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99화 (199/250)

199

-파라라락!

검기가 비산하였다.

“크흐흐. 소용없다 하지 않았느냐?”

공손 노야가 비웃으며 쌍장을 휘저었다.

양손이 아우르는 공간에 부드러운 기운이 생성되며 검기를 누그러뜨렸다.

불취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최상의 상태였더라도 공손 노야와 겨룰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불취는 공손 노야의 기운을 측량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내가 처음 검을 잡았을 때 어떤 분이 그러더군.”

불취가 연달아 검을 찌르며 공손 노야를 공격하였다. 보법과 어우러진 검법은 깔끔하였다.

“싸울 수 없는 상대를 만나거든….”

불취가 검을 쭉 뻗다 그대로 놓았다.

검이 스윽, 날아갔다.

“흥!”

공손 노야가 양팔을 벌려 둥그렇게 말아 공간을 만들었다. 불취의 검이 공간에 갇혀 멈췄다.

“도주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불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이 퍽, 하고 검이 부서졌다.

“으읍!”

공손 노야는 터지는 검의 파편을 가두기 위해 공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불취 역시 현경 초입에 든 고수다. 그가 터뜨린 검에는 암경이 담겨 있었다.

“허!”

그 짧은 사이 불취의 신형이 사라졌다.

불취는 검법을 펼치며 공손 노야의 위치를 슬그머니 바꾸었다가 검을 터뜨리고 도주한 것이다.

사방에 군웅각의 고수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공손 노야가 가로막은 길은 비어 있었다.

“쫓아라!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사방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공손 노야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잔꾀 하나는 알아줘야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공손 노야가 쿵, 하고 땅을 굴렀다. 신형이 쑤욱, 하늘로 날아올랐다.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도제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공손 노야가 기막을 둘러 불취와의 대화를 차단했지만 도제의 귀까지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인고라고….”

도제 역시 천령대법의 금제를 알고 있었고 이를 지웠다고 여겼다.

재빨리 운기를 해 봤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도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발을 굴렀다.

-쿵!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

모옥에 불취는 없었다.

강소군은 알면서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문을 열어 텅 빈 모옥을 확인하였는데 탁자에 서찰이 놓여 있었다.

서찰의 겉면에 당우화라고 적혀 있었다.

강소군이 되돌아 문을 나오는데 멀리서 달려오는 당우화가 보였다.

당우화는 할아버지 당종이 싸움에 참가하자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함께 참전하였다.

팔진도에서 당우화의 활약이 가장 뛰어났다.

당우화가 뿌린 암기에 쓰러진 흑천맹 흑도가 꽤 될 것이다.

싸움이 끝나자 당우화는 소식을 전하고자 달려온 것이다.

“강 공자께서 웬일이죠?”

달려오던 당우화가 강소군을 보고 멈칫, 했다가 갑자기 안색이 굳었다.

“오라버니!”

당우화가 재빨리 강소군을 밀치고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서찰을 뜯는 소리가 들렸고.

“이 나쁜 자식! 또 사라졌어!”

당우화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당우화는 서찰을 들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강소군이 다가가서 당우화의 손에서 서찰을 받아 읽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당가에 가 있어.」

당우화가 풀썩, 주저앉았다.

“이, 이… 나쁜 새끼….”

당우화가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험한 입과는 달리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불취가 눈앞에 있으면 당장 죽일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닌 것 같소.”

강소군이 말했다.

당우화가 강소군을 쳐다봤다. 강소군이 서찰을 내밀며 말했다.

“가 있으라는 말은 자기가 찾아가겠다는 말 아니오?”

“…?”

당우화가 서찰을 받아 다시 읽었다.

“그런가?”

순식간에 얼굴이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근데 왜? 어딜 갔지? 아직 몸도 불편할 텐데.”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강소군은 불취가 어디를 갔는지 알 것 같았다.

-휙!

당우화가 바람 소리에 주위를 돌아봤는데 강소군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헉! 헉!”

화노에게 당한 등짝의 상처가 심장을 달궈 죽을 지경이었다.

오랜 시간 환생단으로 굳어 있던 몸이다. 내력보다 몸이 먼저 무너졌다.

공손 노야가 생사경을 걷는 고수란 사실을 몰랐던 것도 실책이었다.

그러니 죽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당우화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보고 싶었다.

그래서 달렸다.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러다 마주쳤다. 그에게 가장 잔인했던 어느 날의 기억과.

“….”

“…!”

순간 불취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걸까?

차라리 죽을지언정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가장 비참한 순간에.

“우평아!”

장대한 체구를 지닌 장년의 남자가 불취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불취는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부릅뜨고 관도 위에 선 무리를 보았다.

푸른 무복과 황의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다.

강호에서는 그들을 남궁세가와 팽가로 부른다.

무리의 앞에 선 이는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남궁악이다.

어렸을 적 자신을 무척 따랐던 남궁악의 한 팔이 잘린 걸 봤을 때 무척이나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지금은 남궁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선 이.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천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 않을 기도를 뿜어내고 있는 이는 분명 그의 사부 남궁천이다.

동시에 아버지를 죽인 자이기도 하다.

불취가 신형을 곧추세웠다.

“….”

“….”

십여 년 만에 만난 사부와 제자는 말을 잃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저쪽이다!”

멀리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검진!”

남궁악이 뒤를 돌아보고 나직이 소리쳤다.

순간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재빨리 검진을 펼쳤다.

남궁천과 함께 온 창천대.

