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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제갈선이 결심을 굳힌 듯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흑천맹의 뒤에 또 다른 세력이 있는 듯합니다.”
철권호와 오개가 흠칫, 놀라 제갈선을 보았다.
그들 역시 천황성의 존재를 알고 있다. 그러나 무림의 파장을 생각하여 당분간 묻어 두기로 합의한 상황이다.
천황성의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봉황수가 남궁세가를 쳐들어간 뒤 천황성이라는 문파가 세상에 퍼졌는데, 드러난 실체가 없어 어느덧 묻혀 가는 중이다.
천황성의 진정한 실체는 대파나, 세가의 수뇌부 가운데 배분이 극히 높은 원로 정도만 알고 있을 것이다.
철권호는 오개와 제갈선에게 자신이 아는 천황성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개방의 협조를 구했다.
오개는 개방의 제자들에게 명을 내려 천황성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면서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때까지는 진실을 밝히는 걸 미루자고 한 게 제갈선이었다.
그런데 제갈선이 먼저 밝히며 나서니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제갈선이 철권호를 바라보았다. 동의를 구하는 시선이었다.
철권호가 잠시 갈등을 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른 세력이라니? 어디를 말하는 거요?”
장로 중 하나가 물었다.
제갈선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천황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천황성? 그건 얼마 전부터 세간에 떠도는 신비문파 아니오?”
“실체가 없는 뜬소문 아니었소?”
장로들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 중 몇몇은 안색이 굳었다.
‘역시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구나.’
제갈선은 안색이 급변한 장로들을 살피며 생각보다 천황성의 위협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적어도 서넛 이상은 천황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다.
‘혹 저들도 천황성과 내통하는 게 아닐까?’
심지어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버지 제갈후가 천황성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이제까지 상상도 못 했던 제갈선이다.
제갈선은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수십 년 무림을 종횡하신 명숙들이시니 천외천에 대해 들어 본 분도 계실 겁니다.”
“천외천?”
누군가 놀라며 말했다. 그러나 이 역시 대부분 술렁거리며 되물었다.
“천외천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누가 그리 부르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마교와 혈교, 천황성을 천외천이라고 칭해 왔지요”
“헉! 마교!”
몇몇이 경악하였다. 마교는 중원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명사였다.
간혹 중원무림에 나타났던 마교의 고수들은 기이한 마공으로 무수한 이들을 해쳤다.
“천황성이 마교와 같은 곳이오?”
누군가 황급히 물었다.
모인 이들이 문파의 장로급임에도 천황성에 대해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마교와 같이 막무가내로 살행을 저지르는 곳은 아닙니다. 다만 그보다 더 강한 고수들이 모여 있다는 것밖에 사실 저도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흑천맹의 배후에 천황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요?”
모두의 시선이 제갈선에게 꽂혔다.
“봉황수가 천황성 사람이라는 소문은 모두 들어 보셨을 것이오.”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으로 제갈선을 보았다.
“천하비무대회에 참가하러 오던 사일신창과 팽가가 고수들의 습격을 받았던 일도 아실 겁니다.”
그러자 장로들이 술렁거렸다.
사일신창과 팽가가 습격받은 사건은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다만, 무림맹주의 자리를 놓고 겨루는 자리인지라 미리 상대를 없애기 위해 벌인 암투라는 게 대개의 생각이었다.
“설마 그 사건이 천황성의 짓이라는 거요?”
제갈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천하비무대회에 느닷없이 나타난 천산신검도 천황성에 온 고수라는 게 제 심증입니다.”
“….”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천산신검의 무위를 모두가 보았다.
천황성을 처음 듣는 이들은 그들대로 놀라서 입을 닫았다.
천황성을 아는 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굳었다.
‘인세를 뛰어넘는 신기막측한 무공의 소유자들이 천 명이나 모여 있다는 천황성.’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신선계.’
그들이 사문의 원로에게 들었던 천황성은 그야말로 전설과 같았다.
그래서 마교나 혈교와 달리 천황성이 늙은이들의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천황성이 세상에 나타나고, 실재하는 문파임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런 고수들이 왜 흑도를 지원하는 거지….”
누군가 중얼거렸다.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그들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뭔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
“흑천맹도 이제 막 창설하여 조직이 채 정비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일제히 무한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힘이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제갈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논리에 따르는 흑도가 일제히 움직였다는 건 그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자가 위에 있다는 뜻이다.
제갈선이 팽가의 장로를 보며 말했다.
“한 문파가 감당할 수 없을 겁니다. 천황성 고수들이 지원하고 있는 흑천맹입니다. 게다가 사방에서 몰려든다니 그 인원이 수천에 이를 겁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그 자리에서 멸문당할 수도 있습니다.”
팽가의 장로는 등골이 오싹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철권호가 분연히 일어나 외쳤다.
“적이 누구든 여기 모인 정파의 힘도 만만치 않습니다. 충분히 대비를 하고 싸운다면 낭패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철권호의 목소리는 우렁차고 힘이 실려 있었다.
철권호가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걸아에게 물었다.
“소 형제, 흑천맹이 당도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있는가?”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으니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대엿새 안에 모두 당도할 것입니다.”
철권호가 오개에게 말했다.
“개방에서 좀 수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적이 언제 집결할 것인지 정확하게 알았으면 좋겠군요.”
오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철권호는 이어서 제갈선에게 말했다.
“제갈 장로께서는 의천맹 비천각 주인으로 적과 싸울 계책을 마련해 주시지요. 의천맹주로서 첫 번째 명입니다.”
철권호가 나머지 장로들에게 말했다.
