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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황?”
강소군이 천황성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들려 주었다.
듣고 있는 이들의 안색이 점차 심각하게 굳어 갔다.
“도황의 말에 따르면 천황성의 고수들이 몰려나온 것은 천주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은 공손 노야가 주도하고 있고 삼황이나 오제와 같은 고수들은 각각의 이유로 공손 노야의 말을 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천황성이라더니 모래알 같은 곳이로군.”
노이칠이 말했다.
“흥! 별 이상한 놈들이 무림을 조종하려 들다니. 화룡문은 가만 있지 않을 거요.”
조운룡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 같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수들이 수십 명이잖습니까.”
중랑이 자신의 의견을 냈다.
제갈선과 청무진인은 말이 없었다.
강소군이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는 모두와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있지만 각각의 사이는 서로 모르거나 심지어 서먹한 경우도 있다.
노이칠은 조운룡과의 사이가 껄끄럽다.
제갈선은 노이칠, 조운룡 두 사람과 거리를 두고 있다.
청무진인은 속세의 일에 간여하고 싶지 않은 듯 듣기만 할 뿐이다. 강소군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궁악과 팽일호 역시 세가연합의 일원이지만 한 산에 두 호랑이가 없다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서로 은근히 경계를 하고 있다.
강소군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은 연화심과 중랑, 산동삼호 정도다.
“중랑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천주의 뜻이라면 천주를 꺾으면 됩니다. 뱀의 머리만 치면 되니까요. 그런데 각자 야심을 갖고 있다면 일일이 상대해야 하니 피해가 클 것입니다.”
강소군이 말했다.
천황성 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십대고수에 필적할 만한 무위를 가지고 있다.
수십 명이 쏟아져 나왔으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오라버니가 무림맹주니까 모두를 끌고 쳐부수면 되잖아요.”
남궁령이 불쑥, 끼어들었다.
제갈선이 강소군을 주시하였다.
천하비무대회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무림인들은 삼도문을 떠나지 않고 대파와 세가연합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도 의견이 엇갈려 분분하다. 무림맹 결성 자체가 어렵다는 비관적인 견해까지 퍼지고 있었다.
제갈선은 강소군이 불러 오기는 했으나 무림맹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의중도 있었다.
“알다시피 천하비무대회를 망치고 말았네. 무림맹을 추진하는 명숙들은 재차 비무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높은데 강 공자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런 법이 어딨어요. 비무대회 최후의 승자가 오라버니인데. 당연히 오라버니가 무림맹주가 되는 거죠.”
남궁령이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령아. 너는 가만 좀 있거라.”
남궁악이 여동생을 제지하고 강소군에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맹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네. 하지만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도 꽤 있다는 건 알아두게.”
“누가 반대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형님이 무림맹주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운룡이 말했다.
그러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이런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강소군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비무대에 오른 것은 검황을 저지하기 위함이지 무림맹주가 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단 걸 잘 아실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남궁령이 또 끼어들려는데 강소군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지금은 무림맹주 자리를 논의하기보다 천황성을 막는 게 급합니다.”
“천황성이 또 무슨 수작을 부린다는 말인가?”
팽일호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천황성에 대한 원한이 깊다.
천황성에게 당한 뒤 가문에 연락해 무력대 일백을 받아 삼도문 주위에 대기시킨 상태다.
“공손 노야는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이미 흑천맹을 탈취하여 흑도의 지배권을 가졌습니다. 정파 무림을 그대로 놔둘 리 없지요.”
“그가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제갈선이 물었는데 오히려 강소군이 되물었다.
“제갈 선배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만.”
강소군이 주시하자 제갈선이 슬며시 시선을 돌려 청무진인을 보았 다.
아버지 제갈후가 천황성과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 찜찜했던 것이다.
“흑도는 힘으로 제패할 수 있지만 정파는 그럴 수 없을 것이오. 민심을 얻지 않는다면 장악할 수가 없소.”
제갈선이 대략의 의견만 내놓았다.
“흥! 그놈들이 어떻게 나오든 팽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소!”
팽일호가 말하자 남궁악도 맞장구쳤다.
“그건 본가도 마찬가지요.”
노이칠이 혀를 찼다.
“의기는 알겠는데 대체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면서 싸우려고만 든단 말인가.”
“그들이 먼저 도발을 했으니 당연히 싸울 것이오.”
팽일호의 전신에서 살기까지 피어올랐다.
“그들은 무한 외곽 장원에 있네. 알려 주면 가겠나?”
노이칠이 팽일호를 보며 말했다.
“불과 서른 명으로 수천 명이 모인 흑천맹을 접수했네. 지금 무한에 있는 천황성 고수는 쉰 명에 이르지. 이들을 감당할 수 있겠나?”
“….”
노이칠의 신랄한 지적이 떨어지자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이제까지 듣고만 있던 청무진인이 강소군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 사람을 불러 모았으니 강 공자가 생각한 바가 있을 게 아닌가. 말씀을 하시게.”
강소군이 제갈선과 청무진인을 향해 말했다.
“두 분은 의천맹이 있음을 아실 겁니다.”
삼도문이 흑천맹과 천무방으로부터 위협을 받을 때 결성된 의천맹은 천하비무대회가 추진되며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무림맹이 결성되지 못했으니 의천맹에 힘을 실어 주셨으면 합니다.”
“철 대협이 사라졌는데 무슨 수로 사람들을 모은다는 말인가?”
제갈선이 물었다.
“철 대협이 자리를 비운 건 다른 사정이 있었습니다.”