남궁세가 최정예 무력이 검진을 펼치자 마치 단단한 성을 하나 쌓은 듯했다.

팽일호도 손을 들었다. 그러자 팽가의 무사들이 다섯 명씩 무리 지어 도진을 짰다.

팽일호가 눈을 부릅뜨고 불취를 바라보았다.

‘뭐지? 아는 사이인가?’

팽일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적어도 자신의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안다.

의천맹 본단에 있으면서 돌아가는 사정은 놓치지 않았다.

당연히 지금 관도 한복판에서 피범벅이 되어 비틀거리는 사내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사천 당가의 여식과 관련이 있는 사내다.

하지만 그가 남궁세가와 관련이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휘이익!

날카로운 소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팽일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불취를 쫓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 안 것이다.

남궁천은 길 한복판에 비틀거리며 서 있는 제자를 보자 가슴이 뭉클하였다.

남궁악이 창천을 보냈을 때 제자 사우평이 죽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남궁우의 말을 듣고 살아 있음을 알았다.

곧바로 전서구를 보냈으나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창천대 일백 무인을 이끌고 달려왔다.

무한에 당도했을 때 아들 남궁악이 천황성 고수들과 격전을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동했다.

그러나 이미 싸움은 끝난 뒤였다.

아들이 무사한 걸 다행으로 여기고 의천맹 본단으로 귀환하는 중이었다.

그 길에 잃어버린 제자 사우평을 만났다.

남궁천 역시 운명이라는 걸 느꼈다.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는 제자를 보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휘이이익!

기다란 소성과 함께 천황성의 고수들이 속속 나타났다.

남궁천의 굵은 눈썹이 꿈틀하였다.

“우평아… 네 손에 검이 없구나.”

남궁천이 한 발 내디디며 창천검을 던졌다.

“…!”

남궁악이 약간 놀라 아버지를 보았다.

창천검은 남궁세가의 신물이나 다름없다.

불취가 돌려준 검을 남궁천이 다시 던져 준 의미를 남궁악은 알고 있다.

불취를 여전히 남궁세가의 대제자로 여긴다는 뜻이다.

“무인은 검을 손에서 놓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불취가 창천검을 받았다.

“….”

불취는 창천검을 내려다봤다.

남궁세가를 떠나던 날 훔쳤던 검이다.

세가의 신물을 훔친 것으로 작은 복수를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생각이었다. 검을 볼 때마다 남궁세가가 떠올랐으니까.

복수라고 생각했는데 족쇄를 차고 나온 셈이었다.

강소군에게 검을 넘기고 얼마나 허허로운 자유를 느꼈는지. 그런데 운명처럼 그 검이 다시 돌아왔다.

불취는 망연자실하여 서 있을 뿐이었다.

천황성 고수 가운데 화노도 있었다.

화노가 말했다.

“불취, 포기해라. 노야가 너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삭막했던 천황성에서 그래도 불취와 잔정이나마 나눴던 화노다.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불취는 창천검만 내려다볼 뿐 말이 없었다.

그 사이 천황성의 고수들이 속속 뒤에 내려섰다.

불취가 뒤를 돌아봤다.

천황성의 고수들은 무심한 얼굴로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화노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불취를 보고 손짓을 했다.

-휘이이익!

다시 기다란 소성이 들리며 날아오는 이가 있었다.

불취는 문득,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공손 노야, 그리고 천황성의 고수들.

얼핏 보아도 지금 모여 있는 천황성 군웅각의 고수들은 서른 명가량이 되었다.

‘이런….’

불취가 남궁천 일행을 바라보았다.

남궁세가와 팽가의 무인들.

언뜻 봐도 백여 명이 넘는다. 강호에서라면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무력이다.

그러나 절대지경에 든 서른 명의 고수들에게는 그저 사냥감에 불과할 것이다.

공손 노야의 시선이 남궁천을 향했다.

“남궁세가의 가주를 여기서 볼 줄 몰랐군.”

남궁천도 공손 노야를 응시하였다.

“남궁가의 사람이 핍박받는데 가주로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무의미한 피만 흘리게 될 것이다. 남궁의 명맥이라도 잇고 싶다면 빠지는 게 좋을 것이다.”

“하하하.”

남궁천이 크게 웃었다.

“과연 광오하군. 그러나 남궁가의 사람들을 너무나 모르는구나.”

남궁천이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돌아봤다.

“남궁가에 몸담은 사람 중에 적이 두려워 물러난 이가 있었더냐?”

“없습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공손 노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 원한다면….”

공손 노야가 손을 드는데 갑자기 불취가 무릎을 꿇었다.

“…!”

“우평아!”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불취를 향했다.

“내가 졌다! 따라가겠다!”

불취가 일어나더니 창천검을 남궁천에게 다시 던졌다.

“나와 남궁가의 인연은 오래전에 끊어졌소. 나의 일에 개입하지 마시오.”

“우평아….”

남궁천의 눈에 착잡한 빛이 어렸다.

불취가 왜 이러는지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인이다. 적을 만나면 싸우고 싸우다 죽는 무인이다. 네가….”

“아니!”

불취가 남궁천의 말을 잘랐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불취의 표정은 냉랭했고 말투는 차가웠다.

“당신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잖소.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를 스승으로 알고 십수 년을 살아야 했소.”

“…!”

“…?”

불취의 말에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물론 팽일호 등도 놀랐다.

불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힘이 없어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뿐! 내게 남궁가는 원수의 가문일 뿐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