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94화 (19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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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제는 권황이 묻는 이유가 짐작이 갔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대답했다.

권황이 이죽거렸다.

“자네와는 말이 좀 통하는 줄 알았는데 섭섭하군.”

“하하. 대체 왜 이리 서운해하는지 모르겠군요.”

“자네가 이 상황을 모르는 척한다는 건 나를 외인으로 여긴다는 것 아닌가.”

‘빌어먹을 늙은이.’

검제는 권황이야말로 뱃속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는 들어차 있는 사람이란 걸 안다.

권황은 누구보다 욕심이 많았다. 그가 천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 또한 검제는 잘 알고 있다.

지금 권황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오라고 은근히 타진하는 것이다.

‘검황과 도황이 도태되었다고 생각하니 야심을 드러내는구나.’

삼황오제는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해 왔다.

천주가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지만 그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다.

천주가 죽으면 누군가 뒤를 이어야 한다. 그 자리에 오르면 천황성의 막강한 힘을 이어받을 수 있다.

후계를 이을 자격은 삼황뿐만 아니라 오제에게도 있다.

그러니 권황은 끊임없이 그를 견제하려 든다.

“그렇게 말하니 솔직히 말하겠소. 천주께서 천령대법을 완성하신 듯하오.”

“역시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군.”

천령대법이 완성됐다는 건 천주의 등천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권황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검제를 보며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알아서 처신하리라 믿네.”

검제는 대답하지 않고 정면을 주시하였다.

권황이 검제의 시선을 따라 앞으로 향했다.

멀리 의천맹 본단이 보이는데 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보통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 거리이건만 권황과 검제의 눈에는 똑똑히 들어왔다.

“저놈이 강소군이겠군.”

권황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리 어린놈이 검황을 꺾었다니….”

검제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가 검황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한 이유는 딱 한 가지.

검황이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실제로 겨뤄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검제는 검황이 자신보다 삼 푼 앞서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 강소군이 검황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르는 내막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사실 검제의 추측은 정확했다.

당시 강소군은 초식의 완성이라는 경지를 보여 주었고 검황은 이를 깨려다 스스로 내상을 입고 물러난 것뿐이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검제는 지금 강소군의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를 벽을 느꼈다.

주위에 쓰러진 시신들은 천황성의 고수들이다.

그 한가운데 피투성이 차림으로 서 있는 모습에서 어쩌면 정말 검황이 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검제는 절대경지에 든 이후 종이 한 장 차이가 얼마나 큰지 절감하였다.

삼류무인의 싸움에서는 무공만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의지나 주위 분위기, 심지어 운까지 여러 가지 변수가 작용한다.

하지만 고수들의 싸움에서는 이러한 변수가 점점 더 줄어든다.

절대지경에 들었다는 건 이러한 외부 변수에 더 이상 좌우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웅각 고수들은 진정한 의미의 절대지경을 이룬 게 아니었고 검제는 이를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었다.

검제 역시 한때 수라마검으로 불렸다. 그만큼 무수한 격전을 치렀고 수많은 피를 봤다.

그랬기에 지금 강소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혈향이 얼마나 짙은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검의 고수로군요.”

“자네가 상대해야겠군.”

권황은 슬쩍 검제에게 미뤘다.

검제는 강소군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기는 했으나 자신이 질 것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권황의 부추김에 넘어가 그를 상대할 생각도 없었다.

“나설 때가 있겠지요.”

검제가 슬그머니 즉답을 피했다.

“왜 두려운가?”

“어떤 자인지 궁금해서 그렇소.”

“하긴, 자네의 숙적인 검황을 꺾은 자이니 궁금하기는 하겠지.”

“….”

검제는 대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몇 마디 하는 사이 팔인교가 강소군이 서 있는 광장에 당도하였다.

***

-쾅!

두꺼운 대문이 떨어져 나갔다.

장원 곳곳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하하. 나야 나. 너무 놀라지 말라고.”

불취가 대문을 넘어서며 소리쳤다.

“노야! 불취가 왔소. 얼굴 좀 봅시다!”

-휙!

한 사람이 나타났다.

굵은 허리에 두꺼운 목을 지닌, 다부진 체구의 장년 사내는 반백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허리에 기다란 도를 차고 있었는데 폭이 무척 좁았다.

“도제 어르신이 와 계실 줄은 몰랐소.”

불취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도제를 바라보았다.

도제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불취를 보았다.

“생사벽을 넘은 것이냐?”

“그랬으면 참 좋겠소만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오. 벽을 넘기는커녕 부딪히지도 못했소.”

“으음.”

도제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불취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무슨 일로 온 게지?”

“공손 노야를 만나러 왔소.”

“죽고 싶었던 모양이군. 노야가 보면 가만두지 않을 텐데.”

“죽을 뻔하기는 했소. 그런데 염왕이 좀 있다 오라고 돌려보내더라고.”

도제는 일일이 대꾸하는 불취를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기다려 봐라. 대문이 쪼개졌으니 안에서 무슨 연락이 있겠지.”

도제가 한쪽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불취를 막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공손 노야의 시종이 후원 쪽 월동문에서 나왔다.

“노야께서 만나 보겠답니다.”

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딱히 막을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불취가 시종을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공손 노야는 후원 연못가에서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바둑을 두시오?”

공손 노야는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어떻게 풀었지?”

“뭘 말이오?”

불취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으며 공손 노야의 맞은편에 앉았다.

공손 노야는 마침 백돌을 내려놓고 있었다.