강소군이 말하자마자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섭섭하군. 내가 맡은 바 책임을 저버릴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오.”
철권호였다.
“….”
철권호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철 모를 믿는다면 천황성의 야욕을 막는 데 앞장서겠소.”
철권호의 등장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제갈선이었다.
“철 대협!”
“미안하게 됐소. 급한 일이 있어서 말도 못 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소.”
강소군이 모두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분들이 나서 준다면 의천맹이 사실상 무림맹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강소군이 자신들을 불러 모은 이유를 깨달았다.
청무진인은 대파에 영향력이 있고 제갈선과 팽일호, 남궁악은 세가 연합의 중추나 마찬가지다.
연화심은 무림맹의 터전이 될 삼도문의 주인이고, 노이칠과 조운룡은 과거 천하사패로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철 대협이 나선다면 재야 무림인들도 따를 것이라 봅니다. 뒷일은 철 대협께 맡기고자 합니다.”
***
-우두둑!
가루가 된 바둑돌이 손아귀에서 흘러내렸다.
“검황이 사라졌다고?”
공손 노야의 갈라진 목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흔들었다.
부복한 무인이 부르르 떨었다. 공손 노야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다.
하필이면 자신이 보고하게 된 걸 저주하며 말을 이었다.
“강소군 그놈이 나타나서….”
-팍!
공손 노야가 앞에 놓인 바둑판을 쓸어버렸다.
바둑알들이 튕겨 나가 사방 벽에 박혔다.
‘이놈들이 간이 부었구나. 황이니 제니 붙여 줬더니 감히 제멋대로 굴어?’
공손 노야의 허연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분이 솟구쳤으나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삼황오제는 그로서도 껄끄러운 존재들이다. 게다가 여기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흐음. 검황이 실패하다니 의외인데?”
공손 노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권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도황에 이어 검황도 사라지다니. 이거 참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권황이 염려스럽다는 듯 말했으나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노야, 어떡할 셈인가? 나는 약속대로 흑천맹을 가져왔는데?”
공손 노야가 분을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찾았다.
“검황이 너무 무책임하게 행동하여 잠시 흥분하였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권황께서 좀 더 수고를 해 주셔야겠소.”
“흐음. 그거야 어려울 게 없긴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노야의 답을 확실히 듣고 싶은데?”
권황은 느긋했다.
공손 노야가 속으로 욕을 하면서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주께서 등천하실 날이 머지않았소. 검황과 도황이 사라졌으니 뒤는 권황께서 잇는 게 당연하오.”
“하하하.”
권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크게 웃었다.
“공손 노야의 뜻이 그렇다면야 받아들여야지.”
권황이 웃음을 그치고 정색을 하였다.
“그렇다면 천령대법은 언제 전해 줄 것이오?”
“천령대법은 당대에서 한 사람만 할 수 있다는 걸 알지 않소. 천주가 등천하면 바로 건넬 것이오.”
“흐음.”
권황이 공손 노야를 노려보며 말했다.
“노부는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참 싫어하오. 내가 이제껏 천황성에 머물렀던 이유도 천주와 맺은 한 마디 약속 때문이었지.”
권황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내가 이 쓰레기 같은 흑도의 무리를 접수한 수고를 저버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
공손 노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황이 만족한 듯 말했다.
“내가 뭘 더 해 주면 좋겠소?”
“흑천맹을 끌고 와서 무한의 무림인들을 주살해 주시오.”
권황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파 무림인들을 죽이라고?”
“무림에서 명망이 있다는 자들부터 제거해 주시오. 그러다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면 적당히 응전하다 물러나면 되오.”
“흐음. 나보고 악역을 맡으라는 거로군.”
“굳이 본인까지 나설 건 없소.”
권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하겠소만… 누구를 내보낼 거요?”
공손 노야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내가 직접 나설 것이오.”
“오호? 노야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무림을 장악해야겠소.”
“하하. 노야가 급하긴 한 모양이오.”
공손 노야는 대답하지 않았다.
권황이 껄껄, 웃으며 대청을 나갔다.
그 뒤를 바라보는 공손 노야의 표정이 싸늘하다.
‘흥! 너희는 결국 소모품이다. 천령대법? 꿈을 깨는 게 좋을 것이야.’
***
“이건 말도 안 돼!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고!”
불취가 악을 썼다.
당우화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받았다.
“술독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을 건져 놓았더니 엉뚱한 소리를 하시네?”
“이이익! 어서 해약을 가져오라고.”
불취가 눈을 부릅뜨고 윽박질렀는데 당우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해약도 없대요. 그러니 포기해요.”
“이, 이럴 수가.”
불취가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이제 끝났구나.”
“이제 시작이죠. 새출발을 하는 거에요.”
“대체 이런 악독한 수를 어떻게 생각한 거지?”
불취가 눈앞의 술을 보며 황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술을 마시면 토할 것 같은 구역질이 났다.
당우화가 어제 저녁 준 탕약을 마신 뒤부터였다.
“당신은 일생일대의 은인을 만난 거라고요. 그러니 원망하지 마세요.”
얼마 전 강소군과 함께 찾아온 연화심은 불취의 술 때문에 고민하는 당우화를 데리고 동약사에게 갔다.
백정무가 죽고 난 뒤 노이칠은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걸 보다 못 한 동약사가 한마디 한 걸 연화심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 녀석 저러다 술독에 빠져 죽겠네. 단주탕을 먹여 버릴까 보다.
복용하면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한다는 탕약이 있다는 걸 연화심이 당우화에게 전했고 그 길로 당우화는 동약사에게 간청해 받아 왔던 것이다.