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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207화 (207/250)

207

강소군은 생사경을 넘어 전인미답 미증유의 경지에 한발 내디뎠음을 느꼈다.

그러나 과연 그 느낌이 실제인지 심마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이니 알 수가 없다.

강소군은 오래도록 고를 지켜보았다.

점 같은 새까만 눈은 무심하여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통할 수 있을까?’

강소군이 그런 생각을 하자 고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

그러나 딱 한 차례 움직였을 뿐 이후로는 꼼짝하지 않았다.

‘착각이었을까?’

강소군은 천천히 의식을 거두었다.

***

산밑에 있는 작은 객잔에 남궁령이 나타났다.

객잔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던 노이칠이 다가오는 남궁령을 알아보았다.

“남궁 낭자가 웬일이신가?”

“동약사님을 뵈려고요.”

“중 형님을? 누가 다쳤는가?”

노이칠이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요즘 천황성 고수들이 무한 외곽을 돌아다니며 고수들만 골라 척살하고 있다.

대정무각도 잔뜩 긴장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남궁령이 주저하다 말했다.

“약이 필요해서요.”

노이칠은 더 묻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가 봐야 할 일이 있었는데 같이 가지.”

노이칠은 객잔 뒤편 계곡으로 들어갔다.

남궁령이 뒤따라가자 커다란 목책이 나왔다.

대정무각의 각주들과 무인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곳곳에 하얀 광목으로 팔다리를 동여맨 무인들이 보였다.

대정무각도 군웅각 고수들과 일전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무인이 죽고 각주들도 부상을 당했다.

동약사가 없었더라면 희생자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동약사의 거처는 가장 위쪽에 있었다.

노이칠이 다가가자 모옥 문이 열리고 동약사가 나왔다.

“일각주는 어떤가?”

신임 일각주 중랑도 부상을 입었다.

앞으로 대정무각의 중추가 될 중랑이니 각주들의 관심이 각별하였다.

“다행히 회복이 빠르네. 이번 싸움으로 얻은 바가 있는지 폐관수련에 들어갔네.”

노이칠의 얼굴이 밝아졌다.

“벌써 수련에 들어갔다고?”

“네놈이나 술만 퍼마시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내가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거요? 객잔 주인 행세하느라 그런 거지.”

“그게 말이 되냐?”

동약사가 타박을 하며 노이칠의 뒤에 있는 남궁령을 보았다.

동약사도 남궁령을 안다.

“남궁 소저, 무사했군. 누가 아픈가?”

약사를 찾을 일은 뻔하다.

“수련을 너무 혹독하게 하여 근골이 망가질 정도에 이른 것 같아요. 회복할 수 있는 약이 없을까요?”

‘남궁세가는 무학이 깊고 체계적인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동약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궁령이 한숨을 쉬었다.

팽일호 등 팽가 사람들이 귀가할 때 팽일소는 의천맹에 남았다.

의천맹이 대파와 세가의 후기지수들로 무력대를 편성하였는데 거기에 팽일소가 합류한 것이다.

덕분에 팽일소는 팽가 일행을 덮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바뀌었다.

형과 가솔을 잃은 팽일소는 말을 잃고 온종일 도를 휘둘렀다.

쓰러질 때까지 도를 휘두르다 깨어나면 다시 도를 잡았다.

남궁령이 말렸지만 팽일소는 듣지 않았다.

무공은 신체를 단련시키지만 무리하면 오히려 근골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밥도 먹지 않고 도를 휘두르다 보니 팽일소는 주화입마의 지경에 이르렀다.

팽일소는 도를 쥐지도 못하는 상태까지 가 버렸다.

보다 못한 남궁령과 다른 후기지수들이 합세하여 팽일소를 제압하고 수혈을 짚어 강제로 재웠다.

그리고 남궁령이 동약사를 찾아온 것이다.

의천맹에 당종이 있기는 하지만 성격이 괴팍하여 가까이하기 어려운 데다 요즘 무슨 일인지 두문불출하고 있다.

“으음. 원한을 갚으려면 냉철해야 하지.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네.”

