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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에서 신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객잔.
-휙!
바람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내려섰다.
“어엇?”
객잔으로 들어서려던 상인은 갑자기 앞에 사람이 나타나자 놀랐다.
그가 자신의 뒤를 보고 다시 앞으로 봤을 때 나타난 이는 이미 객잔으로 들어간 뒤였다.
‘내가 귀신에 홀렸나?’
상인이 멍하니 섰다가 슬금슬금 물러나 길을 되돌아갔다.
상행을 떠난 첫날인데 미심쩍은 일이 생기니 불길하다 여겨 돌아간 것이다.
황급히 객잔에 들어선 이는 강소군이었다.
노이칠은 강소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이곳으로 찾아오라고 일렀다.
강소군은 낙서생과 헤어진 뒤 곧장 달려왔다. 대정무각 사람을 찾으려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 여길세?”
강소군이 객잔으로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노이칠이 손을 흔들었다.
강소군은 이상스레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노이칠은 태산이 무너져도 한결같은 모습일 게다.
강소군은 급한 마음으로 달려왔던 긴장이 절로 풀어지는 것 같았다.
“급한 일인가 보군.”
노이칠이 태평한 어조로 물으며 술을 따랐다.
“흑천맹이 공격해 오는데 천황성 고수들이 대거 참가하고 있다더군요.”
“….”
노이칠이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오랜 싸움을 결판 지을 때가 온 거지.”
노이칠이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창밖을 보았다.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십여 년 그들을 쫓아 살았네.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으니 오히려 속 시원하군.”
“어찌할 계획인지요.”
“흑천맹의 세력은 급하게 모아 오합지졸이네. 아마도 천황성의 고수들이 전면에 나설 것이라 보네.”
“그렇겠지요.”
“의천맹이 얼마나 버티는가가 관건이지. 우리가 기습을 할 기회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대정무각은 천황성의 고수들만 집중공략할 계획이었다.
“제갈 각주가 의천맹 비천각을 맡았다고 합니다. 상의는 해 보았는지요?”
“그들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원활하지는 않네. 게다가 의천맹은 지금 무력대를 정비하고 있으니 연합을 한다고 해도 뜻대로 움직여 줄지도 자신할 수 없고.”
노이칠도 대답하고는 답답했는지 연신 술을 들이켰다.
지난번 한왕의 반란과정에서 대정무각이 황실의 세력이라는 게 드러났다.
무림인들은 조정을 싫어하니 자연히 대정무각과도 소원하다.
강소군이 노이칠을 주시하며 말했다.
“천황성의 고수가 나섰으니 일반 무림인들로서는 저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
노이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얼굴이 비장했다.
그는 천황성의 고수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다. 그런 고수가 서른 명이다.
게다가 무한 외곽 장원에 오십여 명이 더 있다.
노이칠은 아마도 이번 싸움에서 대정무각 각주 대부분이 무한에 뼈를 묻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 지난 세월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던 것이다.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릴 터이니 상관 각주와 상의해 보시지요.”
대정무각의 책사는 상관청유였다. 아마도 지금 계책을 짜고 있는 이도 상관청유일 것이다.
강소군이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일러 주었다.
강소군이 말을 마치자 노이칠의 눈이 번뜩였다.
“알았네. 최선을 다해 보겠네.”
***
철권호는 감격하였다.
늘 창백하기만 했던 봉연청의 얼굴에 혈색이 살짝 돌았다.
철권호가 잠들어 있는 봉연청을 잠시 내려다보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철권호가 거처로 쓰는 후원 객청에 당종과 중유선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객청으로 든 철권호가 두 사람에게 포권을 하였다.
“두 분 신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어허. 신의는 나라니까.”
당종이 은근히 으스댔다.
중유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정양만 하면 될 것이니 나는 가 봐야겠소.”
대정무각의 각주들이 모두 모여 있는 만큼 합류할 때가 되었다.
당종이 중유선을 잡았다.
“엉? 어디를 간다는 말인가? 나와 같이 사천으로 가기로 했잖나?”
“흑천맹이 쳐들어온다는 소식 못 들었습니까? 나중에 찾아뵙지요.”
중유선이 말했다.
“에잉. 흑도 나부랭이들이 뭐가 두렵다고. 그놈들 오면 다 때려잡고 나랑 당가로 가자.”
당종이 막무가내로 중유선을 잡았다.
당종은 독과 의술의 세계에 빠져 사는 사람이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두는 이는 손녀 당우화뿐이다.
그런데 의술로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니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철권호가 끼어들었다. 표정이 잔뜩 굳었다.
“두 분께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적들이 예상보다 강합니다. 일단 피해 계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뭐라고? 나보고 흑도놈들을 피해 숨으라고?”
“지금 장강 이남에 집결하고 있는 흑도에 천황성의 고수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
당종의 안색이 굳었다.
“천황성? 기어이 그놈이 천황성을 끌어냈구나!”
당종이 화를 벌컥, 냈다.
“천황성을 아십니까?”
철권호가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당종을 보았다.
당종은 불취가 천황성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우화와 만나는 걸 결사적으로 반대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니, 그런 게 있어.”
당종이 손을 저었다.
중유선이 철권호를 잠시 보다 말했다.
“그래서 나도 가 봐야 한다는 것이오.”
중유선의 말에 당종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자네도 천황성과 무슨 관계가 있나?”
“하하. 형님. 이제까지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제게 다른 신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라고?”
“조그만 문파에 속해서 책무를 맡고 있으니 명에 따라야 합니다.”
