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98화 (198/250)

198

권황은 대경실색하였다.

지웠다고 생각한 영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군웅각의 고수라면 천주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자유의지라고 여기고 그대로 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황도 생사를 관조하며 자신을 객체화시켜 보는 생사경이 완숙에 이른 경지다.

그러다 보니 천주의 목소리가 실체로 들렸다.

권황이 망연자실하여 자신의 두 팔을 보았다.

형편없이 뭉개진 팔이다. 지금 빨리 물러나서 치료하지 않으면 영영 불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천주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강소군을 죽이라고 속삭였다.

강소군과 동귀어진을 하라는 뜻이다.

“으….”

악마의 속삭임과 같은 목소리에 권황은 움직일 수 없었다.

동시에 그의 자유의지가 발동하여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물러날 수도 그렇다고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권황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였다.

강소군이 정파이니 저항하지 않는 적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하고 모험을 하였다.

권황은 정좌를 하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

강소군은 권황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그저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 역시 내력을 모두 소진한 상태다. 암암리에 금단진공을 운용하며 주위를 살폈다.

권황이 도주하려다 말고 주저앉은 건 분명 엄호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들려 오는 것은 의천맹 본단에서 울리는 비명 소리뿐이었다.

강소군이 권황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르륵!

권황의 코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툭!

핏물과 함께 새끼손가락만 한 하얀 덩어리 하나가 떨어졌다.

하얀 덩어리는 땅에 떨어져 잠시 꿈틀거리다 굳었다.

강소군은 이 장 거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그게 무언지 볼 수 있었다.

누에만 한 덩어리는 희디흰 벌레였다.

그 순간 권황이 눈을 떴다.

그는 삽시간에 수십 년은 늙은 듯 초췌해 보였다.

“독랄하군….”

권황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주에게 욕을 해댔다.

권황이 자신의 앞에 떨어진 흰 벌레를 보았다.

무슨 신묘한 술수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고(蠱)였다.

강소군과의 싸움이 아니었다면 영인을 지운 걸로 착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권황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기다려 줘서 고맙군.”

“그게 당신들에게 걸린 금제였소?”

권황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의천맹 본단에서 한 사람이 날아왔다.

십여 장을 쭉쭉 날아오는 이는 검제였다.

그 뒤를 철권호가 따랐다.

권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검제가 철권호에게 쫓기는 형국이었다.

검제는 순식간에 강소군과 권황이 있는 곳까지 왔다.

권황이 강소군을 향해 말했다.

“오늘은 우리가….”

-퍼억!

검제의 검이 빛살처럼 권황의 목을 스쳤다.

갑작스레 당한 권황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검제를 노려보았다.

“네가, 왜… 컥!”

“사내가 졌으면 죽음을 받아들여야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다는 말이냐?”

검제가 냉랭하게 대꾸하였다.

권황의 얼굴에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랬군. 너도 영인을 지우지 못한 것이로군.”

검제의 눈에 의문이 빛이 스쳤다.

“무슨 소리냐?”

“크흐흐… 컥!”

권황은 사실을 일러줄 생각이 없는지 괴이한 웃음을 짓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 사이 철권호가 날아왔다.

싸우다 말고 갑작스레 도주한 검제가 권황을 죽이는 걸 보고 놀랐다.

“미친 게냐? 자신의 편까지 죽이다니.”

“흐흐. 네가 뭘 알겠느냐?”

검제는 한마디 흘리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놓칠 것이라 생각하느냐?”

철권호가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강소군은 두 사람이 왔다가 사라졌으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천천히 권황에게 다가가 그가 뽑아냈던 벌레를 살폈다.

손가락만 한 벌레는 껍질이 투명했는데 안은 우윳빛이 돌았다. 주름진 마디마다 집게 같은 작은 발이 달려 있었다.

“…?”

강소군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불취도 천령대법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모종의 금제가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권황의 경우를 보니 금제가 아니라 벌레에 의한 작용이었다.

‘섭혼술의 일종 같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실체가 있는 고였다는 말인가?’

불취는 자신이 금제를 벗어났다고 했다.

‘그도 잘못 알고 있구나.’

영인의 실체가 고라는 걸 알았다면 고를 죽였다고 말했을 것이다.

“와아!”

의천맹 본단에서 함성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흑천맹 흑도들이 필사적으로 장원을 벗어나고자 하는 게 보였다.

“쫓지 마라! 더 이상의 희생은 불필요하다!”

제갈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싸움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았다.

강소군은 고를 헝겊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몸을 날렸다.

***

“크억!”

불취는 등짝에 화끈한 충격을 받고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화노(火老)의 열화장이 스쳐 갔다.모르긴 몰라도 등판에 시꺼멓게 탄 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화노, 정신 차리라고! 우리 사이가 이거밖에 안되나?”

불취가 이를 으드득 갈며 화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천주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냐?”

화노가 오히려 불취를 꾸짖었다.

“크하하. 정말 무섭구나 무서워.”

불취가 개탄하였다.

천령대법의 금제는 사람의 정신을 장악하는데, 당한 이는 이를 모르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으로 여긴다.

불취가 자신을 포위한 자들을 보았다.

모두 네 명으로 군웅각의 고수들이다. 화노를 제외한 세 명은 말을 섞어 보지 않은 자들이다.

‘여우같은 놈!’

공손 노야의 진을 벗어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후가 문제였다. 들어올 때는 지켜만 보던 군웅각의 고수들이 막아섰다.

모두 달려들어 막았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뚫고 한 방향으로 도주하면 되니까.