동약사가 사연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 소저의 마음 씀씀이가 참 보기 좋군. 세가의 후손들이 이렇듯 서로 우의를 지켜 간다면 의천맹의 앞날이 기대되네.”

동약사가 흔쾌히 약방문을 써 주었다.

“감사합니다.”

남궁령이 두 손으로 약방문을 받았다.

그때.

-쾅!

기파가 터지는 폭음성이 들려 왔다.

동약사와 노이칠이 벌떡 일어났다.

-퍼펑!

연달아 경력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이 온 모양이군.”

세 사람이 황급히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내려갔다.

대정무각의 무인들이 몰려나왔는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각기 도와 창, 채찍을 든 이들은 도제와 창제, 편제였다.

-휙! 휙!

대정무각의 고수들이 속속 나타났다.

“다 모였나?”

편제가 중얼거리더니 다짜고짜 채찍을 휘둘렀다.

-파아앙!

채찍에서 물결 같은 편강이 쏟아졌다.

“아앗!”

“피해라!”

대정무각의 무인들이 당황하여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정예무인들이라 하나 강기를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크,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편제가 일 장이나 앞으로 날아가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때 허공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채찍은 말이나 소를 부릴 때나 써야지!”

무인들의 뒤쪽에서 낙척서생 유문광이 날아오며 등 뒤의 검을 날렸다.

-쉬이익!

무수한 검영이 채찍이 쏟아낸 강기와 부딪쳤다.

-콰콰쾅!

“너는 내가 상대해 주마!”

어느새 칠각주 칠묘 반여월이 나타나 부드러운 채대를 휘저었다.

채대가 편제를 휘감으려 들었다.

“흥! 이까짓 천쪼가리로 뭘 하겠다고!”

편제가 채찍으로 채대를 후려쳤다.

기운을 주입한 채찍은 마치 막대기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편제는 반여월의 채대를 휘감으려 들었다.

도제와 창제도 뛰어들었다.

유문광이 창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채챙! 타타탓!

창제는 말없이 창을 내밀어 위아래로 휘저었다. 창끝에서 푸른 뇌전이 일더니 유문광을 향해 쏟아졌다.

그 사이 도제가 대정무각의 무인들을 한 차례 휩쓸었다.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콰아아아!

도제의 칼에서 도강이 거침없이 흘러나와 대정무각 무인들을 휘저었다.

같은 강기라도 생사경의 고수가 펼치니 위력이 달랐다. 검으로 막아도 검과 사람이 함께 반동강이 났다.

“크윽!”

순식간에 십여 명이 반토박 났다.

“진을 형성하라!”

대정무각의 무인들이 뒤로 물러나 진을 짜는데 다시 허공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놈들이 알아서 죽으러 왔구나!”

뒤이어 거대한 체구를 지닌 사각주 일도붕산 고대웅이 나타났다.

-쿵!

고대웅이 땅에 떨어지며 발을 굴렀다.

-콰콰콱!

땅으로 흘려보낸 기파가 도제가 서있는 곳으로 쭉 이어졌다.

-콱!

도제는 말없이 도를 땅에 꽂았다. 땅을 가르며 짓쳐 오던 기파가 도에 가로막혔다.

-쾅!

경력이 터지고 흙먼지가 비산하는데 도제가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고대웅의 머리 위로 도제의 칼이 떨어졌다.

“흥!”

고대웅이 코웃음을 쳤으나 경시하지 못하고 자신의 대도를 들어 칼을 막았다.

-콰쾅!

경력이 터지며 고대웅이 주르륵 일 장이나 밀려났다.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격차가 드러났다.

“흐흐. 우리를 군웅각 허접한 놈들과 비교하면 곤란하지. 아줌마가 제법 하는데 아쉽군. 내가 같이 즐겨 줄 시간이 없어서 말야.”

편제가 반여월의 체대를 휘감아 당기며 조롱하였다.

-찌이익!

반여월의 체대가 찢겨 나갔다. 유문광 역시 창제가 쏟아낸 창강을 피하기 급급했다.

“멈춰라!”

