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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203화 (203/250)

203

“자네 아들의 활약이 대단했더군.”

공손 노야가 맞은편에 앉은 제갈후를 쏘아보며 말했다.

흑천맹 흑도를 팔진도에 가둬 절반이나 죽인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놈이 의천맹 군사를 맡은 건 노야의 뜻이었지 않소.”

“그런데 묘하게 자꾸 걸린단 말이지. 혹 자네 말을 듣지 않는 건가?”

“천주의 대망을 아직 자세하게 밝힐 때가 아니잖소.”

제갈후가 변명하듯 말했다.

“명심하시게. 천주께서 제갈세가를 남달리 생각하는 이유를.”

“….”

제갈후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공손 노야가 그런 제갈후를 노려보다 자신 앞에 놓인 책자를 가리켰다.

“이게 뭔지 아는가?”

“….”

“등 노사의 인명첩이네. 자네 이름도 있지.”

제갈후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잠시 봐도 되겠소?”

“후후. 제갈세가의 천재들은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는다지?”

공손 노야가 어림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책 위에 올려놓았다.

제갈후가 공손 노야를 주시하며 말했다.

“삼태상의 자리를 약속하지 않았소?”

공손 노야는 제갈후를 천황성으로 불러 삼태상 중 무림태상의 자리를 약속한 바 있다.

“그랬지.”

“천주의 허락이 떨어진 게 아니었소?”

“물론 천주께서 승인을 하셨지. 하지만 그냥 그 자리를 내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공이 있어야 자리도 있는 걸세.”

공손 노야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몇 가지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등 노사의 자리는 자네 것일세.”

“…?”

“철권호를 제거했으면 하네. 그가 죽으면 의천맹은 구심점을 잃겠지.”

공손 노야는 연이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뜻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제갈후를 내세워 무림의 주요 인사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세력을 만들 계획이었다.

제갈후는 공손 노야의 속셈을 알 것 같았다.

“하나 더. 불취가 의천맹에 있는 모양인데 그를 산 채로 데려와 주게.”

“둘 다 쉽지 않은 일이오.”

“이럴 때 쓰고자 자네 아들을 심어놓지 않았나.”

공손 노야는 마치 상전이라도 되는 듯 굴었다.

위 태사와 등 노사가 죽었다. 종선생은 나이가 좀 어리다.

공손 노야는 삼태상이 바뀌는 시기에 자신의 위치가 그들보다 위라는 걸 확실히 심어 주고자 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공손 노야의 심복이 들어왔다.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냐?”

“대문 앞에 강소군이 왔습니다.”

“뭐라?”

공손 노야가 벌떡 일어났다.

“몇 놈이나 왔더냐?”

“그게… 혼자 왔습니다.”

“흐흐흐. 그놈이 참 대담하군. 권황을 이겼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모양이구나!”

공손 노야가 나가려다 말고 책상 위에 놓인 인명첩을 집으려 했다.

그때, 제갈후가 벼락같이 장을 내밀었다.

공손 노야는 생사경의 고수다. 기습을 당했건만 어느새 오른손으로 제갈후의 장을 받아냈다.

-퍼엉!

경기가 터지며 폭음성이 일었다.

“제갈후! 무슨 짓이냐?”

공손 노야가 고함을 질렀다. 제갈후는 그 사이 인명첩을 집어 품에 넣었다.

“네가? 배반을?”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가 언제 천황성 사람이었더냐?”

제갈후는 재빨리 일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게다가 나를 천황성 사람이라고 여겼으면 이목은 왜 붙였을까?”

“알고 있었나 보군.”

공손 노야가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지금 이 상황이 말해 주지 않느냐. 사람은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말이지.”

“알았으면 됐다.”

제갈후가 대꾸하며 퇴로를 찾았다.

그 역시 놀라는 중이다. 등 노사 말에 따르면 공손 노야의 무공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일장을 나눠 보니 자신보다 훨씬 내공이 깊다.

공손 노야가 비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복용한 천령단이 뭔지 아느냐?”

