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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황은 격노하여 지체 없이 일권을 내질렀다.
-퍼엉!
허공이 찢어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대한 권의 형상이 밀고 들어왔다. 허초도 변식도 없었다. 그저 우직하게 덮쳐 올 뿐이다.
“아앗!”
의천맹 본단 문루에서 애간장을 졸이며 지켜보던 남궁령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 힘으로 저런 기운을 내뿜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권황이 일권을 뻗는 순간 강소군의 눈앞에 권형이 들이닥쳤다.
“…!”
권형 그 자체가 살기였다.
스치기만 해도 경력에 의해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강소군은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았다. 대신 짚고 있던 검을 비스듬히 쳐올렸다.
-서걱!
놀랍게도 권형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무형의 기운이 갈라진다는 건 상식궤를 벗어난 현상이다.
두 사람의 격돌을 보는 모든 이가 놀랐다.
달려가던 철권호도 멈춰 섰다.
누구보다 놀란 이는 권황이었다.
보기에는 가볍게 내지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의지를 실어 보낸 것이다.
기와 마음이 어우러진 권은 심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강소군이 그 기운을 갈랐다.
그뿐이 아니다. 허공을 한 번 휘젓는가 싶더니 곧장 권황을 찔러 왔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검의 궤적이다.
“…!”
그냥 검이 아니다.
검의 궤적을 따라 무수한 빛이 생성됐다. 기다란 별무리가 검을 따라오는 듯했다.
권황으로서는 처음 보는 검이다. 대개 검기나 검강은 검에 앞서 상대를 공격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강소군의 검은 허공에 강기를 뿌렸다.
어느 순간, 검이 멈췄다. 그러자 뒤따르던 별무리가 완벽한 구체를 형성했다.
구체의 크기는 석 자가량이었으나 완연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권황의 안색이 굳었다.
그냥 강기의 덩어리가 아니다. 권황은 구체에서 완벽한 검로를 보았다.
권황이 황급히 전신 기혈을 개방하고 몸을 비틀며 재차 권을 질렀다.
기운으로 제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초식으로 바꾼 것이다.
한 손은 허공을 다른 한 주먹은 옆구리를 노리는 게 강호에서 흔히 보는 쌍룡출해와 비슷했다.
쌍권에 실려 있는 기운은 마치 태산과도 같았다.
두 주먹 사이에 거대한 기운이 회오리쳤다.
권세를 따라 쭉쭉 뻗는 기운은 분명 강기였다.
원형 구체와 권강이 부딪쳤다.
-쿠앙!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제를 비롯한 흑천맹 흑도들이 경악을 하였다.
마치 산이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일었다.
기파가 지면을 뒤집으며 흙구름이 피어올랐다.
강소군과 권황의 모습은 흙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흙구름이 서서히 걷히며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권황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경악으로 물든 채였다.
오랜 세월 단련한 권이다. 부수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해 왔다.
권황이 시선을 들어 강소군을 보았다.
검을 늘어뜨린 모습이 허허로워 보였다.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데 그 시선이 멀었다. 아득한 어느 곳을 보는 듯했다.
무척 지친 모습이다.
권황의 눈에 옆에 나뒹구는 시신이 들어왔다. 분명 저들을 해치우느라 격전을 치렀을 것이다.
자신도 저들을 모두 상대하려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권황은 강소군이 그들을 모두 해치운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권황은 강소군의 무위를 측량할 수가 없었다.
기운을 살펴보려 했으나 허허로운 느낌뿐이다.
‘설마 나를 능가한단 말인가?’
그건 인정할 수 없다.
무공의 갈래는 수없이 많다. 권황은 강소군이 독특한 신공을 익혔을 것이라 단정했다.
“….”
침묵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이윽고 생각을 마친 권황이 주먹을 내리며 말했다.
“검황이 물러날 만하군.”
권황은 무척이나 영악한 자였다.
검황과 도황이 도태되었으니 천주의 위가 눈앞에 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자네는 의천맹과 상관이 없는데 왜 길을 막고 있는 것인가?”
“나에 대해 듣지 못한 모양이군. 공손 노야가 말하지 않던가?”
“네가 황실의 인척이라는 건 알지. 황제를 대신하여 나선 것인가?”
“그럼 대정비각도 알겠군.”
“대정비각?”
권황의 표정에서 강소군은 그가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소군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천황성 최고 수뇌부라는 삼황조차 대정비각을 모른다는 건, 결국 천주와 공손 노야 두 사람을 제외한 이들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결국 사냥개에 불과했던 건가?”
강소군이 중얼거렸다.
권황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를 보고 강소군이 말을 이었다.
“한심하군. 천령대법이라는 미끼에 현혹이 되어 자신들이 실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모르다니.”
-팍!
강소군과 권황의 주위로 기막이 펼쳐졌다. 권황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막은 것이다.
천령대법은 천황성에서도 수뇌부만 아는 비밀이다.
“네가 어찌 천령대법을 알고 있느냐?”
강소군은 불취에게서 천령대법에 대해 들은 바 있다.
“평범한 이가 단숨에 화경의 경지에 이르는데 의문을 갖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
“천령대법의 영인은 지웠나?”
권황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강소군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꽤 자세히 알고 있군. 그렇다면 영인의 굴레를 벗어던져야 삼황오제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아나?”
“내가 보기에 그런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
권황의 안색은 더더욱 굳었다.
“적어도 편제나 창제는 영인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더군.”
“…!”
삼황오제는 생사경에 들면서 영인의 존재를 눈치챘다.
권황은 처음 영인의 존재를 알았을 때 크게 분개했으나 천주를 찾아가서 따질 수가 없었다.
