 짧은 신음성을 터뜨리며 뒤로 일 장이나 물러났다.
그러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가슴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마치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검을 곧추세웠다.
“잘 봤소. 이번 공격은 다를 거요.”
도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칼에 당했다면 내상이 적잖을 텐데 다시 공격한다니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중랑은 아무 말 없이 검을 찔렀다.
검은 소리도 없이 도제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일체의 변화도 없이 가볍게 찔러오는 검이다.
도제의 눈에 의혹이 스쳤다가 이내 놀람의 빛으로 바뀌었다.
“어찌….”
검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는데 자신의 가슴이 베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제가 황급히 내공을 돌리며 몸을 회전하였다.
거대한 도제의 몸에서 용권풍 같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가라!”
-콰아앙!
회오리치던 맹렬한 기운이 중랑을 향했다.
거대한 용이 달려드는 것 같은 난폭한 기세였다.
그에 비하면 중랑의 검은 너무나 허허로웠다.
-쉬이익!
놀랍게도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마치 배가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듯 도제의 기운을 가르며 찔러 왔다.
‘…!’
도제가 크게 놀랐다. 중랑의 전신은 도제가 쏟아낸 기파에 베여 여기저기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검을 놓지 않았다. 마치 검에 딸려오듯 중랑은 소리도 없이 다가왔다.
도제가 눈을 부릅뜨더니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공중에서 세 바퀴 돌려 연달아 도를 내리쳤다.
-샤샤샥!
서늘한 기음과 함께 중랑의 검이 닿은 허공이 갈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번쩍!
강렬한 빛이 터지고.
-쿠웅!
대기가 진동하는 굉음이 퍼졌다.
가까이 있던 대정무각 무인들은 소리만 듣고 내장이 진탕하여 피를 토했다.
도제는 이번에야 말로 중랑을 베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칼질에 그가 평생 추구한 무의가 담겨 있었다. 그가 벤 것은 공간이었다.
심검의 경지와 비슷한 일초의 도법으로 후일 도황이나 천주와 겨룰 때 쓰고자 감춰 둔 비장의 한 수였다.
그러니 창제는 물론이고 편제마저 놀라 시선을 떼지 못했다.
“…!”
도제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베었는데?’
중랑이 서 있다. 전신이 피투성이지만 흔들림 없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았다.
-쿨럭!
중랑이 핏덩이를 토하더니 묘한 웃음을 지었다.
도제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굉장한 도법이었소.”
중랑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내 한 수도 괜찮지 않았소?”
도제는 그 말에 가슴이 뜨금하였다.
그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
“어, 도제? 당신 가슴이 갈라지고 있는데?”
창제와 편제가 놀라 소리쳤다.
-쩌적!
도제의 가슴이 한 뼘이나 갈라지더니 핏물이 솟구쳤다.
얼마나 예리한 검이었는지 찔렸는데 의식조차 할 수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돼!”
도제가 입을 열자 갈라진 상처가 부욱, 찢어졌다.
상세는 한 자가량이나 되었다.
“말이 안 된다고!”
도제가 가슴 요혈을 짚어 지혈을 하고 내기를 운용하였다.
“결판을 봅시다!”
중랑이 비칠거리며 다시 검을 내밀었다.
“지독한 놈!”
도제가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