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강소군의 전신에 은은한 금빛이 어렸다.
“…!”
강소군은 화공 등을 처지한 뒤 계속 금룡기를 운용하였다.
권황을 상대하면서도 금단진공으로 의식을 나눠 한편으로 금룡기를 운용하였다.
상관무영과 겨루며 초식의 완성을 이룬 뒤 그는 막막한 무극의 경지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금룡기 또한 한층 상승하여 이제는 운용하면 전신에 금빛이 어린다.
“역시 기이한 수법을 지녔군.”
권황이 강소군의 금빛을 보며 암암리에 내공을 전신에 퍼뜨렸다.
권황의 거대한 체구가 점차 흐릿해졌다.
이번에는 권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로서도 가진 바 최고의 절기를 펼쳐낸 것이다.
-쿠쿠쿠쿠쿵!
허공이 접히는 소리가 연달아 들어왔다.
-고오오.
갑작스레 사위가 멈춘 듯 고요해졌다.
강소군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금빛이 짙어져 갔다.
강소군의 또 다른 의식은 무극해의 묘리로 파고들었다.
-콰아악!
허공이 폭발하더니 강소군의 눈앞에서 강기가 터져 나왔다.
강기는 상중하 단전을 동시에 노렸다.
강소군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파라락!
강소군이 비껴들고 있던 검을 감아 돌렸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돌았다.
-쉬이이익!
강소군의 검이 공간에 금빛 환영을 그렸다.
원반형의 환영이 겹겹이 퍼져 나가는데 끝도 없었다.
무수한 금빛 환영 하나하나가 벽이었다.
권황의 권이 금빛 환영의 벽에 부딪혔다.
-쾅!
거대한 권력에 첫 번째 금빛 환영이 깨어졌다.
-콰콰콰쾅!
두 번째, 세 번째… 무수히 많은 금빛 환영이 깨져 나갔다. 하지만 환영은 끝도 없었다.
권황의 막강한 권력도 결국은 스러지고 말았다. 마치 무한한 밤하늘 어딘가로 사라진 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
권황이 눈을 부릅떴다.
***
-파아앙!
불취가 흑돌을 튕겨냈다.
-쉬이익!
공손 노야의 앞에 떠 있던 돌들이 불취를 향하여 쏘아져 왔다.
-땅!
불취의 흑돌은 공손 노야의 무수히 많은 바둑돌 중 하나와 부딪쳐 허공에서 폭발하였다.
-탕!
불취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그 반동을 이용해 허공으로 솟았다.
-쉬시식!
언제 빼 들었는지 불취가 검을 휘저었다.
-파라라락!
검기가 빗줄기처럼 공손 노야를 향해 내리쳤다.
“흥!”
공손 노야가 손을 위로 치켜올리자 바둑돌이 일제히 솟았다.
-따다다당!
빗줄기처럼 들이닥치던 검기가 바둑돌과 부딪쳐 흩어져 나갔다.
-펑!
공손 노야가 왼팔로 바둑판을 쳐 올렸다.
한 자 두께의 두꺼운 바둑판이 허공에 뜬 불취를 향해 날아갔다.
-퍽!
불취는 왼손을 내밀어 막아 냈다. 바둑판을 막기는 했으나 실려 있는 경력까지 모두 감당하지는 못했다.
-휙!
불취가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정자 밖으로 내려섰다.
“흐흐. 노야의 솜씨가 생사경에 이르렀는지는 미처 몰랐소.”
불취가 흘흘, 거리며 말했다. 목소리는 태연했으나 내심 놀라고 있었다.
천황성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공손 노야는 책사로서 지닌바 무공이 그리 높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정도면 검황보다 높지 않을까?’
불취는 손바닥을 타고 들어온 공손 노야의 경기를 흘려냈다.
“아는 이는 모두 죽었거든.”
공손 노야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도 죽을 것이고.”
“하하, 쉽지는 않을 것이오.”
“과연 그럴까?”