“의천맹이 결성되어 갖는 흑도와의 첫 싸움입니다. 무력대 편성을 내일 안으로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
흑천맹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몰랐다.
“흑도의 잡졸들이 몰려온다는군.”
“흥! 죽으려고 작정했나 보군. 눈에 띄기만 해 보라지.”
“그래서 나도 의천맹에 가입했다네. 강호 정의를 실현해야지.”
객잔 안은 시끌벅적하였다.
강소군은 죽립을 눌러쓴 채 구석에 앉아 소면을 먹고 있었다.
“흐음, 오래 기다리셨나? 좀 늦었군.”
마치 미리 만나기로 했다는 듯 중년 서생 하나가 다가오더니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나는 술과 오리고기 좀 주게.”
중년 서생이 주문을 하면서 주위를 훑어보았다.
강소군은 처음 보는 자였으나 그가 낙서생임을 알아보았다. 워낙 정교한 인피면구를 쓰고 있어 독특한 말투가 아니었다면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낙서생은 일부러 익숙한 말투를 들려 준 다음 음성마저 바꿨다.
낙서생의 전음이 들려왔다.
-사방에 흑천맹의 간자들이 깔렸네.
-모두가 자네를 주시하는데 이렇듯 태연하게 돌아다니다니 놀랍군.
“어? 이런.”
낙서생이 강소군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는 척하며 일어났다.
“이런, 실례했소. 사람을 만나기로 했는데 뒷모습이 비슷해서 착각했소.”
그는 연신 미안하게 됐다며 점소이를 불러 자신의 자리를 옮겨 달라고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홍연루로 오시게.
강소군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산을 내려왔지만 여전히 무극해의 묘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래도록 홀로 다녔고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을 알아보는 시선에 익숙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적잖았다. 그래서 죽립을 눌러썼는데 간자들이 따라붙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강소군이 슬며시 주위를 살펴보니 의심스러운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강소군은 주위를 살피다 말고 피식, 실소를 흘렸다.
객잔 문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린 거지가 낯익었던 것이다.
어린 거지는 소걸아였다.
강소군은 묵묵히 식사를 마치고 반점을 나왔다.
‘놀랍군.’
그가 길을 걷자 흘깃거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새삼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화심이 새로 구입한 장원에 가기 전 배가 고파 잠시 반점에 들렀던 것이 다행이다.
강소군이 대로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흐아암!”
반점 문 앞에서 졸고 있던 소걸아가 기지개를 켰다. 작은 두 눈이 재빨리 강소군의 주위를 살펴보았다.
‘언제 이렇듯 간자들이 들어온 거지?’
소걸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심이 가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제기랄. 따라갈 수도 없고.’
소걸아가 투덜거렸다. 미행을 할 때는 거지 차림이 불리했다.
거지하면 개방을 떠올리는 게 무림인들이다.
‘그래 봐야 어디로 갈지 나는 다 알지.’
소걸아가 일어나 엉덩이를 털더니 구걸 바가지를 옆에 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홍연루 깊숙한 내실.
낙서생이 조촐한 술상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강소군이 들어서자 손짓을 하더니 잔에 술을 따랐다.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무한을 활보하니 숨어 있던 이목들이 다 튀어나오더군.”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흑천맹과 의천맹 이목이 누군지 알았으니 우리로서는 도움이 됐지.”
낙서생이 손을 벌렸다.
강소군이 의아해 보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천황성에 대한 걸 알아달라 청부하지 않았던가? 중간 계산을 해야지.”
“….”
“크하하. 농을 해 본 걸세. 자네가 떼먹지 않을 사람이라는 건 잘 아네.”
낙서생이 너스레를 떨었다.
“천황성, 정말 무서운 곳이더군. 서른 남짓한 고수로 흑천맹 일천여 무인을 쳐 죽였네.”
낙서생이 몸서리를 쳤다.
그는 고장추가 흑천맹을 휘어잡고 개파대전을 연다는 소식에 직접 찾아갔다.
은밀히 잠입했던 낙서생은 권황이 이끄는 천황성의 고수들이 흑천맹 무인들을 쳐 죽이는 걸 직접 목격했다.
낙서생이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하마터면 이 목도 성치 못할 뻔했지. 그들은 사람을 마치 개구리 잡듯 하더군.”
강소군의 안색이 굳었다.
그동안 만난 천황성의 고수들 가운데 상당수가 스스로를 천외천의 존재로 여기고 다른 이들을 한낱 미물로 보는 이들이 적잖았다.
“흑도가 많기는 많더라고. 그렇게 쳐 죽였는데도 끌어모으니 삼천여 명에 이르더군.”
낙서생은 권황이 힘으로 흑천맹을 빼앗은 뒤 재차 소집령을 내렸다고 했다.
엄청난 피바람에 대한 소문이 흑도들 사이에 퍼졌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흑도들이 순순히 흑천맹의 명을 따랐다고 한다.
“아마도 사나흘 후면 장강 이남에 집결할 걸세. 그들이 장강을 넘으면 무한은 피바다가 되겠지.”
낙서생이 말했다.
“의천맹도 대비하고 있겠지요?”
강소군은 객잔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물론이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너무 안이하게 상황을 보는 것 같더군.”
“….”
“이번에 쳐들어오는 건 단지 흑도의 잡졸들만이 아니네. 천황성 고수 서른 명이 고스란히 함께하고 있지.”
강소군의 안색이 굳었다.
“하오문은 당분간 무한에서 철수할 걸세. 그들이 흑천맹에서 한 짓을 봐서는 보이는 족족 모두 죽일 게 분명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