불취가 흑돌을 하나 쥐더니 공손 노야 옆에다 딱 붙여 놓았다.

공손 노야의 미간이 꿈틀하였다. 불취가 바둑을 망쳐 놓은 것이다.

공손 노야가 불취를 노려보았다.

“정말 영인(靈印)이 사라진 모양이군.”

“그걸 영인이라고 하오? 나는 무슨 섭혼술이라고 생각했지 뭐요.”

불취가 다시 흑돌을 쥐더니 바둑판 빈 곳에 두었다.

“백일대법을 받고 천 일에 걸쳐서야 간신히 지울 수 있었소. 참 지독한 수법이었지. 영에 낙인을 찍어 두다니.”

“대체 어떻게 그걸 알았지?”

천주의 천령대법을 받으면 순식간에 화경에 이르고 두뇌 또한 영민해진다.

그런데 천령대법에는 천주와 공손 노야만 아는 비밀이 숨어 있다.

백 일간 대법을 받을 때 영에 낙인을 찍어 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술받은 이는 평생 천주의 명에 따라야 한다. 물론 받는 이는 자신의 영에 인이 찍혔다는 걸 모른다.

그저 진심으로 천주를 따르기에 명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긴다.

눈치도 못 채니 영인을 지울 생각도 하지 않는다.

생사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재량껏 지우는 것이다.

천주가 생사경에 든 이를 삼황오제로 대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미 지워졌는데 굳이 지난 일을들먹일 필요가 있겠소?”

“흐흐. 확실하게 지웠다고 생각하느냐?”

불취의 안색이 미묘해졌다.

사실 삼황오제조차도 자신들의 영인이 확실히 지워졌는지 자신을 못한다.

생사경에 들어서야 영인의 존재를 눈치채고 간신히 지웠다.

하지만 다시 한 단계 올라서면 또 다른 영인이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불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내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가 아니겠소?”

불취는 과거 천황성 군웅각이 아니라 입구의 모옥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우연히 천황성을 몰래 빠져나가려던 이가 갑자기 쓰러져 죽는 걸 봤다.

독에 당한 것도, 진법에 의해 죽은 것도 아니다.

불취는 이후 의문을 품고 유심히 지켜보았고 갑작스레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걸 알아냈다.

공손 노야는 그게 천령대법으로 갑자기 공력이 높아지며 주화입마에 든 경우라고 하였다.

군웅각의 고수들이 처박혀 무공에만 몰두하는 이유가 경지를 끌어올려 주화입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러나 불취는 그것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찜찜함을 느겼다. 그리하여 천령대법에 의문을 품고 추적한 끝에 영인의 존재를 알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영에도 인이 찍혀 있음을 느꼈다.

이후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영인이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당우화가 단주탕을 먹이는 바람에 더 이상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불취로서는 펄쩍 뛰었는데 곧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영인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생사경을 넘지 않고 영인을 지울 수 있었다니 놀랍군.”

공손 노야가 중얼거렸다.

그가 암중으로 주문을 외웠는데 불취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제 나도 한 가지 물어보겠소.”

불취가 흑돌을 하나 더 집어 들고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천주의 뜻이 무엇이오?”

삼황오제와 군웅각의 고수를 끌고 나온 이유를 묻는 것이다.

공손 노야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청하였지만 사실 천주가 들어줄 것이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지금 천주가 일부러 내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하늘의 뜻을 하찮은 네가 어찌 알려 드는 것인가?”

공손 노야가 말을 끊었다.

“하늘? 하하. 여전히 광오하군. 그런데 말이오.”

불취가 흑돌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바둑돌을 튕기면 당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소?”

공손 노야는 고개를 들어 불취를 보았다.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네가 뭘 착각한 게 있는 모양이군.”

공손 노야가 희미하게 웃었다.

“생사경을 가장 먼저 넘은 자가 누구일 것이라 생각하느냐?”

공손 노야가 자신의 손을 바둑판에 올려놓았다.

휜돌과 흑돌이 그대로 허공으로 반자쯤 떠올랐다.

***

“당신이 권황인가?”

강소군이 물끄러미 권황을 보았다.

강소군은 권황과 검제의 기운이 읽었다.

얼마 전 도황이나 검황을 만났을 때는 그들의 기운을 읽을 수가 없었다.

상관무영과 겨루며 초식의 완성을 완전히 이룬 뒤 그는 자신이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에 들어섰음을 느끼고 있다.

강소군은 권황의 기운이 검제보다 미약하나마 우위에 있다는 걸 느꼈다.

“흐음. 어린놈이 예의가 없군.”

“황제를 사칭하는 건 역모나 마찬가지다. 참수되어야 마땅한 역도를 존중할 이유가 없지.”

“허? 이놈 보게?”

권황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검제를 보았다.

검제는 묵묵히 눈썹만 찌푸리고 있을 뿐이다.

강소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이어 검제에게 말했다.

“네가 검제겠군. 공손 노야라고 했던가? 천황성의 군사라는 작자가? 그자에게 가서 전해라.”

검제도 어이가 없었다. 감히 자신을 하인 대하듯 하니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푸하하하!”

검제의 표정을 본 권황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강소군의 다음 말을 듣고 진심 분노하였다.

“권황이 여기서 죽었다고.”

-쏴아아아!

권황의 주위에서 싸늘한 기운이 퍼져 나와 용권풍처럼 맴돌았다.

“미친놈이었군!”

권황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한마디 내뱉고는 한 발 내디뎠다.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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