“…?”

“천주께서 마음만 먹으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

제갈후가 크게 웃었다.

“하하. 도무지 제갈세가를 뭘로 보는지 모르겠군. 영약이라고 내민다고 곧이곧대로 받아먹을 줄 알았나?”

“…!”

공손 노야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제갈후를 천황성으로 불러들였을 때 분명 천령단을 먹는 걸 직접 봤다.

그런데 무슨 수작을 부려 먹은 척한 걸까?

“등 노사를 하루 이틀 본 게 아닌데 그가 어떤 금제에 걸려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더냐? 미리 준비한 환약을 먹었을 뿐이다.”

“휴우. 역시 제갈씨답군. 하지만 잘 생각해 봐라. 천황성이 어떤 곳인지 잘 알지 않느냐?”

공손 노야가 졌다는 듯 달래듯 물었다.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이러는 것이다.”

제갈후가 벼락같이 쌍장을 휘둘렀다.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공손 노야가 왼손으로 제갈후의 장을 옆으로 쓸어 내쳤다.

동시에 오른손으로 제갈후의 멱살을 잡으려 하였다.

-퍼엉!

제갈후와 공손 노야 사이에서 폭음이 터지더니 하얀 연기로 뒤덮였다.

“흥! 급했구나. 명색이 세가의 가주라는 놈이 이런 하오문의 수법이나 쓰고.”

공손 노야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네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게 있다. 용담호혈이 있다면 이 장원을 두고 한 말일 게다.”

***

강소군은 무애검을 들고 장원의 대문을 노려보았다.

노이칠의 말대로라면 대정무각 십각의 이목들이 장원으로 잠입하려다 무수히 희생됐다.

장원 안은 기관진식이 사방에 깔려 있어 침입은 물론이고 정면 공격도 어렵다고 했다.

지난번 강소군에 의해 장원이 불탄 경험을 한 공손 노야가 철저히 대비를 한 것이다.

강소군이 무애검에 공력을 흘려보냈다.

이어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무애검으로 원을 그렸다.

이제는 선명한 금빛 원형 구체가 벼락치듯 뻗어 나갔다.

-콰앙!

대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소군이 대문으로 들어섰다. 대문 안은 제법 너른 광장이었다.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강소군은 곳곳에 숨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쿵!

-콰당!

광장 끝에 중문이 있는데 그 너머에서 기관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

강소군은 중문 너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잠시 기다렸다.

-쾅!

폭음과 함께 중문 옆으로 이어진 담벼락이 무너지고 한 사람이 튀어나와 굴렀다.

“크윽!”

비틀거리며 일어난 인영은 제갈후였다.

백발은 산발이 되고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등에는 강침이 대여섯 발 꽂혔고 왼팔은 손목이 잘렸다.

“하하하! 이까짓 기관진식으로 제갈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제갈후가 소리치고는 이를 악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법도 진법이지만 곳곳의 전각이나 기둥, 돌담까지 모두가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기관장치들이었다.

진법과 기관에 능통한 제갈후가 아니었다면 살아나오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간신히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중상을 입었다.

공손 노야가 중문으로 걸어 나왔다.

“제법이군.”

그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제갈후가 아무리 기관진식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온 힘을 기울인 함정을 빠져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지금 강적이 대문을 깨부수고 들어왔다.

마치 미리 짠 듯 공교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네놈이 저놈과 내통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야.”

공손 노야가 강소군과 제갈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강소군은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이 내심 놀라고 있었다.

피투성이 노인이 제갈세가의 사람이라고 하니 유심히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제갈선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휙!

공손 노야의 신형이 사라졌다.

순간 강소군의 손에서 무애검이 날았다.

공손 노야와 제갈후의 거리는 삼 장여.

그러나 강소군과 제갈후의 거리는 십 장 가까이 달했다.

-펑!

제갈후가 오른손을 들어 공손 노야의 장력을 막았다.

“크윽!”