그런데 군웅각 고수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사방으로 퍼진 뒤 길목을 막았다.

불취는 경공술이 뛰어나다. 공손 노야는 이를 감안하여 포위망을 쳤다.

무슨 일인지 공손 노야를 불취를 생포하기를 원했다. 그랬기에 이렇듯 서서히 옥죄어 들어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제기랄!”

불취가 욕을 뱉고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화노 등은 쫓지 않았다.

불취가 어디로 도주하든 군웅각의 고수와 마주치게 되어 있다.

불취는 장원으로 오는 큰길로 나섰다. 차라리 대로를 택한 것이다.

“흐흐흐. 내가 그리 쉽게 보내 줄 줄 알았더냐?”

큰길에 불취가 나타나자 공손 노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을 자리인지 알고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군.”

길을 막고 선 이는 공손 노야뿐이다.

불취가 기운을 펼쳐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군웅각 고수들은 삼십여 장 거리 곳곳에 포진하고 있었다.

불취가 어디를 택하든 가로막힐 것이다.

“하하. 당신이 홀로 나를 막은 이유는 또 무엇이오? 혹, 저들이 영인고에 대해 눈치챌까 봐 그런 것 아니오?”

불취가 소리를 높였으나 일정 거리 이상을 퍼져 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소리쳐 봐야 소용없다.”

공손 노야의 전신에서 기운이 퍼져 나와 소리가 퍼져 나가는 걸 막고 있었다.

불취가 내공을 실으면 기막을 뚫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손 노야에게서 얻어내야 할 게 더 있었다.

“당신도 영인고라는 것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지는 않군. 이렇게 나를 생포하려고 드는 걸 보니.”

“….”

“천황성 이인자라더니 그냥 하수인에 불과한 것이었나?”

공손 노야에게는 쓰린 질문이었다.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크흐흐. 네 녀석이 나를 찾아온 이유를 모를 것 같으냐? 영인이 지워졌는지 아닌지 확인을 하러 온 게 아니냐?”

‘여우 같은 놈.’

불취가 속으로 욕을 했다.

사실이다. 불취는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영인이 작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랬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공손 노야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자. 내가 확인을 해 주지.”

“어떻게?”

“순순히 말을 듣는다면 너도 알게 될 것이다.”

“하하하.”

불취가 크게 웃었다.

“내가 아무리 주정뱅이로 살아 엉망진창이었다지만 이렇게 황당한 제의를 할 줄은 몰랐군. 왜? 내 머리를 열어 고가 살았나 죽었나 보게?”

하지만 공손 노야는 웃지 않았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지.”

“미쳤군. 하하하. 그걸 내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다니.”

불취가 웃음을 그쳤다. 퍼뜩, 스쳐 간 생각이 있었다.

“그렇군. 당신도 영인고에 당한 거지?”

공손 노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흐흐. 나를 흔들어 봐야 소용없다. 너는 영인고를 지웠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간단하다면 어찌 삼황오제가 아직 천황성에 매여 있겠느냐?”

“….”

“네 머릿속에 심어진 영인고는 죽지 않았다. 나는 느낄 수 있지. 그런데 왜 말을 듣지 않는지 그게 궁금하거든?”

“내가 술을 좀 먹였지.”

“크흐흐.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불취도 확신할 수 없었다.

술이 고의 작용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죽이지는 못했다.

불취는 내심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그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이후 당우화가 환생단을 먹여 온몸이 굳어진 채 한 달여 시간을 지냈다.

어쩌면 영인고도 그때 같이 굳었을지도 모른다.

‘죽지 않았다면 다시 깨어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불취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심각하게 자진을 고려하였다. 영인고가 활동하면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

“휴우.”

불취가 한숨을 쉬었다.

남에게 정신을 지배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지금 이 순간도 공손 노야의 입술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영인고를 발동시키는 주문 같은 걸 외고 있는 것일 터였다.

불취가 하늘을 보았다.

푸른 하늘에 당우화의 얼굴이 그려진다.

‘우화야….’

마지막으로 한 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흐흐흐. 포기하지 마라. 네 말대로 영인고가 죽었을 수도 있으니까.”

공손 노야는 속으로 그럴 리가 없다면서도 불취를 설득하려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영인고가 죽으면 숙주인 사람도 죽는다.

불취가 살아 있다는 건 영인고가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공손 노야는 불취가 정말 영인고를 죽이고도 살아난 것인지 궁금했다.

불취의 말처럼 그 역시 영인고에 당한 게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인고는 어미와 자식으로 나뉜다. 새끼 고는 어미 고의 지배를 받는다.

어미는 무수히 많은 알을 낳는다.

천주는 천령대법을 시술하면서 그 알을 시술받는 이의 머릿속에 심었다.

백일이 지나면 알이 고로 변화하며 뇌에 달라붙어 숙주의 정신과 동화된다.

천주는 어미 고를 지니고 있기에 이를 통해 새끼 고와 감응을 할 수 있다.

공손 노야는 천주로부터 영인고를 조종할 수 있는 주문을 받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영인고의 무서움을 잘 알기에 늘 자신도 당한 게 아닐까 의문을 지녀 왔다.

자신은 천령대법을 받지 않았지만 언제 어떻게 고를 심어 놓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크흐흐. 이제 그런 건 상관없다. 진작 죽었어야 할 몸이다. 당신을 데리고 저승으로 가면 그나마 세상에 이롭게 하는 일이 되겠지.”

불취가 검을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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