공손 노야가 앉은 채 그대로 둥둥 떠서 정자를 나오더니 불취의 앞에 내려섰다.
“지금 죽일 생각이었다면 너는 벌써 죽었다.”
불취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흥미가 생겼지. 어떻게 영인을 지울 수 있었는지 정말 궁금하거든.”
공손 노야의 얼굴에 음험한 미소가 어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하오?”
“그렇지. 네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천령대법의 한계를 찾아낸 셈이거든.”
“하하. 그런데 어떡하오? 나는 당신에게 말해 줄 생각이 없는데? 당신에게 물어볼 게 있어 왔는데 답을 안 하니 나는 이제 가 봐야겠소.”
불취가 너스레를 떨었다.
공손 노야의 음험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네가 정말 크게 착각하고 있구나. 내가 왜 무공을 드러냈는지 생각 안 해 봤느냐?”
불취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이상스레 새나 벌레같이 어디나 있어야 할 존재의 느낌도 없다.
천황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절진도 이렇다.
“네가 들어오는 순간 여기는 봉쇄되었다. 작은 천황성이나 마찬가지지.”
공손 노야는 마치 손안에 잡힌 새를 희롱하듯 말했다.
요즈음 강소군 때문에 심사가 불편했는데 화풀이할 대상을 찾은 기분이었다.
불취가 빙그레 웃었다.
“노야가 모르는 게 또 하나 있소.”
“크, 네 녀석이 제법 수완이 좋다는 건 알고 있지.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을 벌일지 궁금하군.”
“오, 나에 대해 제법 알고 있는 모양이오?”
“나는 천황성 모든 이들에 대해 알고 있지.”
불취가 미간을 찌푸렸다.
공손 노야의 방금 말은 무척 의미심장한 것이다.
“당신도 영인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뜻이로군.”
불취가 말을 돌리며 공손 노야를 떠봤다.
불취는 오랫동안 영인에 대해 알아내려 했으나 아직도 영인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정확히 몰랐다.
지금 알고 있는 바는 천주가 마음만 먹으면 말 한 마디로 영인이 찍힌 자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상대를 죽이지는 못하는 거고? 천주의 힘을 빌려 명을 내릴 수 있는 정도로군?”
“흠.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군.”
공손 노야가 무슨 일인지 순순히 인정하였다.
“참으로 지독한 섭혼술이로군.”
“이게 섭혼술이라고 생각하느냐?”
물론 불취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다만 대화를 끌어가기 위함이었다.
‘어쩌면 영인의 실마리를 풀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불취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수년간 영인에 대해 알아내려 했으나 아직도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른다.
천주전은 아무나 들 수 없었고 영인의 존재를 말하는 이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천황성 군웅각 고수들은 영인에 대해서 아는 이조차 없었다.
그렇게 고대해 왔던 영인에 대한 단서를 공손 노야의 입에서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처지도 잊고 흥분하였다.
처음에는 불취도 섭혼술의 일종으로 알았다.
그러나 점차 영인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섭혼술 이상의 마력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천황성의 고수들은 절대지경에 들었다고 스스로들 믿고 있으나 실제로는 천주의 꼭두각시들이었다.
천주를 천신처럼 받들고 명을 받으면 불구덩이라도 서슴지 않고 뛰어들었다.
거기까지는 섭혼술과 비슷했다. 하지만 영인은 그 이상의 힘이 있다.
말 한 마디로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건 섭혼술을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보통 섭혼술은 아니겠지.”
“흐흐흐. 영인을 무슨 주문이나 술법으로 여기다니. 의외로군. 실체도 모르면서 영인고(靈印蠱)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었지?”
“영인고?”
공손 노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불취가 영인의 실체를 모르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이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불취는 공손 노야가 왠지 순순히 대화를 이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알고 보니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불취가 영인에 대해 알아내려는 것처럼 공손 노야 역시 불취가 영인을 지운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하하하. 그랬군. 천령대법은 단지 위장이었어. 고를 집어넣어 공력을 증폭시키고 조종을 했던 것이로구나.”
