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96화 (19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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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팽일소가 돌담 옆에 서서 외쳤다.

-챙!

남궁령이 달려드는 흑도 한 명의 병장기를 쳐내고 몸을 날렸다.

팽일소와 남궁령 등 후기지수들은 적을 유인하여 깊숙이 끌어들이는 임무를 맡았다.

밀고 들어오는 흑도의 일대와 접전을 벌이는 척하다 장원 후원 쪽으로 물러났다.

팽일소는 남궁령이 돌담 안으로 들어오자 옆에 있는 줄을 힘차게 잡아당겼다.

-쿠쿵!

한 무더기의 돌이 쏟아지며 돌담 통로를 막았다.

그러자 쫓던 흑도들이 코웃음을 쳤다.

“이 쥐새끼들! 잡히면 죽는다!”

흑도들은 돌담 위로 뛰어올랐다.

“엇!”

돌담 위로 오른 흑도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하였다.

무수한 돌담이 미로처럼 겹겹이 둘러 있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남궁령과 팽일소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이게 뭐지?”

어리둥절해하는데 어디선가 비도가 날아왔다.

“컥!”

흑도 한 놈이 비도에 맞아 그대로 쓰러졌다.

“암기다! 피해라!”

흑도들이 황급히 돌담에서 뛰어내렸다.

좁은 돌담 골목에 내려선 흑도들은 다시 위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쪽으로 간 모양이군.”

돌담길 끝에 전각이 있었다. 흑도들이 전각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서는 순간 다시 대여섯 명이 나뒹굴었다.

“기관이다!”

흑도 중 하나가 당황하여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돌담길은 구불구불하여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돌담 위로 올라서면 어디선가 암기가 날아왔다.

요행히 전각을 발견하여 들어가면 기관에 걸려 죽기 십상이었다.

“대체 이게 뭐지?”

흑도들은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대문을 지나 널따란 연무장에 들어섰을 때 아무도 보지 않아 도주한 걸로 여겼다.

그런데 사방으로 난 월동문이나 통로에 의천맹 무인들이 보였다.

흑도들이 일제히 쫓자 그들은 접전을 벌이다 후퇴하였다.

승기를 잡은 줄 알고 사기 충천하여 그 뒤를 따라왔는데 이상한 진에 갇힌 것이다.

“저기! 저기로 간다!”

흑도 하나가 대전 뒤편 통나무를 엮어 쌓아 올린 높은 누각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누각에 몇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쉭!

“컥!”

-챙!

“이년이?”

-쉬익!

“크억!”

누각으로 가고자 미로를 달리던 흑도 둘이 갑작스레 나타난 검과 도에 찔려 쓰러지고 말았다.

팽일소가 피 묻은 도를 닦으며 남궁령에게 말했다.

“사정 봐주지 말라고.”

남궁령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봐주긴 누가 봐줬다고 그래.”

팽일소의 도는 적을 베었는데 남궁령이 공격한 적은 용케도 병장기를 세워 막았다.

그러자 팽일소가 곧바로 다시 도를 찍어 쓰러뜨린 것이다.

“한 놈을 놓치면 우리 편 한 사람이 죽는다고 생각하라고!”

팽일소가 평소와 달리 흥분하여 몰아붙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남궁령이 그만하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왜 그래?”

“나는 이런 거 정말 싫단 말이야.”

“엥?”

팽일소가 멍한 얼굴로 남궁령을 보았다.

“무림이라면 이제 끔찍해! 맨날 죽고 죽이고!”

남궁령이 울상을 지었다.

“너, 남궁세가 맞아?”

팽일소가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

제갈선은 누각에 서서 아래를 보았다.

“급하게 이룬 진이라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옆에 있던 철권호가 감탄하였다.

“그래도 돌담과 목책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진을 펼치다니. 과연 제갈세가답소.”

제갈선은 의천맹 본단에 팔진도를 응용한 진을 펼쳤다.

미로와 같은 진은 한 번 갇히면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철권호는 제갈세가의 진정한 무서움을 눈으로 보자 내심 혀를 내둘렀다.

