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188화 (188/250)

188

계곡으로 들어오는 소로를 따라 상관무영이 걸어 들어왔다.

그가 이리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강소군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아니, 지금 일 장여 거리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그를 보면서도 실재하는지 느낄 수가 없었다.

강소군이 쳐다보자 상관무영이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왜 그리 쳐다보는가. 귀신이라도 본 듯하군.”

상관무영이 개울가로 다가와 강소군 맞은편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현치 노사의 길을 가기로 한 모양이군.”

상관무영이 강소군의 검을 흘깃 보며 말했다.

그가 언제부터 와 있었을까.

아마도 강소군이 검초를 펼치는 걸 지켜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참 우직한 길이지.”

상관무영이 개울에 손을 넣어 물을 떠 마셨다.

“자네를 찾기가 쉽지 않더군. 무한을 다 뒤지다시피 했네.”

“…?”

강소군은 상관무영이 일부러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상관무영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묘언적과 겨루었다더군.”

“묘언적? 그게 누굽니까?”

“아, 이름은 몰랐나 보군. 천산신검 말이네. 천황성에서는 검황이라 한다지?”

상관무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가 무형검을 이뤘던가?”

“그래 보였습니다.”

강소군은 검황의 등 뒤에 떠 있던 검을 떠올렸다.

완벽한 검이었다.

상관무영과 겨룰 때 그 역시 한 자루 검으로 화했다.

두 사람의 검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상관무영은 검 그 자체가 되었고 검황은 검과 나뉘어 있었다.

“결국은 이뤘군.”

상관무영이 흘리듯 말하면서 강소군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리부리한 눈이 강소군의 뱃속까지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가 무형검을 이뤘는데 용케도 물렸더군.”

“무형검은 완벽했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않았지요.”

상관무영의 눈빛이 반짝였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빛이 깊어진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았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다면 더 이룰 게 있겠습니까?”

상관무영이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완벽을 이루려고 하는 거로군.”

상관무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치 노사가 언젠가 그러더군.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 그 자체가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라고.”

선문답 같은 말이었으나 강소군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현치자가 말한 무극이 결국은 끝이 없다는 뜻이니까.

상관무영이 강소군의 검을 보며 말했다.

“그동안 많이 바뀌었군. 한번 겨뤄 볼까?”

강소군으로서도 원하는 바였다.

그에게 절실한 것은 맞상대할 수 있는 자였다.

강소군이 말없이 공터로 나가 검을 늘어뜨렸다.

상관무영이 와서 서더니 등 뒤의 검을 뽑았다.

검황은 검을 버렸다고 했다. 그 자신이 검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상관무영은 여전히 검을 가지고 다녔다.

강소군이 검을 바라보자 상관무영이 검을 세우며 말했다.

“한때 검을 버렸지. 그러다 현치 노사를 만났네.”

상관무영이 검을 좌우로 휙휙, 두어 번 저으며 바람을 일으켰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느낌을 아는가? 검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기를 뿜을 때도 만족스럽지 않았네. 그건 검을 쓰는 법이 아니었어.”

“….”

“이제 와서 생각하니 길은 여러 갈래였네. 흔히 만류귀종이라고 하지. 그 의미를 제대로 아는 자가 있을지 의문이었네.”

상관무영이 검을 겨누었다.

강소군도 검을 곧추세웠다.

절대지경에 이른 두 고수였으나 자세는 이제 갓 검에 입문한 검사들과 같았다.

두 사람의 전신에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오게.”

강소군은 사양하지 않았다.

-쉭!

검이 호선을 그리며 상관무영의 가슴으로 찔러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동작이었다.

“좋아!”

상관무영이 크게 소리를 치고 몸을 회전하며 검을 쳐냈다.

-파파팍!

상관무영의 검이 상중하 단전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다.

-챙! 채챙!

강소군의 검이 아래위로 변화를 일으키며 찔러 오는 검을 쳐냈다.