영인이 발동하면 어찌 될지 모르니 경거망동할 수가 없던 것이다.
사실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제약을 받아들인 건 권황 자신이었다.
천주는 영인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다만 천령대법을 하기 전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였을 뿐이다.
‘천령대법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역천의 대법이다. 시술받으면 그에 따른 제약이 생기는 걸 감수해야 한다. 생사경을 넘으면 그 제약도 사라진다. 받겠느냐?’
단숨에 경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데 거절할 자가 있을까?
당시에는 제약이고 뭐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사경에 이르러 영인의 존재를 알게 되자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인은 역천의 대가로 인해 감수해야 할 필연적인 제약이 아니었다.
천주가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화인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너는 나의 노예다, 라는 의미와 같았다.
권황은 이후 절치부심하여 수련에 매진한 끝에 간신히 영인을 지웠다. 그리고 자신이 생사경의 끝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권황은 영인을 지우고 난 뒤 검황이나 도황, 오제 등의 단계를 유심히 살폈다.
천주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지면 우선 영인을 극복한 자가 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두가 철저히 자신의 단계를 은폐해 왔기에 알 수가 없었다.
권황 역시 막연하게 편제와 창제가 영인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만 하고 있었다.
“그 영인이라는 게 발동하기 전에는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고 하더군. 과연 당신은 영인을 완전히 지웠다고 자신할 수 있나?”
강소군이 묻자 권황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검황과 싸웠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고, 도황을 만났다는 것도 아나?”
“도황과도 겨뤘나?”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탁하더군. 검황과 겨뤄 달라고.”
“….”
권황은 도황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도황 역시 다른 이들이 영인을 극복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일 게다.
영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삼황오제 정도 되면 상대의 무공의 단계를 알게 될 경우 대충 가늠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도황이나 검황도 영인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더군.”
강소군의 말에 권황의 귀가 번쩍 트였다.
“그랬나? 의외로군. 그들 정도면 벌써 지웠어야 했는데.”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당신은? 아까 물었는데 아직 대답을 않더군. 영인을 지웠다고 자신할 수 있나?”
권황이 대답하려다 말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문득 강소군의 물음에 자기도 모르게 순순히 답하려는 자신을 본 것이다.
‘아차! 이놈이 나를 떠보려 하는 것이었구나!’
권황은 강소군이 대뜸 천령대법 운운하는 바람에 그의 말을 받아주다 하마터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노출할 뻔했다.
권황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보기보다 여우 같은 놈이로구나. 나를 유도하여 정보를 캐려 하다니.”
강소군은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권황이 확실히 대답한 건 없었다. 하지만 보인 태도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추정할 수 있었다.
“당신 정도 되는 고수가 왜 공손 노야의 명을 충직하게 따르는지 참 궁금했거든?”
“….”
“결국 당신도 영인을 극복하지 못한 게 아닐까?”
“개소리 마라!”
권황이 코웃음을 쳤다.
“이런 생각을 해 봤지. 흑천맹을 차지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천맹을 치러 출정을 한다?”
“….”
“조직이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원정에 나서는 수장은 없지.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대군을 몰고 온 건 공손 노야가 시켜서겠지?”
권황이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는 이번 출정의 대가로 천령대법을 요구하였고 공손 노야가 받아들였다.
그러니 강소군의 말이 가당치도 않았다.
“흐흐흐. 네놈의 혓바닥은 무공만큼이나 현란하군. 보아하니 더 들을 이야기도 없을 것 같구나.”
권황의 전신에서 다시 스멀스멀 기운이 피어올랐다.
“내가 네 헛소리를 들어 준 이유를 말해 줄까?”
권황이 손을 쳐들었다.
“와아!”
“존명!”
거대한 함성과 함께 흑천맹 흑도들이 일제히 의천맹 본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후후. 네 녀석이 나를 막든 말든 의천맹이 오늘 끝장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권황은 기막을 펼치기 전 검제에게 전음을 보내 공격준비를 시켰다.
의천맹에 철권호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검제라면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나머지 무리는 압도적으로 수적 우위를 지닌 흑천맹 흑도들이 밀어 버리면 된다.
권황은 적당히 강소군을 붙들고 있을 심산이었다.
싸움은 사기가 좌우한다. 권황은 위험부담을 안고 강소군과 정면대결하는 걸 미루고 우선 의천맹을 친 후 강소군을 잡기로 한 것이다.
흑천맹 흑도들은 세 갈래로 나뉘어 의천맹 본단으로 질주하였다.
앞서간 이는 벌써 담을 넘었다. 곧이어 대문이 열렸다.
검제는 본진을 이끌고 대문으로 들어갔다.
강소군이 질주하는 흑도의 무리를 보고 다시금 빙긋, 웃었다.
권황은 갑자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강소군이 의천맹 본단으로 뛰어드는 흑도들을 보며 말했다.
“의천맹에는 머리 쓰는 자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권황이 의천맹 쪽을 보았다.
삼천 명에 이르는 흑도지만 모두 무공을 익힌 자들이다.
의천맹 본단은 원래 삼도문의 장원으로 담벼락이 낮았다. 일류고수들은 한 번의 도약으로 넘을 높이다.
그러니 순식간에 흑도들은 장원으로 진입하였다.
그런데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생각보다 요란하지 않다. 몇 차례 산발적으로 들리다 말뿐이다.
“공성계(空城計)라고 들어 봤는지 모르겠군.”
“…?”
-피유융!
사방에서 불화살이 솟았다.
“와아!”
장원 안에서는 물론이고 사방에서 함성이 울렸다.
곳곳에서 무인들이 뛰쳐나와 장원 담벼락에 섰다.
그들의 손에는 전장에서나 쓸 법한 대궁과 쇠뇌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