흑천맹 흑도들은 무리지어 진으로 들어왔다가 서로 뿔뿔이 갈려 우왕좌왕하였다.

진을 벗어나기 위해 허공으로 몸을 띄우면 어디선가 암기가 날아들었다.

고수들은 암기를 쳐내고 진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곧이어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피유융!

몸이 노출되자마자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흑도들은 단단히 방비를 하고 미로를 탈출하려 했으나 곳곳에 매복한 의천맹 무인들에게 걸려 속절없이 당했다.

의천맹은 거대한 미로에 적을 가둬놓고 차례차례 해치워 갔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만 워낙 열세이니 어쩔 수 없군요.”

전장을 내려다보는 제갈선의 목소리는 암울하였다.

흑도들은 미로에 갇힌 쥐떼처럼 우왕좌왕하다 죽어 갔다.

사람이란 갇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당황한다. 그러기에 가진 바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죽어 나갔다.

제갈선이 생각하는 무림의 싸움은 이런 게 아니다.

저기 밖에서 강소군이 보여 주듯 자신이 갈고 닦은 무공으로 상대와 정면대결하는 게 무림의 방식이다.

이처럼 진법이나 기물을 이용하여 대략으로 적을 해치우는 방식을 강호인들은 경멸한다.

흑도를 물리친다는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잘했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갈 장로가 말하지 않았소. 이건 전쟁이라고. 나 역시 강호의 인물이지만 삼천 흑도와의 싸움은 전쟁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오.”

철권호가 위로하듯 말했다.

“이 싸움을 승인한 것은 나요. 강호에서 오늘의 싸움을 탓하려면 맹주인 나를 탓해야 할 것이오.”

철권호가 사방 담벼락을 겹겹이 두른 궁수들을 보았다.

대정무각의 무인들이다.

대정무각은 애초부터 군의 장수 백정무 등이 주축이 되어 세운 문파다.

전쟁까지 염두에 두고 훈련을 해 왔기에 궁술에도 능했다.

그들이 활시위를 놓을 때마다 어김없이 흑도들이 쓰러졌다.

“모든 목숨이 소중하다지만 의천맹주인 내게는 우리 무인의 목숨 하나가 흑도 열보다도 귀하다오.”

철권호는 어찌 보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의 표정 역시 좋지만은 않았다.

제갈선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았다. 동시에 철권호에 대한 신뢰가 더욱 강해졌다.

“맹주님의 진심을 강호는 알아줄 것입니다.”

철권호는 묵묵히 멀리 대전 너머 광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 선 검제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사람 거리는 백여 장이나 되었지만 서로를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검제는 흑도의 무리가 절진에 갇혀 죽어 가는 건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들이다.

다만 성의는 보여야 한다. 오늘 공격 명령을 내린 이는 공손 노야다. 그러니 나름 할 도리는 해야 한다.

“저자가 검제로군요.”

제갈선이 철권호의 시선을 따라가다 광장에 서서 이쪽을 보는 검사를 보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갈선이 말했다.

철권호는 본단 앞에서 군웅각 고수들과 격전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검제는 천황성 수뇌부로 꼽히는 고수이니 제갈선으로서는 당연히 염려가 되었다.

“밖에서 홀로 감당하는 이도 있지 않소?”

철권호가 멀리 대문 쪽을 봤다. 담장에 가려 어찌 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으니 가 봐야겠군. 제갈 장로께서 마무리를 지어 주시오.”

철권호가 군령을 넘기고 몸을 날렸다.

무려 삼십여 장을 날아간 그는 대전의 지붕을 한 번 밟고 재차 도약하였다.

한 마리 붕새처럼 날아 광장에 내려섰는데 검제는 그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쿵!

철권호가 내려서자 검제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아직 생사경에 들지 못한 듯한데. 영인을 어찌 지웠나?”

“그게 무슨 소리요?”

철권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령대법을 받지 않았다는 겐가?”

“당신들은 왜 그리 천령대법을 떠받드는지 모르겠군.”

철권호가 말했다.