두 사람의 동작은 합을 맞춘 듯 어우러졌다. 마치 수련을 하는 것 같았다.

강소군은 이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현치자와 상관무영이 서로 검초를 겨룰 때였다.

검과 검이 단순한 궤적을 그리며 상대의 요혈을 점하려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웅!

알 수 없는 기파가 터지며 상관무영이 검을 겨눴다. 그러자 그의 전신이 사라지고 검만 허공에 떴다.

‘무형검!’

눈앞에 떠 있는 검은 상관무영이 들고 있는 실제의 검이 아니었다.

강소군의 검도 쭉 뻗었다.

그러면서 천성육십사식 무수한 검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일로, 이로, 삼로… 무형의 기운이 퍼지며 검세를 이루다 마지막에는 완벽한 무형의 구를 이뤘다.

상관무영이나 검황의 무형검은 모든 것을 뚫는 창과 같았다.

이에 반해 강소군의 검은 그 자체가 완성된 하나의 세계이자 존재를 이뤄냈다.

상관무영의 무형검이 서서히 앞으로 나아 왔다.

검황은 강소군이 이룬 검의 세계를 깨뜨릴 방법을 찾으려다 결국 물러났다.

그에 반해 상관무영은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법을 택했다.

-쿠웅!

상관무영의 무형검과 강소군이 이룬 검의 세계와 부딪쳤다.

순간,

-파아아앙!

무형검과 검의 세계가 동시에 사라지며 허공이 찢기는 소리가 터졌다.

그것뿐이었다.

기파가 터지지도, 그래서 주변의 사물이 휩쓸리지도 않았다.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고 강소군과 상관무영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

상관무영이 검을 내렸다.

“현치 노사가 말한 초식의 완성을 눈으로 볼 줄 몰랐군.”

강소군이 포권을 하였다.

“감사합니다.”

진심이었다.

상관무영의 무형검을 맞상대하여 부딪치는 순간 그는 사방으로 뻗어 나간 검로에 기운을 실었다.

동시에 초식의 완성이라는 의미와 무극해의 요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내가 오히려 고맙지. 무형검이 깨졌으니까.”

상관무영 또한 얻은 바가 컸다. 그 역시 검황처럼 무형검의 완성을 위해 살아왔다.

상관무영이 검을 내리더니 기를 불어넣었다.

-파아악!

상관무영의 검이 깨졌다.

“이제야 진짜 검을 버릴 수 있겠군.”

기를 불어넣어 검을 깨뜨린 상관무영이 허리춤에 찬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강소군에게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개울가로 가더니 바위에 앉았다.

그의 얼굴이 후련해 보이기도 하고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강소군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술병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상관무영이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오십여 년이 지났군. 이제야 검을 버리다니.”

“평생을 버리지 못한 이도 있지요.”

상관무영이 흐르는 물을 보며 감회에 젖어 말했다.

“묘언적, 그자를 꺾기 위해 검을 잡았네.”

강소군이 흠칫, 놀라 상관무영을 바라보았다.

검황과 사적인 인연이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두 번 싸웠고 두 번 다 패했네.”

세간에는 전혀 알려진 바 없는 이야기다.

상관무영의 별호는 비천신검.

세상에서는 늘 그를 십대고수의 수좌로 꼽았다. 그런 그에게도 패배의 기억이 있던 것이다.

“미칠 것만 같았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으니까.”

“….”

“그런데 그가 그러더군. 그조차도 넘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천주를 말하는 것이겠군요.”

“전설로만 내려오는 심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지.”

마음만으로 사람을 벤다는 심검.

호사가들의 과장된 강호사에서나 등장하는 경지다.

“심검의 경지라니. 믿을 수가 없었네. 그런데 그가 천황성에서 웅크리고 나오지 않는 걸 보고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지.”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만난 검황이나 도황 등은 무의 궁극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상관무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검황은 넘어야 할 벽이었고 결국은 심검을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네.”