제갈후가 뒤로 튕겨 나갔는데 방향이 강소군이 있는 곳이었다.

공손 노야가 허공에 뜬 제갈후를 뒤따라 가며 다시 일장을 내지르려는데 강소군의 검이 당도했다.

“흥!”

공손 노야가 양손을 원형으로 감아 경기를 쏟아내자 무애검의 방향이 살짝 틀어졌다.

무애검은 공손 노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공손 노야가 다시 몸을 날리려다 흠칫,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허공을 선회한 무애검이 다시 날아오는 중이다.

“잔재주가 보통이 아니구나!”

공손 노야가 다시 양손으로 경력을 쏟아냈는데 무애검은 눈이라도 달린 듯 장력을 피해 강소군에게 돌아갔다.

“…!”

공손 노야의 미간이 잔뜩 우그러들었다.

쓰러진 제갈후 옆에 어느새 강소군이 서 있었다.

-쿨럭.

제갈후가 피를 토하더니 품에서 인명첩을 꺼냈다.

“자네가 강소군이지. 나는 제갈후라하네. 이걸 내 둘째아들에게 전해 주게.”

강소군이 인명첩을 받아들었다.

“그들이 천황성에 협조하는 무림인들이네. 아들에게 전해 주게. 이 아비는 한 번도 제갈가와 무림 정의를 잊지 않았노라고.”

강소군이 제갈후의 요혈을 짚었다.

“그런 말씀은 살아서 직접 하셔야지요.”

제갈후는 이미 정신을 잃어 강소군의 말을 듣지 못했다.

강소군은 가타부타 말없이 제갈후를 들쳐 없고 몸을 날렸다.

“저놈을 막아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공손 노야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사방에 웅크리고 있던 군웅각 고수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공손 노야도 바로 뒤따라 강소군을 쫓았다.

등 노사의 인명첩이 공개되면 그동안 수십 년 쌓아 왔던 무림의 기반이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

“크으윽. 의천맹으로 가는 게 아니었나?”

제갈후가 어느새 깨어났다.

강소군이 가는 길은 초화평이었다.

“나는 이미 틀렸네. 잠시라도 막아 볼 테니 나를 놓고 빠져나가게.”

제갈후는 강소군이 자신 때문에 제대로 도주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만 주무시지요.”

강소군이 제갈후의 수혈을 눌렀다.

-화라라락!

잠시 지체하는 사이 머리통만 한 불덩이가 날아왔다.

무애검이 허공을 그었다.

-퍼엉!

불덩이가 산산히 흩어졌다.

강소군은 반탄력을 이용해 다시 몸을 날렸다.

-쉬익!

이번엔 비도가 날아왔다.

제갈후를 업은 강소군은 몸놀림이 제약을 받았다.

무애검으로 쳐내려 했으나 비도는 눈이 달린 듯 밑으로 푹 꺼져 나아왔다. 애초부터 다리를 노린 것이다.

강소군이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파악!

비도가 허벅지를 살짝 스쳤다.

강소군은 지체하지 않고 다시 몸을 날렸다.

제갈후를 업고 달리는 강소군은 좀처럼 적을 떨치지 못했다.

공손 노야는 군웅각 고수들의 뒤를 따르며 도주하는 강소군을 노려보았다.

의심이 많은 그는 먼저 나서는 법이 없었다.

‘저놈이 저리 미련했던가?’

다 죽어 가는 제갈후를 기어이 업고 달리는 강소군이 의심스러웠다.

널따란 초화평에 이르자 공손 노야는 더욱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초화평은 탁 트인 개활지다. 도주하는 이라면 절대 피해야 할 곳이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강소군을 놓칠 수는 없었다.

등 노사의 인명첩을 잃는다면 천주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깟 놈 하나 못 잡고 뭐 하느냐?”

공손 노야가 참다못해 소리치고 몸을 날렸다.

-파앙!

마치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공손 노야의 신형이 쏘아갔다.

그때.

-화라락!

사방에서 불길이 일었다.

“와아!”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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