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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취가 술병을 노려보다 입에 들이부었다.
“크흡!”
술이 아니라 시궁창 물같이 느껴져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크악, 퉤. 퉤!”
불취가 술을 내뱉고 망연자실하였다.
당우화가 달래듯 말했다.
“포기해요. 백 일은 간다니 어쩔 수 없어요. 자꾸 그러면 몸 상한다고요.”
“백 일?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데 모옥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당우화가 나갔다.
왼팔이 없는 무인이 서 있었다. 남궁악이다.
“남궁세가의 분 같은데 무슨 일이시죠?”
“당 낭자시군요. 남궁악이라고 하오. 안에 계신 분을 뵙고자 왔소.”
당우화가 경계의 눈초리로 남궁악을 훑어보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불취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미 들어 누가 왔는지 알고 있었다.
당우화를 보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돌려보내라.”
당우화가 다시 나갔다.
남궁악도 불취가 하는 말을 들었다.
“사형! 저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남궁악의 말에 당우화가 흠칫, 놀랐다.
당우화는 불취의 출신을 몰랐다. 그저 떠돌이 낭인으로 알았는데 남궁세가 출신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남궁악은 강소군으로부터 불취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나는 당신의 사형이 아니오. 잘못 봤소.”
“사형이 아니면 누가 창천검을 가지고 있었겠소.”
“….”
모옥 안팎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당우화는 어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절벽에서 불취가 자신의 검을 강소군에게 주었던 것을 직접 봤다.
모옥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와 남궁세가와의 인연은 끝났다. 돌아가라.”
“아버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본가의 문은 언제든 열려 있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하하.”
불취가 크게 웃었다. 자조 섞인 목소리였다.
“내가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가주가 더 잘 아실 것이다.”
“….”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남궁세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다시 찾아오지 말아라.”
매정한 불취의 말에 남궁악이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당우화가 모옥으로 들어갔다.
불취가 술병을 잡더니 다시 꿀꺽, 마시려 하였다. 당우화가 재빨리 술병을 빼앗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다시 술을 마시고 도피하지 말아요.”
당우화가 불취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발 부탁이에요.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한번은 들어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
불취가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
삼도문 대청.
대파와 세가, 그리고 무림의 명숙들이 아침부터 모였다.
거의 백 명에 이르는 고수들이 들어찼다.
제갈선이 나서서 의천맹을 무림맹으로 추인하자고 주장하였고 약간의 논쟁이 벌어졌다.
화산을 비롯한 대파에서 반발이 있었으나 남궁세가와 팽가, 당가 등 세가와 화룡문, 곤륜파, 무당파, 천무방 등이 지지하여 어렵게 관철되었다.
결정적인 역할은 연화심이 하였다.
“삼도문 장원은 의천맹에 넘기기로 하였고 이미 대금까지 받았습니다. 이미 이사도 마쳤으니 이제 여기가 의천맹 총단입니다.”
연화심이 의천맹에 장원을 양도하였음을 선언하자 분위기는 의천맹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오후에 의천맹을 정파의 무림맹으로 추인한다는 선포를 하고 조직과 인선을 발표하였다.
제갈선이 이미 무림맹의 조직과 인선은 준비하였기에 곧바로 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며칠간의 우여곡절 끝에 무림사상 최초의 정파 무림맹이 탄생하였다.
***
연화심은 장원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삼도문 장원을 비우는 대신 무한 외곽에 작은 장원을 구입하였다.
“아쉽지?”
중랑이 연화심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아녜요. 이제 새로이 출발해야죠. 언제까지 지난 일에 매여 살 수는 없잖아요?”
연화심이 이삿짐 행렬을 보며 말했다.
대부분의 짐은 복건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새로 구입한 장원으로 이사하는 중이다.
“몸조심해야 한다.”
“걱정 말아요. 오라버니야말로 걱정되는군요.”
연화심은 오히려 중랑이 걱정이었다.
중랑은 연화심과 함께하지 않고 대정무각과 합류하기로 하였다.
중랑은 백정무의 뒤를 이어 대정무각의 일각주를 맡기로 하였다.
대정무각이 천황성과 앙숙이라는 걸 아는 연화심으로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대정무각은 지금 천황성과의 일전을 위해 무한으로 모여들고 있는 중이다.
이미 대부분의 각주들이 무한에 잠입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산동삼호는 연화심과 함께 장원으로 이주하여 좀 더 머물기로 하였다.
연화심의 시선이 삼도문, 아니 이제는 의천맹이라 불러야 할 장원 뒤쪽 먼 산으로 향했다.
“그는 괜찮을 것이야. 정말 놀라운 사람이지.”
중랑이 말했다. 누구를 걱정하는지 아는 것이다.
“걱정하지 않아요. 다만….”
연화심은 강소군이 돌아올지 확신이 없었다.
남녀 간의 정이 생긴 뒤 오히려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그는 왜 천황성과 싸우려 하는 걸까요? 황실의 인척으로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연화심이 화제를 돌렸다.
그녀에게 천황성의 고수들은 정말 예측불가한 존재들이다.
강소군이 왜 그들과 맞서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선대부터의 악연이지. 그가 피한다거나 물러설 수 있는 게 아니야.”
대정무각의 탄생과 천황성, 대정비각의 이야기를 들은 중랑은 강소군과 천황성의 관계를 알고 있다.
갈림길이 나왔다.
“어서 가세요.”
중랑이 머뭇거리자 연화심이 말했다.
“몸조심해야 한다.”
중랑은 거듭 당부하고 말고삐를 채었다.
“이랴!”
중랑이 말을 달려 사라졌다.
연화심은 오래도록 중랑의 뒷모습을 보다 이삿짐 행렬을 따라갔다.