상관무영은 검을 깨뜨리며 무형검의 완성을 이뤘다.

완성을 이룬다는 건 벽을 넘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는 뜻이다.

강소군은 상관무영이 심검의 초입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상관무영이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이 아직 머니 취할 수가 없군.”

상관무영이 술병을 개울물에 던졌다. 이제 검을 배우기 시작하는 무인과 같은 표정이었다.

상관무영이 강소군을 잠시 보다 말했다.

“자네의 길은 나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겠지? 그 끝에서 다시 한 번 봤으면 좋겠군.”

강소군이 말없이 포권하였다.

상관무영이 왔던 길로 내려갔다. 나타났을 때처럼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강소군이 개울가 바위에 앉았다. 그의 시선에 상관무영이 던진 술병이 들어왔다.

술병은 개울을 따라 흘러내려 가다 돌에 걸려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강소군은 아무 생각 없이 물끄러미 술병을 바라보았다.

강소군 역시 초식의 완성을 이뤘다. 그 순간 그 역시 새로운 길에 들었다.

길이 없는 길에 들어섰으니 막막하였다. 그럼에도 마음은 홀가분하였다.

***

“큰일 났습니다.”

소걸아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이놈아, 정신 좀 차려라. 여기가 어딘 줄 모르느냐?”

오개가 호통을 쳤다.

의천맹 본단 대청.

철권호와 제갈선, 그리고 의천맹의 장로들이 대청에 모여 있었다.

소걸아가 넙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보고라서 달려왔습니다.”

“뭔데?”

“흑천맹이 북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몰려드는데 아무래도 여기 무한이 목적지인 듯합니다.”

“뭐라?”

오개가 인상을 찌푸리며 철권호와 제갈선을 보았다.

제갈선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버지 제갈후는 일전에 잠시 나타난 이후 보이지 않았다.

제갈선은 부친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으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 지내왔다.

‘혹시나?’

검황이 무림맹주를 노리다 실패한 뒤 어떻게 나올지에 대해 나름 예상을 한 바 있다.

그런데 가장 최악의 수라고 여겼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철권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의천맹 개파를 축하하러 오는 건 아니겠군요. 일전을 겨뤄야 할 듯합니다.”

철권호가 대파와 세가에서 선출된 장로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여러 장로들께서 의견을 주시지요.”

“연달아 내분을 겪은 흑천맹이 갑자기 공세를 해 오다니. 뭔가 미심쩍지 않소?”

장로 중 하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의천맹은 흑천맹에 연달아 내분이 일어나 고장추가 잠시 휘어잡았다가 이내 실각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장로들은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길게 생각할 게 있습니까? 싸우자고 드는데 피할 수는 없지요. 흑도의 무리에게 본보기를 보여 주지요.”

“그까짓 흑도의 잡졸은 우리 팽가에서 쓸어버리겠소.”

팽가의 장로가 앞장서서 말했다.

팽일호가 부상을 당하며 팽가의 명성이 다소 떨어졌다. 그랬기에 먼저 나설 생각을 한 것이다.

제갈선이 말했다.

“아무래도 싸움은 피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신중해야 합니다.”

“신중할 게 뭐 있겠소?”

“이 싸움은 그간 강호에서 있었던 분쟁과는 양상이 다를 겁니다.”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이오?”

제갈선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림에 숱한 분쟁이 있었지만 대개 문파와 문파 간의 싸움이었습니다. 그 규모가 많아 봐야 이삼백여 명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흑천맹은 그 규모가 이천 명이 넘습니다.”

“….”

“천하사패가 등장한 이후 강호의 싸움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마치 군이 전쟁하듯 무력대를 동원하여 상대를 학살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온 것이지요.”

“험, 험.”

한쪽에 앉아 있던 구양수가 헛기침을 하였다.

제갈선이 천무방의 행태를 지적한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수천 명이 어우러져 싸우는 건 전쟁이지요. 전쟁을 한다는 각오로 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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