군웅각 고수들은 천령대법을 천주의 은총이라고 여긴다.

대법을 한 번 받은 자들은 맹주를 마치 천신처럼 받든다는 걸 알고 있다.

“받지 않았다는 게로군. 의외인걸?”

“천황성에 갔을 때 천주가 그러긴 했지. 천령대법으로 단숨에 성취를 올려주겠다고.”

“거절했다는 건가?”

검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무공을 한 단계 올려준다면 영혼이라도 팔 자가 무림에 수두룩하다.

철권호가 자신의 두 주먹을 내보였다.

“남아로 태어나서 이 두 주먹만 믿고 강호를 활보하였소. 남의 도움으로 벽을 넘어선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철권호는 천령대법을 받지 않았으나 천황성에서 심득을 깨달아 절대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스로 이룬 경지이기에 철권호는 군웅각의 고수들을 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검제는 그들과 다르다. 생사경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고수다.

철권호는 일전에 강소군이 천황성 고수들과 접전을 벌일 때 구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편제와 강소군이 남긴 싸움의 흔적을 봤다.

철권호는 방심하지 않고 천천히 발을 뗐다.

검제 역시 검을 빼 들었다.

“제왕전의 고수들이 과연 어떤 자들인지 궁금했소.”

철권호의 전신에 기운이 어렸다.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황제를 자처하는지 알고 싶었지.”

-쿠쿵!

철권호가 한 발을 내딛는데 지면이 울렸다.

반면 검제의 몸은 살짝 허공으로 떴다. 놀랍게도 지면에서 반 자 정도 허공에 떠오른 것이다.

철권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고수더라도 저렇듯 내공을 소모하며 몸을 띄울 이유가 없다.

허공에 떴으니 발 디딜 곳이 없어 도움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한번 봅시다! 제왕전 고수의 솜씨를!”

철권호의 신형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동시에 사방에서 권풍이 난무하였다.

-쉬익!

어느 순간 허공을 찢고 권이 나타났다.

보기만 해도 얼마나 단단한지 철권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그런데.

-쑤욱!

검제의 신형이 그대로 밀려났다.

동시에 촤라락! 하는 기음과 함께 검제의 등 뒤로 네 개의 팔이 나타났다.

네 개의 팔에는 각기 검이 들려 있었다.

실제 팔이 아니라 기운이 유형화한 것이다.

심지어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던 왼팔에도 검이 하나 잡혀 있었다.

“…!”

“수라팔황검이라 한다. 오랜만에 제대로 펼쳐 보는군.”

검제가 말을 마치자 신형이 쑤욱 앞으로 다가왔다.

철권호의 안색이 꿈틀하였다.

근접전에서 여섯 개의 검이 쑤시고 들어온다면 막을 길이 없다.

권사가 상대하기에 가장 까다로운 상대를 만난 것이다.

***

“크악!”

처음에는 간헐적으로 들려 오던 비명이 점점 더 늘어나더니 이제는 사방에서 들린다.

의천맹 본단 담장에 선 대정무각의 궁수들은 연달아 활을 쏘고 있다.

권황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검제와 달리 흑천맹에 대한 욕심이 있다.

권황은 천주의 천령대법을 이어받으면 무림으로 나와 군림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천주처럼 천황성에서 등천을 꿈꾸며 고적하게 일생을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흑천맹 흑도들이 죽어 나가는 게 아까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궁수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강소군에게 매여 있었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강소군의 일검이 찔러 올 것이라고 본능이 경고해 왔다.

묘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압박감이 강해지니 권황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저 안에는 진이 펼쳐져 있지. 공손 노야도 제갈세가가 팔진도를 아직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을 거야.”

“팔진도?”

“미로에 갇혀 헤매다 죽어 가고 있겠군.”

강소군은 담담하게 말했다.

‘뭐지? 이놈은?’

권황은 갑자기 강소군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일었다.

수많은 이가 죽어 가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권황은 강소군이 자신의 심기를 흔들려고 하는 걸 깨달았다.

내심 감정을 가라앉히고 강소군을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너부터 죽여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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