곧 대약무검 관중이 나타났다.

뒤로 혈적 염가, 구각주 형운천이 섰다.

그들은 지난번 싸움에서 부상이 심해 곳곳에 붕대를 대고 있었다.

“흐흐흐. 하나, 둘, 셋… 두 놈이 모자란데?”

편제가 나타난 각주들을 세어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었나?”

상관청유는 마침 의천맹으로 가 있고 중랑은 폐관수련 중이다.

“일단 이놈들부터 다 죽이고 보자고.”

편제가 채찍을 설렁설렁 흔들며 말했다.

도제와 창제는 나타나서 이제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안색은 무심할 뿐이다.

관중이 쓰러진 무인들을 보며 속으로 탄식하였다.

‘고작 세 명인데….’

일전의 군웅각 고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 관중은 홀로 도를 쓰는 고수와 싸우다 내상을 입었다. 다른 각주들은 협공을 하여 그나마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때도 각주들이 협공을 했는데도 간신히 군웅각 고수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이들은 그들보다도 한 수 위다.

게다가 자신을 비롯한 몇몇은 부상을 입어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관중은 속으로 갈등하다 결단을 내렸다.

“너희는 일각주를 모시고 후퇴하라.”

관중은 대정무각의 무력을 보전하여 중랑으로 하여금 후일을 도모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피하는 사이 다른 각주들과 함께 동귀어진을 각오로 세 사람을 막을 생각이었다.

“각주님!”

“아닙니다. 저희가 죽음을 무릅쓰고 막겠습니다.”

무력대의 대주들이 비장하게 외쳤으나 관중이 고개를 저었다.

“이각주의 말씀을 듣지 못했느냐?”

염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걱정 마라! 이따위 놈들에게 우리가 질 것 같냐고!”

그러면서 자신의 주판을 움켜쥐었다.

노이칠이 남궁령에게 말했다.

“남궁 소저, 어서 피하시게. 아무래도 저들은 제왕전의 고수들 같네.”

남궁령은 권황과 강소군의 싸움을 본 적이 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싸움이었다.

자신이 있어 봐야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계곡 위쪽에서 중랑이 걸어 내려왔다.

“이런, 넌 또 왜 나오는 거냐?”

염가의 인상이 잔뜩 우그러들었다.

“대정무각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고 하셨잖습니까?”

중랑이 담담히 말하며 대정무각의 무인들을 돌아봤다.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어렸다.

“저들이 무공은 높을지 몰라도 싸우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여기 한 사람 한 사람만 못할 것입니다.”

중랑이 검을 뽑았다.

“천외천? 그런 건 없습니다. 저들 또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중랑의 말에 대정무각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치켜들었다. 말은 없었지만 동조한다는 뜻이다.

중랑이 검을 늘어뜨리며 천천히 도제에게 다가갔다.

“한번 겨뤄 봅시다.”

마치 아는 사이에 비무를 청하는 듯 자연스러웠다.

도제가 미간이 꿈틀거렸다가 다시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미쳤군.”

편제가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 중에 도제가 가장 강했다.

그런데 중랑이 대놓고 도전하는 걸 보니 궁금했다.

편제는 초화평에서 중랑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다.

“일도에 반동강 난다에 내 채찍을 걸지!”

중랑이 편제를 흘깃 보았다.

‘자식, 눈빛이 왜 이래?’

편제가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다시 말했다.

“물론, 아니면 말고.”

편제가 연신 실없는 농짓거리를 흘렸으나 도제와 창제는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쓸어보았다.

“안 된다. 합공을 하자!”

관중이 말했으나 중랑이 고개를 저었다.

“한번 일대일로 겨뤄 보고 싶습니다.”

중랑은 검을 든 이래 무수한 죽음의 고비를 겪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 경우만 해도 다섯 손가락이 넘는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무공을 한층 높이는 계기로 삼아 왔다.

일전에 군웅각의 고수들과 싸우며 역시 깨닫는 바가 컸다.

도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이기는 하나 허망하게 죽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중랑은 관중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도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생사경의 고수라… 과연 얼마나 대단한지 보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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