불취가 드디어 알아냈다는 듯 무릎을 쳤다.
“흐흐흐.”
공손 노야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따름이다.
공손 노야가 능구렁이라면 불취는 여우였다.
공손 노야의 표정만 보고도 영인에 대한 비밀이 더 있음을 깨달았다.
“네가 이렇듯 영악한 놈인 줄 알았다면 제자로 삼을 걸 그랬구나.”
“당신 같은 사부는 사양하겠소.”
불취가 재빨리 주위를 돌아보았다.
“근데 궁금하지 않소?”
“…?”
“아까 내가 그랬잖소. 당신이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있다고.”
“크크.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고 하는군. 소용없다니까.”
“과연 그럴까?”
불취가 갑자기 검을 날렸다.
-쉬이익!
검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공손 노야를 향해 날아들었다.
불취 역시 화경에서 현경으로 넘어갔다.
유유히 날아오는 검에는 불취가 이제껏 쌓아 온 경력이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러나 공손 노야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말했잖느냐? 천황성 제 이인자는 나라고!”
-팍!
공손 노야가 손을 휘젓자 불취의 검이 가로막혔다.
-땡그랑!
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
공손 노야가 흠칫, 놀랐다.
어느새 불취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하하! 천황성 문지기라는 말이 왜 붙었는지 아직 모르겠소?”
불취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공손 노야의 눈꼬리가 쑤욱 올라갔다.
군웅각 고수들은 불취를 천황성 문지기라고 불렀다. 다분히 비웃음이 담긴 별호였다.
불취는 군웅각 호화로운 처소를 마다하고 천황성으로 들어오는 계곡 입구 모옥에서 살았다.
공손 노야는 그게 바깥에서 기다리는 당우화를 그리는 마음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이제 보니 불취는 천황성 계곡 입구에 펼쳐진 절진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황성 계곡에 펼쳐진 절진은 무척 넓고 규모 또한 거대하여 파훼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공손 노야가 머무는 후원에 펼쳐진 절진은 그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범위도 넓지 않았다.
물론 이 정도로도 그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절진이다.
하지만 다년간 절진을 연구해 온 불취에게는 어렴풋이 길이 보였다.
“빠져나간다고? 어림없다!”
공손 노야가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몸을 날렸다.
***
-쩌억!
화려한 금빛이 허공을 갈랐다.
권황은 온몸이 통째로 터져 나가는 충격을 느꼈다.
‘이, 이럴 수가!’
권벽(拳壁).
권의 강기로 쌓은 벽을 말한다. 권황의 권은 권벽을 넘어 공간 전체를 자신의 권강으로 채워 넣는 경지에 이르렀다.
마음만으로 상대를 벨 수 있다는 심검처럼 그의 의지만으로 상대에게 언제든 권을 내지를 수 있는 경지다.
그런데.
강소군의 무수한 금빛 환영에 가로막혔다.
금빛 환영은 그야말로 끝이 없이 생성되었다.
그거야말로 진정한 벽이었다.
“이게 무슨 무공이냐?”
권황이 진심 궁금하여 물었다.
“나도 모르오.”
“뭐라고?”
“굳이 이름 붙인다면 무극해라고나 할까?”
“무극해?”
권황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경 너머가 무극인가?”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오.”
권황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어렸다.
천주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하지만 검황이나 도황은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여겼다.
그러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게다가 천주가 등천하면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무참하게 깨졌다.
권황은 형편없이 뭉개진 자신의 두 팔을 내려다봤다.
팔꿈치부터 주먹이 있었던 자리까지 핏빛 고깃덩어리 같은 형체만 남아 있을 뿐이다.
권황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일단 자리를 피할 셈이었다.
“수하들은 놔두고 갈 참인가?”
자신보다 강적이 있다는 걸 안 이상 흑천맹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든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을 때 다시 불러모으면 된다.
권황이 말없이 뒤로 물러나는데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제거하라. 너는 할 수 있다!
권황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