“약사가 무슨 문파에 있다는 거지?”
“대정무각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중유선의 말에 당종이 멍한 얼굴로 쳐다봤다.
철권호도 중유선을 다시 보았다. 그 역시 새삼 놀란 것이다.
대정무각은 과거 천하사패일 때도 각주들의 신분 대부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별호만 들려 왔으나 정작 본인을 본 이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정무각은 지난 바 힘보다 신비한 움직임 때문에 명성을 더 얻고 무림인들이 경원시하였던 것이다.
“대정무각? 천하사패? 조정의 끄나풀?”
당종이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중유선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하하. 뭐라고 해도 좋습니다. 저는 약사로 형님을 뵌 것뿐이니까요. 어찌됐든 나중에 당가로 찾아뵙지요.”
“잠깐!”
당종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중유선을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연신 삿대질을 하였다.
“솔직히 털어놔. 왜 내게 접근한 거지? 당가에 뭘 노리는 거야?”
중유선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의술을 좀 훔쳐갈까 했지만….”
“했지만?”
“하하하. 형님의 의술이 너무 고명하여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중유선의 칭찬에 당종의 화가 누그러들었다.
중유선의 표정이나 말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신분을 속이다니.”
당종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우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답니다.”
“무슨 사정인데.”
대답은 밖에서 들려 왔다.
“그건 제가 대신 대답해 드리지요.”
문이 열리며 강소군이 들어왔다.
“엇, 자네가 웬일인가?”
당종이 반색하였다. 내심 손녀사위로 점찍어 둔 강소군이 나타나니 반가운 것이다.
강소군은 당종과 중유선에게 차례로 예를 갖추고 철권호에게도 포권을 하였다.
“상황이 급박하여 미리 알리지 못하고 찾아왔습니다.”
강소군은 노이칠과 헤어진 후 곧바로 의천맹으로 왔다.
“아무래도 이번 공격에 천황성 고수들이 전면에 설 것입니다. 그들의 무위는 철 맹주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철권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들의 무위가 얼마나 높은데?”
“일전에 나타난 천산신검이 천황성 검황입니다.”
당종도 비무대회를 봤다.
“그놈도 천황성에 속해 있었다고?”
“그에 못지 않은 고수들이 서른 명이나 됩니다. 그 뒤에 또 오십 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지요.”
“뭐라고? 그런 괴물이 여든 명이나 된다고?”
당종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철권호가 대신 대답했다.
“강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십대고수와 맞먹는 절대고수들입니다.”
“….”
공손 노야가 끌고 온 고수는 삼황과 삼제, 그리고 팔십여 군웅각 고수들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철권호 역시 내심 갈등을 하는 중이었다.
전력으로 봐서는 일단 물러서는 게 맞았다.
그러나 이제 막 의천맹이 결성되었다.
흑도와 싸워 보기도 전에 물러난다면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여럿 죽겠군.”
당종이 굳은 얼굴로 뇌까리고는 강소군에게 물었다.
“자네가 중 아우의 속사정을 대신 대답해 주겠다는 건 무슨 뜻인가?”
“대정무각이 왜 탄생했는지부터 알아야겠지요.”
강소군이 철권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바깥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 같아.”
커다란 술독을 지고 들어오며 심마백이 말했다.
“아이고. 기어이 술을 사러 나갔다 왔소?”
위응환이 그런 심마백을 타박했다.
새로 이사를 하다 보니 이것저것 모자란 게 많았다.
심마백은 술도 없다며 직접 나가서 사 온 것이다.
“흑도의 무리가 강 건너 집결하고 있는데 그 수가 벌써 일천을 넘었다더라고.”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는 엄연히 민가라고. 지들끼리 싸우게 둬.”
흑도의 무리도 민가는 덮치지 않는다.
“그래도 대비는 해야겠지.”
장무강이 말했다.
그때 연화심이 들어왔다.
연화심은 요즘 무한의 상권을 돌아보며 교류를 다지고 있다.
“연 문주, 아무래도 삼도문은 터를 잘못 잡은 것 같아. 전란이 끊이지를 않잖아. 차라리 경성이나 남경 상권과 교류를 하는 게 어때?”
심마백의 말에 연화심이 웃으며 말했다.
“경성, 남경은 물론이고 중원 각 도시와 다 교류를 할 건데요?”
“대상이 나오셨네. 그 돈 다 벌어서 뭘 하시려고.”
“천하를 사 버리죠.”
“하하하. 천하를 사서 뭐 하게?”
심마백이 크게 웃었다.
산동삼호 중 제일 까탈스러웠던 심마백인데 마음을 열고 나니 가장 격의 없이 대할 수 있었다.
연화심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세 분 봉공을 평생 호강시켜 드릴 테니까.”
연화심은 산동삼호를 은근히 봉공으로 삼으려 했다.
“나중에 호강시켜 주는 건 소용없고 오늘 안주나 푸짐하게 마련해 주시지?”
심마백이 술단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연화심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숙수에게 솜씨를 발휘해보라고 하지요.”
연화심이 바깥으로 나가려다 멈춰 섰다.
마당에 사람 하나가 뚝 떨어졌다. 마치 하늘에서 그대로 내리꽂힌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연화심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강 대협!”
“엉?”
강소군이 이렇듯 나타난 적이 없었기에 모두가 놀랐다.
“뭐야? 하늘을 날아다니네?”
심마백이 하늘을 쳐다봤다.
강소군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보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급하다 보니 대문으로 들어오는 걸 깜박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