***
“그러니까 침으로 기혈의 흐름을 잡고 약을 쓰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 완치시킬 수 있단 말인가. 이독제독! 독을 쓰면 훨씬 효과가 빠르지.”
“환자가 감당할 수 없으니 문제지요. 천천히 체력을 보강하고….”
“아, 이 사람 정말 답답하네. 음기가 전신에 퍼져 굳어 가는 속도가 더 빠르다니까.”
당종과 중유선이 옥신각신하였다.
두 사람 앞 침상에는 봉연청이 잠들어 있었다.
이즈음 봉연청은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조왕부에서 납치되다시피 끌려 나오며 제대로 약을 쓰지 못했다.
삼음절맥으로 막힌 음기가 빠르게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온몸이 굳어 가고 있는 중이다.
-덜컥.
방문이 열리며 철권호가 들어왔다.
의천맹이 정식으로 출범하며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철권호는 장시간 회합에 지친 기색이었으나 아내의 상세를 살피는 걸 빠뜨릴 수가 없었다.
“아직 치료법을 찾지 못하신 겁니까?”
철권호가 조심스레 중유선에게 물었다.
“으흠. 삼음절맥이 보통 병인가? 이제껏 살아 있는 게 용한데 고치려니 시간이 걸리지.”
당종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서신의 말씀이 맞소. 맹주가 정말 고생했겠소.”
삼음절맥으로 음기가 퍼지면 요절하는 게 보통이다.
철권호는 조왕의 식객으로 조력을 하는 대신 온갖 영약으로 아내를 돌보아 왔다.
철권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 이러지 마시오. 의천맹주께서 이러면 감당하기 어렵소.”
중유선이 당황하여 철권호를 일으켰다.
“두 분 신의만 믿습니다.”
“정확히 말해야지. 신의는 나라고.”
당종이 말했다.
“흥! 그놈은 환자를 떠맡기고 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지?”
당종이 강소군을 찾았다.
강소군이 철권호를 대신하여 동약사 중유선에게 봉연청의 치료를 부탁을 하였고 중유선은 당종을 끌어들였다.
“하이고, 형님. 꿈 깨시라니까요. 그러다 정말 손녀를 잃고 만다니까요?”
당종은 황당하게도 당우화의 짝으로 강소군을 점찍었다.
강소군은 천산신검이라는 전설적인 검객을 물리친 젊은 고수이자 차기 무림맹주로 꼽히고 있다.
“뭐가 꿈이라는 거야? 내 손녀가 뭐가 부족하다는 거지?”
“그런 뜻이 아니라 손녀가 좋아하는 놈이 따로 있잖습니까?”
“흥! 출신도 알 수 없는 주정뱅이 늙다리에게 줄 수는 없지. 절대로 안 돼!”
두 사람이 다시 옥신각신하자 철권호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그런데 시술은 언제쯤….”
“다 정해 뒀어. 근데 이 돌팔이가 자꾸 딴소리를 하니까 늦어지는 거지.”
당종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중유선이 손사래를 쳤다.
“알겠습니다. 일단 형님 말대로 하지요.”
“진작 그럴 것이지.”
당종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해하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당장 시작하지.”
***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에 아침이 찾아왔다.
사냥꾼들이 잠시 쉬어 가는 움막 같은 집에서 강소군이 걸어 나왔다.
-지잉.
그의 손에 들린 무애검이 울었다.
오늘로 열흘째.
강소군의 일상은 무당산 현치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현치자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천성육십사식을 펼쳤다.
강소군은 편제에 의해 죽을 뻔하고 도황에 이어 검황과 연달아 겨뤄 보면서 깨달은 바가 적지 않았다.
그에게는 얻은 심득을 차분히 정리하고 자신의 무공을 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공손 노야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공이 완성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야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도황의 팔을 자른 것도, 검황에게 완성된 초식의 의미를 보여 주어 물린 것도 요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천황성 고수들의 괴팍한 성격을 십분 이용한 도박이었다. 만약 정식으로 생사결을 벌였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우.”
오전 내내 검을 그어 가며 초식을 펼쳤으나 도황이나 검황과 겨룰 때와 같이 완성된 초식의 궤적을 그려내지 못했다.
당시는 생사가 달려 있는 급박한 순간 본능적으로 전력을 다해 집중했다.
지금 다시 그때의 기억을 따라 펼치고자 하는데 기운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철권호와 만나서 달을 봤을 때, 도황의 도, 검황의 무형검….
초식의 완성에 다다랐을 때를 생각하면 오히려 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강소군은 무애검을 회수하고 무극해를 펼쳐 들었다.
이미 수없이 읽어 머릿속에 박혀 있으나 습관적으로 다시 읽곤 하였다.
「더할 수 없는 지경(至境)은 존재하는가? 더할 수 없는 지경을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함이 없는 지경이 있으니 이를 무극이라 한다.」
검황이 물러났던 것은 강소군이 완성했던 초식이 더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 비무대 주위에 수천의 사람이 있었으나 그 어느 누구도 강소군의 수법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직 검황만 그 경지를 알아보고 빠져들었고 이를 깨뜨리고자 심력을 쓰다 내상을 입고 말았다.
초식이 완성된다 함은 더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이다.
‘그 경지를 넘어 다함이 없는 지경으로 가야 한다!’
강소군은 검황이 황급히 물러난 것이 심득을 얻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검황은 더할 수 없는 지경을 보고 그 너머 다함이 없는 지경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을 것이다.
불취는 삼황이 생사경의 경지에서 미증유의 경지로 넘어가는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물론 그게 어떤 경지인지 불취로서도 몰랐다.
‘검황이 심득을 소화한다면 한 단계 더 올라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로서는 검황 하나 상대하기도 역부족이다.
강소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리 고민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